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한국의 야담 69
[정신없는 사람]
옛날에 아주 정신이 없는 사람이 살았대. 이 사람은 어찌나 잊어버리기를 잘
하는지, 제 성과 이름자도 곧잘 잊어버린단 말이야.
다른 것이면 몰라도 사람이 제 성을 잊어버린대서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나.
보다 못한 아내가 옷고름에다 배를 하나 매달아 주었어.
이 사람 성이 '배'씨거든. 언제든지 옷고름만 내려다보면 배가 매달려 있을
터이니 그걸 보고 제 성을 알아내라고 말이지.
하루는 사랑에 손님이 들어서 서로 수인사를 하게 됐지. 손님이 먼저,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김가라고 합니다."
하고 성을 대는데, 이 사람은 그새 성을 잊어버렸거든. 성을 알아내려고 저고리
옷고름을 내려다보니, 언제 떨어졌는지 배는 뚝 떨어지고 꼭지만 달랑 남아
있단 말이야.
'응, 꼭지가 달려 있으니 내 성은 꼭지렷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한다는 말이,
"예, 제 성은 꼭지가 올시다."
하더라나.
이 사람이 하루는 나들이를 가게 됐어. 옛날에는 남자들이 길을 떠날 때
담뱃대를 가지고 다니게 마련이지.
이 사람이 담뱃대를 들고 활갯짓을 하며 걸으니까 담뱃대가 앞으로 왔다 뒤로
갔다 할 게 아니야? 손이 뒤로 가서 담뱃대가 안 보이면,
"어, 내 담뱃대 어디 갔나?"
하고, 손이 앞으로 와서 담뱃대가 보이면,
"아, 여기 있구나."
하더래. 이렇게 손이 왔다갔다 할 때마다,
"어, 내 담뱃대 어디 갔나?"
"아, 여기 있구나."
"어, 내 담뱃대 어디 갔나?"
"아, 여기 있구나."
이러면서 길을 가더라나.
이렇게 가다 보니 덥기도 하고 다리도 아파서 쉴 곳을 찾는데, 마침 시원하고
맑은 개울물이 보이더란 말이야.
이 사람이 갓과 옷을 벗어 나무에 걸어 놓고, 신을 벗어 바위 위에 얹어 놓고,
개울물에 들어가서 목욕을 했겠다.
목욕을 잘 하고 나와 보니 나무에 제가 벗어 놓은 갓과 옷이 있거든.
"어라, 웬 정신없는 사람이 여기다 이런 걸 벗어 놓고 갔지? 이건 내가
입어야겠다."
옷을 입고 갓을 쓰고 나서 보니, 바위 위에 제가 벗어 놓은 신이 있거든.
"얼씨구, 신도 벗어 놓고 갔네? 이건 내가 신어야지."
이 사람이 횡재를 했다고 아주 좋아하면서 가더래.
그렇게 가다가 길에서 중 한 사람을 만났어. 서로 인사를 한다는 게 제 성도
모르니까 제 말은 않고,
"어디 사는 스님이오?"
하고 묻기만 했지.
"북산 너머 태고사에 사는 중이올시다."
중이 공손하게 대답을 해줬어.
"응, 북산 너머 태고사에 사는 스님이라."
정신없는 사람이 이렇게 중얼거려 보지만 몇 걸음도 못 가서 잊어버리거든.
어디 사는 중인지 잊어버리는 건 고사하고, 제가 물었던 것까지 깡그리
잊어버린단 말이야. 그러니,
"어디 사는 스님이오?"
하고 또 묻지.
"북산 너머 태고사에 사는 중이올시다."
중이 이번에도 대답을 해주지만, 얼마 못 가서 또 잊어버리고 물어. 그러니
하루 내내,
"어디 사는 스님이오?"
"북산 너머 태고사에 사는 중이올시다."
하면서 가는 거지. 중이 똑같은 대답을 자꾸만 해주다 보니 은근히 부아가 나서
언젠가 한 번 곯려 주리라 마음먹었어.
그렇게 가다 보니 마침 날이 저물어서 함께 주막에 들게 됐지. 하룻밤 잘 자고
중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 사람이 아직 정신없이 자고 있거든.
중은 이 사람 머리를 박박 깎고 자기가 입고 있던 장삼을 벗어 입히고 손에는
목탁을 들려 놓고 가버렸어.
이 사람이 일어나서 사방을 휘휘 들러보더니,
"어, 중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 갔나? 중을 혼자 남겨 두고 내가 도망가
버렸군."
하더라나. 하하하.
-출처미상
2001/03/20(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