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사랑이야기 3부 (32)

가는 길 낡은 가로등 따라 그녀가 말없이 웃었다. 너도 내가 좋긴 하지? 말 잘못 했다가 이 좋은 느낌 깨버리면 가슴 아플 것 같다. 20분 가량 그녀와 길을 걸었다. 그녀집 가는 길이다. 제법 크고 높은 건물 앞에서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건물에는 **오피스텔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랏! 오피스텔이네. 나영씨 사는데가 여기에요?"
"네. 동엽씨처럼 자취방인 줄 알았어요?"
"그 비슷한 건 줄 알았는데."
"하숙집 판 중도금으로 구했어요. 전세에요."
"몇호에요?"
"안들어 가 보실래요?"
"몇 혼지만 가르쳐 주세요. 시간이 늦었어요. 가 봐야지요."
"405호실이에요."
"음, 405호. 알겠습니다."
"진짜 가시게요?"
"자주 놀러 올게요. 그래도 되지요?"
"그럼요. 하루 이틀 같이 산 처지도 아닌데."
"그럼 잘 들어 가세요. 전 갑니다."
"안녕."
그녀가 손을 흔든다. 허허, 나도 이틀 전 그녀처럼 자주 뒤를 돌아다 보았다.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가졌다. 그녀도 나를 보고 서 있다.

히히, 걸으면서 그녀가 떠오를 때마다 히죽거렸다. 뭘봐 쨔샤. 나만 히죽거리는 줄 알았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나와 비슷한 놈을 만났었다. 문닫힌 만화방 앞을 서성거리며 거기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나처럼 히죽거리는 백수같은 놈을 보았다. 웃긴 만화책을 봤나? 아니면 자네도 기쁜일이 있냐? 많이 기뻐해라.

룰루 랄라, 삼층 계단을 숨도 안쉬고 뛰어 올라갔다. 다 올라와서 발을 헛디딘 관계로 넘어졌다. 많이 아팠다. 달이 내 모습을 보며 놀리 듯 웃고 있다. 손에 잡히는 곳에 있다면 잡아서 한대 패 줄텐데 너무 높다. 그럼 달에 걸려 떠오르는 그녀도 높이 있는 것인가? 하기야 나는 삼층인데 그녀는 사층에 사니까 분명 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훗, 내 미래가 조금만 더 밝아도 내 마음이 그녀따라 밝을텐데 아쉽다.

요즘 학원 생활엔 그다지 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몇 달이나 했다고 바로 결과를 바라겠는가. 더 노력을 해야 하지만 희망이 보이면 좋지 않은가.
그녀가 청소해 주고 간 내 옥탑방, 구석에 놓여진 탐스런 종이가방. 그녀가 놓고간 옷가방을 열어 보았다. 여름 셔츠 하나와 면바지가 들어 있다. 그리고 엽서 한장. 혹시 나를 기쁘게 하는 좋은 말이 있을까 읽어 보았지만 단 하나의 시 뿐이다. 그것도 그녀의 시가 아닌 이은미라는 사람의 시다. 이은미가 누구여? 가수 이은미 그 사람인가? 일단 시는 나중에 음미해 보고 옷을 입어 보자.

오늘 더움으로 인하여 땀이 많이 베인 내 옷들을 터프하게 벗어 던졌다. 음악을 틀어 놓고 부드럽게 벗는건데 잘못했다. 단추가 하나 떨어졌다. 단추 쯤이야 나도 달 수 있다.
음, 옷이 날개다. 단정한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 내 모습이 지금 반듯하다. 허허, 그녀가 주었기 때문에 이 옷이 너무 맘에 든다.

제목 좋다. 사랑입니까. 모르겠는데요. 엽서에 적힌 시의 제목은 '사랑입니까'였다. 이걸 나에게 물어 보면 안돼지.



당신 앞에 서면
나는 한 송이 이름없는 들꽃입니다.

밤돋아 피었다간 다투어 지는 꽃.
채 묻어나지도 못할 때깔로 피어선
지레 내일이 두려워지는
그대로의 작은 들꽃입니다.

가지는 안개에 싸였습니다.
움츠러진 이파리엔 벌써부터
밤 서리가 분분합니다.
시선을 기다리는 꽃잎은
말없이 고개만 떨구우고
가득 물 오른 뿌리에는
어느 새 열매가 그립습니다.

하, 달빛도 부끄러운 오늘은
제게도 사랑이 있음입니까.
이렇듯 하야니 온몸이 부서짐은
달빛 속에 선 까닭입니까.
당신 앞에 선 까닭입니까.



이해가 될 것도 같지만 조금 어려운 시다. 하지만 마지막 연은 맘에 든다. 당신 앞에 선 까닭입니까. 내 마음을 이해해 주는 단어다. 근데 왜 슬퍼지냐. 백수가 당신앞에 서 봤자 초라해지기 밖에 더하겠냐. 그녀가 주었던지 말던지 시가 내 처지때문에 슬퍼졌다. 그래 나는 이름없는 들꽃 같다. 함부로 사랑할 수 없는. 백수는 좋아할 수는 있어도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나이가 연애만 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삶은 현실인데 말이다. 외로운 그녀 처지에 그리운 감상에 빠질만도 하다. 나는 시선만 기다리는 들꽃이 맞나 보다. 그녀곁에 외로움을 달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녀가 말한 마땅한 사람이 나타나면 말이다. 백수인 나는 빠져야 되는구나.

갑자기 설버서 마음따라 울었다. 그녀가 사준 옷을 입고 그녀가 닦아 준 방바닥에 앉아 꺼이 꺼이 울어 버렸다. 마땅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녀는 한 줌 미소만 지어주고 떠나 버릴 것 같다. 그리고 그 미소가 좋아 나는 허허 웃겠지. 나는 초라한 들꽃이고 자기는 달이라 이거지. 그렇구만. 에이씨, 오늘 시집 언제 가냐는 말은 왜 물어가지고 스스로 초라하게 만드냐. 이 시가 그러니까 좋은 사람 두고 말 못하는 나를 묘사한 것 같아 너무 슬프다.

달빛이 부끄러워 밖에 나가지 못하고, 그녀가 사준 옷을 고이 접어 머리맡에 놓아 두고는 불을 껐다. 어둔 방을 장식하는 빨간 담뱃불과 밤안개처럼 번져가는 연기불로 삼분을 발악한 뒤에 잠이 들었다.

또 이상한 꿈을 꾸었다. 예전에 한 번 꾼적이 있는 꿈이다. 그녀가 결혼하는 식장에 가서 부조금 내고 밥 얻어 먹는 꿈. 첫번째 꿈에서 깨었을 때보다 훨씬 슬펐다.

내년에 내 나이 진짜 서른이다. 그녀가 내년에 결혼을 한다고 했지? 십자 창문 사이로 해 어스름이 밝아 온다. 나이 서른쯤에 내 사랑한 사람의 결혼식장에서 해 어스름이 밝아 오는 창을 멍한 눈으로 주시하며 혼자 가슴 아파했던 기억을 웃으며 지우자. 근데 왜 이딴 생각을 하는거야. 어제 그녀를 잘 만나고 나서 하는 생각이 왜 이딴 거냔 말이다. 성격 그 이상하네.배가 고파서 그렇나?
"커억!"
컵라면 하나 끓여 먹었다. 아직 여섯시도 안됐다. 너무 일찍 일어 났다. 다시 자야겠다.

"쾅! 쾅!"
이게 왠 소리냐. 참 낯익은 소리다. 그녀는 아닐테고 주인 집 아저씬가? 오랜만에 방문 과격하게 노크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시계 바늘은 아홉시를 조금 너머 가리키고 있다.
"누구세요?"
"저에요."
"에?"
"저라구요."
"나영씨?"
"네."
뭐여 이거. 아침부터 그녀가 왠일일까? 후다닥 추리닝을 입고 문을 열었다.
"나영씨 아침부터 왠일이에요?"

그녀는 스테인레스 남비를 들고 웃고 있다. 그리고 하숙집에서처럼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 방을 떡하니 들어와 버린다. 조금 황당하다. 내가 지금 정신을 못차리는 상태가 당연할 것이다.
"아침 먹으려고 왔어요. 어제 보니까 아침에는 컵라면 먹는 것 같아서요. 이렇게 자주는 못해요. 오늘은 동엽씨 집 알게된 첫 날 아침이라 특별히 찌개 재료를 만들어 왔어요. 고맙죠?"
"고맙긴 한데..."
"밥은 있어요?"
"해야 될걸요 아마."
"그럼 밥은 동엽씨가 하세요. 나는 찌개를 끓일테니까."
"밥하는 것은 문제가 안되는데 이러면 제가 부담스러운데..."
나를 보던 그녀의 시선이 주방쪽으로 돌려지더니 걸음을 옮겼다.
"걱정마세요. 내일은 안 올거에요."
자기 주방인양 싱크대 앞에 서서 냄비에 물을 붓고는 가스렌지에 그것을 올려 놓는다.

"거기 쌀 좀 주세요."
"어디 있는데요?"
"싱크대 안쪽 검은 비닐 봉지에 있어요."
"얼마큼 드릴까요?"
"알아서 주세요."
그녀가 라면 끓여 먹는 대접에다 쌀을 담아 주었다.
"쌀 씻어야 되지 않아요?"
"욕실 가서 씻을게요. 여하튼 고마워요."
"고마운 줄 알면 됐어요."
아직 정신이 멍하다.

쌀을 씻어 방안에 있는 전기 밥솥에다 넣었다. 쪼그려 앉아 밥통에서 모락모락 새어 나오는 김을 보고 정신을 차리는 중이다. 그녀는 주방에서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다.
"동엽씨 밥상은 어디 있어요?"
"방에 있어요."
밥상은 책상겸용으로 쓰는 좋은 것이 있지. 밥상위에 놓여진 것들을 치워 방 중앙에 놓았다. 뭘까 이거? 아이씨, 모르겠다. 아침부터 그녀를 보게 되어 기분 좋다.
"동엽씨 냉장고도 있네요?"
"그거 제것 아니에요. 제 들어오기 전부터 있던 거에요."
"김치 있어요?"
"네. 냉장고 젤 밑에 보면 뜯지 않은 봉지 김치가 하나 있을 거에요."
"달걀도 있네요."
"그건 먹어도 되는거에요. 우유는 손대지 마세요. 빵두요. 다 유통기한 지난 것이니까."

그녀가 달걀 프라이와 김치를 밥상위에다 갖다 놓고는 후다닥 다시 주방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후다닥 밥그릇을 두개 갖다 놓았다. 왜 혼자 사는데 밥그릇이 두개가 있을까? 그녀가 냄새 좋은 찌개를 가져와 내려 놓고는 밥통을 보며 쪼그려 앉아 있는 내 건너편에 앉았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보인다.
"어느게 동엽씨 숟가락이에요?"
"남자것처럼 보이는 거 있잖아요."
"그럼 나머지 하나는 여자꺼에요?"
"네."
"여자 것을 왜 샀는데요?"
"사고 싶어서 산게 아니라 셋트로 팔길래."
"그럼 이거 사용한 사람 있어요?"
"없어요."
"밥 아직 안됐어요?"
"뜸 들이는 중이에요."

그녀가 갑작스레 찾아온 것에 다소 당황이 되었으나 오랜만에 그녀와 마주하며 작은 밥상에서 밥을 먹어 보는 것이 너무 좋다.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것 같았는데 오늘 아침은 느낌 좋은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다.
자주 보던 모습이다. 젓가락을 물고 천천히 반찬을 주시하며 입을 오므리는 모습. 내가 퍼준 밥이 좀 많아 보인다.
"먹읍시다."
"그럽시다."

많이 늘었네. 찌개가 참 맛있다. 그녀의 음식 솜씨가 한달새에 눈부시게 발전했을리 없다. 자취하면서 내 입맛이 많이 낮아진 탓일거다. 아이씨, 또 천천히 먹잖아. 기다려 줄까 말까? 에이 그냥 먹어 버리자.
그녀가 채 반도 먹기전에 밥 한공기를 비웠다. 새벽에 컵라면을 끓여 먹었지만 입맛이 땡겼다. 찌개에 고기가 들었던 관계로 트림이 나오려 했다. 그녀는 나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식사를 하고 있다. 앉아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커어억."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 보았다. 나를 무뚝뚝하게 한 번 쳐다 봤다. 씩 웃어 주었다.
"이왕이면 트림은 하지 말아요. 그래도 많이 발전 했네요."
"물 떠다 드릴까요?"
"그래 주세요."

그녀도 밥을 다 먹었다. 상당한 양이었을텐데 밥 한공기를 다 비웠다. 남은 찌개는 학원 갔다 와서 라면 사리 넣어 다시 먹어야 겠다. 호호호 오늘 밤 밥값도 굳겠네 하하.
"동엽씨. 입가심하게 커피 한잔 끓여 주세요."
"그리지요 뭐."
컵하고 커피믹스 하나 갖다 주고 커피 포트에 물을 올렸다. 물 끓는 소리가 듣기 좋다.
"동엽씨 저 옷 입어 봤나 보네요."
그녀가 어제 고이 접어 놓은 옷을 본 모양이다. 그녀의 컵에다 물을 부어 주며 답을 했다.
"잘 어울리던데요. 고마워요."
"그 소리는 한달전에 들었어야 했어요."
내가 소리 없이 하숙방을 나갔던 것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참, 그 속에 있던 시도 잘 읽어 보았어요. 근데 하필이면 내용이 그런걸로 했을까요?"
"내용이 어때서요?"
"내용이, 음, 꼭 내 처지를 비난하는 것 같아서요."
"네? 어떻게 해석을 했기에..."
"어제 그 시 읽고 나서 달이 부끄러워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니까요."
"엥? 달이 왜 부끄러워요?"
말할까 말까. 뭐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지. 그래 마땅한 사람 나타나기 까지는 내 마음 약간은 표현해도 되겠지 뭐.
"그 달에, 응... 나영씨가 걸려 있거든요. 내가 좀 초라하게 느껴져서."
"걱정된다. 그러지 마요 동엽씨."
"걱정은 무슨..."
"흠, 해석을 자기 처지에 맞추어 읽어 버렸군요. 됐어요."
"잘해 주어서 고마워요. 덕분에 훌륭한 아침을 먹었습니다."
"훗."

그녀가 컵에 입을 대려다 피식 웃는다. 더 훌륭한 아침도 만들 수 있다는 의민가?
"왜 웃는데요?"
"고맙다는 말은 오히려 제가 해야 돼요."
"그건 왜요? 애써 찌개 만들어 예까지 온 것은 나영씨에요."
그녀가 벽에 기대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은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눈빛이 참 고왔다. 다소 슬프게도 보였고.
"동엽씨."
"네."
"나 아침에 이렇게 온 것은 순전히 나 때문이었어요."
"무슨 말인데요?"
"혼자서 아침을 먹으려니까 눈물이 쏟아졌어요. 오늘 아침 처음으로 혼자 맞이하는 아침이었어요. 하숙집 학생들도, 언니도 가버린 혼자서 맞는 아침이었거든요. 할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막막했어요. 그래서 동엽씨에게 왔어요."

그녀의 가라앉은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아프다. 그랬구나. 에구 맞구나. 대충 어제 느꼈던 설움들 맞구나.
"이봐요 나영씨."
"네."
"자꾸 감상적으로 되지 마세요. 자꾸 그러면 더 힘들어져요. 내일부터는 꾹 참고 혼자서 아침 먹어봐요. 빨리 적응해야지요."
그녀가 두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 보았다. 꼭 째려 보는 것 같다.
"나 집에 갈래요."
"데려다 드릴까요?"
"혼자서 갈 수 있어요."

33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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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 이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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