24대 진흥대왕(眞興大王)

[참고] 백제:성왕, 위덕왕 고구려: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중국:남북조(南北朝)

서기 540년, 진흥왕이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삼맥종(삼麥宗) 혹은 심맥부 (深麥夫)이며, 그 때 나이 7세로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그는 나이가 어려 왕위에 올랐으므로 왕태후가 대신하여 나라의 정치를 돌보았다.

2년(서기 541년) 3월에 눈이 한 자나 쌓였다.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아 내외 군사의 일을 맡게 하였다.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허락하였다.

5년(서기 544년) 2월에 흥륜사를 지었고, 사람들이 출가하여 중이 되고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6년(서기 545년) 7월에 이찬 이사부가 왕에게 아뢰기를,

"나라의 일이라는 것은 임금과 신하의 잘잘못을 기록하여 잘하고 잘못한 일을 만대에 보이는 것입니다. 사기(역사)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놓지 않으면 후세에 어떻게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문사(글하는 선비)들을 모아 역사책을 펴내게 하였다.

9년(서기 548년) 2월에 고구려가 예나라 군사들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 충주)을 공격하였다. 위급해진 백제가 구원병을 청하자 왕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냈다. 그는 날쌘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달려가서, 이들을 치고 백제를 구해 주었다.

11년(서기 550년)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가 싸움에 지친 틈을 타서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두 나라를 치도록 하였다.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위 두 성을 공략하여 함락시키고 성을 보수하여 1천 명의 군사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12년(서기 551년) 3월에 왕은 국내를 순시하다가 낭성(지금의 충주)에 이르러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에 빼어난 재주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가까이 불러 하림궁(河臨宮)에 머물러 있게 하고, 그들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우륵과 이문은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은 우륵에게 명하여 12현금을 만들고 곡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그 나라가 어지러워졌으므로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왔는데, 그 악기를 가야금이라 하였다.

왕은 또 거칠부 등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했는데, 그는 큰 승리를 거두어 10개 군을 차지하였다.

13년(서기 552년) 왕은 계고, 법지, 만덕 세 사람에게 명하여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수업을 마치자 왕은 세 사람에게 그들이 배운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말하기를,

"앞서 낭성에서 우륵에게 듣던 음악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하고 칭찬하며 후한 상을 내렸다.

14년(서기 553년) 2월에 왕은 소사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로 궁전을 지었다. 그런데 그곳에 황룡이 나타나자, 왕은 이상하게 여겨 이 궁전을 절로 개축하여 황룡사(黃龍寺)라는 이름을 내렸다.

7월에 백제의 동쪽 변두리를 공격하여 신주(지금의 광주)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10월에는 백제의 공주를 맞이하여 작은 왕비로 삼았다.

15년(서기 554년) 7월에 명활성을 쌓았다. 이 때 백제 왕 명농(성왕)이 가량 등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관산성의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적을 맞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병사를 이끌고 나가 싸움을 도왔지만 매우 어려웠다.

이 때 비장인 삼년산군(三年山郡 지금의 보은)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갑자기 적을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마침내 적을 격파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좌평 4명과 사졸 2만9천6백 명을 죽이니 적은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없었다.


16년(서기 555년) 정월에 비사벌(창녕)에 완산주(전주)를 설치하였다. 10월에 왕은 북한산에 행차하여 국토를 측정하였다. 11월에 왕은 북한산에서 왕궁으로 돌아오면서 지나는 길에 죄수들을 풀어 주었는데, 두 가지 이상 죄를 지은 자 외에는 모두 놓아주었다.
19년(서기 558년) 2월에 귀족들의 자제와 6부의 부유한 백성들을 작은 서울인 국원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이 때 신득이 포와 노(큰 활)를 만들어 왕에게 바쳤는데, 이것을 성위에 비치하게 하였다.

23년(서기 562년) 7월에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국경 지대의 많은 민가를 노략질하였다. 왕은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적을 쳐서 1천여 명을 죽였다.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이사부에게 명하여 이들을 정벌하게 하고, 사다함을 부장으로 삼았다. 이 때 사다함은 5천 기를 거느리고 앞서서 진격하였다. 그가 전단문으로 들어가서 백기(흰 기)를 세워 놓자, 성중에서는 크게 두려워하여 혼란에 빠졌다.

뒤를 이어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니 모두 항복하였다. 가야의 반란을 평정하고 논공 행상을 하는데 사다함의 공이 가장 컸다. 그래서 사다함에게 좋은 논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지만, 사다함은 한사코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거의 강제로 상을 내렸다. 하는 수 없이 상을 받은 사다함은 포로들을 모두 놓아주어 양민으로 만들고, 논과 밭은 싸움에 공이 많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칭찬하였다.

27년(서기 566년) 2월에 지원사와 실제사의 두 절이 준공되었다. 왕자 동륜 (銅輪)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이 해에 황룡사의 건축이 완료되니, 황룡사는 신라에서도 이름 높은 절이 되었다.

33년(서기 572년) 정월에 연호를 홍제라 고쳤다. 3월에 왕태자 동륜이 죽었다. 10월20일에는 싸움터에서 죽은 군사들을 위하여 팔관회를 베풀었는데 7일 만에 끝났다.

37년(서기 576년)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아 들였다. 이보다 앞서 많은 신하들이 인재의 됨됨이를 알지 못하여 근심한 끝에, 많은 사람들을 한데 모아 놀게 하면서 그들의 행실을 살펴 등용하려고 했다.

그런 끝에 용모가 뛰어난 두 여자를 뽑았다. 그들의 이름은 남모와 준정이다. 그들을 중심으로 3백여 명이 모였는데, 두 여자는 점점 그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시기했다.

어느 날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강물에 던져 죽였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어 준정은 사형되고, 모였던 무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후 나라에서는 다시 잘생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 시키고 화랑(花郞)이라 하여 받들게 하니, 나라 안에서 젊은이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산과 강을 찾아 다녔다. 아무리 험하고 먼 곳이라 하여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 중에서 어질고 휼륭한 사람을 가려 뽑아 조정에 추천하게 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는,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나오게 되고, 뛰어난 장군과 용감한 군사가 이들로부터 나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서도 기록하기를,

"우리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다. 이것을 풍류라고 하는데, 이 가르침을 설치한 근원은 화랑의 역사에 상세히 실려있다. 이것은 유교, 불교, 선교의 3교를 두루 포함한 것으로 모든 백성들을 가르친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집에 들어와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와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것은 노나라 공자의 가르침이다. 또한 모든 일을 서슴없이 처리하고 말없이 실천 하는 것은 주나라 노자의 가르침이다. 악한 일은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만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당나라의 영호징이 쓴 [신라국기]는,

"귀인의 몸가짐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가려 뽑아서 분을 바르고 곱게 치장하여 화랑이라 이름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섬겼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안홍 법사가 수나라에 들어가서 불법을 연구하다가 그곳의 중 비마라 등 두 승려와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은 능가승만경(불경)과 불사리를 왕에게 바치었다.

8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 시호를 진흥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열심히 불교를 믇었으며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었는데, 스스로 법운이라 말하며 평생을 마쳤다. 왕비도 또한 이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나, 온 백성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 [nssillak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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