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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아 카피톨리나 AElia Capitolina. [Æ 'lia Capitoli'na]

The name given by the Roman emperor Hadrian to a city he raised on the ruins of Jerusalem about A.D. 136. He refused to let any Jews enter the city and sought to stamp out the very name of Jerusalem. Temples were erected to Capitoline Jupiter and to Phrygian Astarte. The city bore the above name for centuries.

--- Morrish Bible Dictionary
 
▶ AELIA CAPITOLINA (JERUSALEM)알리아 카피톨리나 예루살렘의 새 이름

그런데 주후 135년경 로마통치 시대 하드리안 황제는 예루살렘의 이름을 알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로마식 이름으로 바꾸고, 동시에 기독교의 흔적을 말살하기 위하여 골고다 언덕 위의 비너스 신전을 세웠다. 주후 66년부터 4년동안 계속되었던 제1차 유대인 반란은 로마제국의 압제에 항거하여 일으켰던 유대인들의 독립운동입니다. 그러나 서기 70년 마지막 보루였던 예루살렘이 로마군에게 함락되고 성전은 불에 타서 파괴됨으로써 유대인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로마제국은 ‘반란’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무자비한 응징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처참한 학살과 약탈로 피로 물든 도성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서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입니다. 솔로몬 왕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은 주전 580년대 바벨론 군대가 파괴하였고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향해서 두번째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주전 515년). 그후 약 600년동안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의 예배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구심점의 역할을 했었습니다. 주후 70년 로마군이 두번째 성전을 파괴했을 때 유대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유대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사사시대 이방 외적들이 이스라엘을 압제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보내주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것처럼 다시 한 번 ‘구원자’를 보내주셔서 유대인들을 로마제국의 학정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또한 바벨론 군대가 파괴한 솔로몬 성전이 70여년만에 재건된 것처럼 로마군이 파괴시킨 두번째 성전도 약 70년 후에 다시 재건시켜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통치하에서 유대인들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는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금지시키고 예루살렘을 로마식 도시로 재건하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산 위에는 로마인들의 최고신인 주피터의 신전을 건축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반감은 걷잡을 수 없이 비등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출현합니다. 그는 ‘바르 코크바’였습니다. 그의 본명은 시므온 바르 코시바였으나 당시 유대인들은 그를 구약성경 민수기 24장 17절에 예언된 이스라엘을 구원할 ‘별’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바르 코크바’ 즉,‘별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바르 코크바가 유대인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된 데는 그의 탁월한 지도력도 한몫했지만 랍비 아키바(Rabbi Akiva)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컸습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로 추앙받던 랍비 아키바는 바르 코크바를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아,왕’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주후 132년 바르 코크바가 로마에 반기를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그를 중심으로 해서 굳게 뭉쳤습니다. ‘두번째 유대인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반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것은 로마제국의 시각에서 본 것이며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로마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자유를 위한 투쟁인 것입니다. 바르 코크바는 처음부터 게릴라전으로 로마군을 공격하였습니다. 정규 전쟁으로는 로마군의 적수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그는 게릴라 전법을 구사했고 초기에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총독 루푸스(Rufus)는 휘하의 10군단과 함께 예루살렘을 버리고 가이사랴로 이동합니다. 바르 코크바가 이끄는 ‘반란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이로써 3년간 예루살렘은 로마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통치자가 된 바르 코크바는 동전을 주조하고 ‘예루살렘 해방 1년’‘이스라엘 자유 2년’과 같은 연도를 표기하기도 합니다. 

시리아 지역의 총독 말세루스(Marcellus)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으나 바르 코크바의 게릴라 전술 앞에 큰 손실을 입고 반란을 진압시키지 못했습니다. 로마제국의 하드리안 황제는 유대인 반란이 쉽게 진압되지 않자 당시 영국에 주둔하고 있던 명장 율리우스 세베루스(Julius Severus)에게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겼습니다. 세베루스 장군은 과거 ‘1차 유대인 반란’ 때 베스파시안 장군의 작전을 그대로 답습합니다.

그는 북부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차례로 저항하는 도시를 함락시키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남진했습니다. 명장이 지휘하는 로마군 앞에 유대인 ‘반란군’은 계속 밀렸고 로마군은 마침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합니다. 바르 코크바를 위시한 반란군은 예루살렘 남서쪽 11㎞ 지점에 있는 ‘베타르’(Betar)를 마지막 보루로 삼고 그 곳에 집결합니다. 그들은 경사가 가파른 베타르 정상 부분에 요새를 구축하고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주후 135년 아브달 9일 베타르 요새를 포위 공격하던 로마군은 성벽을 무너뜨리고 밀물처럼 성안으로 밀어닥쳤습니다. 이때 바르 코크바도 전사했고 끝까지 저항하던 유대인 ‘반란군’들은 모두 살육됐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베타르가 함락될 때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이 흘린 피가 작은 강을 이루어 지중해까지 흘렀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전해졌습니다.

이로써 ‘2차 유대인 반란’도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반란을 진압시킨 하드리안 황제는 다시는 그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일을 단행합니다. 

첫째,황폐해진 예루살렘을 완전히 로마식 도시로 재건하고 이름도 아이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둘째,로마식으로 재건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고 유대인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 시켰습니다. 

셋째,유대지역의 이름을 팔레스타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2차 유대인 반란의 실패는 유대인 역사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후로 장장 1800여년동안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다시는 정치적으로 독립하려는 시도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두 유대 지역에서 추방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나라 없는 세월을 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그러나 유대인들은 20세기 중엽 1948년에 와서 비로소 정치적 독립을 성취했습니다. 그들의 나라 즉 유대인의 나라를 지구상에서 다시 세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니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출처] 집사님 


BIBLE - WEB, KJV, ASV(Quiz), NIV,
개역한글KHRV( 120일1독, 1년1독, 권별, 성경통독 )

STUDY - 구절(WESLEY), 단락(MATTHEW), 읽기(Wayne),
Dictionary - Chapter, OT구약, NT신약, 테마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