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대 영양왕(영陽王)

[참고] 신라:진평왕 백제: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중국:수(隨), 당(唐)

서기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였다. 일명 평양제(平陽帝)이며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며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외모가 준수하고 일찍부터 백성을 잘 다스려 세상을 편안히 할 뜻을 품었다. 연호를 세워 홍무(弘武)라 하였다.

9년(서기 598년) 왕은 말갈 병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수나라의 요서(遼西) 지방을 침공하였으나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沖)이 기습하여 퇴군하였다. 수(隋)나라의 문제(文帝)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양(문제의 넷째아들)과 양세적(王世績)을 원수로 삼아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양은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로 진군하다가 장마를 만났다. 군량 수송이 힘들어 군사들이 굶게되고 또 질병에 걸려 쓰러지기도 하였다. 한편 수군총관 주라후는 바다로 해서 평양성을 향하다가 태풍을 만나 많은 병선이 침몰하였다. 9월이 되어 강이식에게 참패하고 수나라군대는 물러났는데 죽은 자가 열에 팔구 명이나 되었다.

14년(서기 603년) 왕이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 을 치니, 신라 왕 (진평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왔다. 고승은 적의 군세가 커서 이기지 못할까 염려되어 돌아왔다. 
 
19년(서기 608년) 2월, 장수를 시켜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고, 8천여 명을 사로 잡았다. 4월에는 신라의 우명산성(牛鳴山城)을 빼앗았다.

22년(서기 611년) 2월 수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치기로 하였다.

23년(서기 612년) 수(隋) 양제(煬帝)는 부왕 문제(文帝)의 원한을 풀고자 1백13만3천8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고구려 침공에 나서니 과장하여 2백만이라 하고, 군량 수송자의 수는 병사의 두 배가 넘었다.

2월에 수 양제가 요하 강변에 이르렀다. 고구려 군사는 강을 사이에 두고 굳게 지켜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하였다. 수 양제는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명하여 강을 건너는 부교를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부교의 길이가 짧아 강 건너에 닿지 않았다. 수 양제는 날쌘 병사를 뽑아 먼저 부교를 건너 강물로 뛰어들어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공격하니, 수나라 군사는 언덕을 오르기 전에 거의 죽게 되고, 수나라 장군 맥철장, 전사웅, 맹차 등도 전사하였다.

적은 할 수 없이 군사와 부교를 거두어 서쪽 언덕으로 물러 났다. 수군은 이틀 후 부교를 더 길게 만들고 강을 건너 다시 공격해 왔다. 고구려 군사는 크게 패하여 후퇴하였다. 수나라 군대는 계속 진격하여 요동성을 공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치열한 적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군은 성을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한편 수나라 수군 총관인 내호아는 서해의 패수 (대동강) 줄기를 따라 평양성 60리 지점에서 고구려 군을 만나 크게 이긴 후 계속 진격하려 하였다. 부총관인 주법상은 육군의 진격과 때를 맞추어 함께 공격하자고 했지만, 내호아는 듣지 않고 정예 병사 수만을 뽑아 평양성 아래에 이르렀다.

이 때 고구려 군은 바깥 성 안쪽에 군사를 숨겨 두고 적과 싸우는 척하다가 거짓으로 패하여 후퇴하였다. 내호아의 군사는 계속 진격하여 약탈을 하는 등 군사들이 질서를 지키지 않았다.

이 때 고구려의 복병이 적을 기습하니, 내호아는 크게 패하여 겨우 도망치고, 병사 중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다.

한편 요동 방면으로 진격해 오던 우문술, 우중문의 군대는 군사 한 사람마다 1백일 양식을 지급했었는데, 갑옷과 무기까지 지닌 몸이라 너무 무거워 짊어지고 갈 수가 없었다.

양식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벤다 하므로 군사들은 양식을 대부분 땅 속에 묻어 버렸다. 이들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의 영양왕은 을지문덕을 시켜 수나라 진영에 거짓 항복하여 적의 군세를 탐지하게 하였다.

수나라 대장군인 우중 문, 우문 술은 을지문덕을 돌려보낸 뒤 곧 후회하고 다시 사람을 시켜 불렀지만, 을지문덕은 그내로 압록강을 건너 돌아가고 말았다. 우문 술은 병사의 식량이 없음을 이유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우중문은 정예 병사로 뒤를 쫓으면 을지문덕을 잡을 수 있다 하며 우문 술을 크게 나무랐다.

우중 문, 우문 술은 곧 군대를 내어 압록강을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했다. 을지문덕은 적의 군사가 주린 빛이 있음을 보고 한 번 싸우고는 달아나고 한 번 싸우고는 달아나서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을 달아 났다. 이것은 굶주린 적을 더 피로하게 하려는 계략이었다.

적은 그것도 모른 채  승리감에 취해 마침내 살수(청천강)를 건너 평양성 30리 지점에 이르렀다. 
이 때 을지문덕은 다시 사람을 보내어 항복할 뜻을 알렸다. 우문 술 등은 병사들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더 싸울 수가 없고 또 평양성이 튼튼해서 쉽게 이길 수 없음을 알고 돌아가게 되었다. 적이 후퇴를 하게 되자 고구려군은 사방에서 기습공격을 폈다.

수나라 군대는 한편 싸우고 한편 후퇴하여 7월경 살수에 이르렀다. 수나라 군대의 반쯤이 강을 건너려 할 때 고구려군이 뒤에서 급하게 몰아쳤다. 수나라 군대는 하루 낮 사이에 압록강까지 4백5십리를 도망했다.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으로 진격했던 우문 술의 군대는 30만5천여 명이었다. 그런데 살수에서 고구려 왕자 건무(建武), 도원수(都元帥) 강이식(姜以式)과 막리지(莫離支) 을지문덕(乙支文德)의 활약으로 크게 패함으로써 요동성으로 돌아간 자는 겨우 2천7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수 양제는 크게 노하여 우문 술 등을 쇠사슬에 묶어 가지고 철수하였다.

24년(서기 613년) 정월, 수양제는 다시 중국 전역에 조서를 내려 군사를 모집 하고 군량을 비축하였다. 그리하여 4월에 다시 요수(療水)를 건너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고구려군은 성을 굳게 지키며 나가 싸우지 않았다.

수나라 군대는 요동성을 공격한 지 20여일 이나 지났지만 , 함락 시키지 못한 채 막대한 피해만 입었다. 수양제는 마침내 큰 가마니와 포대에 흙을 가득 채우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것을 쌓아서 성의 높이와 같아지자, 군사들이 그 위에 올라가서 성을 공격하게 되었다. 
이 때 수나라에서는 대신 양현감이 모반하였다는 소식이 왔다. 또한 양현감과 친했던 병부시랑 괵사정은 위험을 느껴 고구려로 투항하였다. 이 때문에 수 양제는 한밤중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군대를 철수 시켰다. 
 
25년(서기 614년) 다시 수(隋)의 침략이 있었지만 왕이 화친하여 돌아갔다. 
 
29년(서기 618년) 9월, 왕이 돌아가니 영양왕이라 하였다.
[nsgoguro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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