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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합(Rahab) 뜻:넓다 여리고에 있는 가나안인 기생 1) 여호수아가 파견한 정탐군을 숨겨 주어 화를 면하게 함(수02:1). 2) 여리고가 함락할 때 그의 일가는 구조되었다(수06:17). 3) 칭찬할만한 신앙의 용사로 인정되었다(히11:31), (약02:25). 4) 예수의 선조의 한 사람(마01:5). ▶ 라합 Rahab. [Ra'hab] A poetical name, signifying 'insolence,' given to Egypt. Ps. 87:4; Ps. 89:10; Isa. 51:9. The same word occurs in Isa. 30:7, where the R.V. reads "therefore have I called her Rahab that sitteth still." (시087:4; 내가 라합과 바벨론을 나를 아는 자 중에 있다 말하리라 보라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여 이도 거기서 났다 하리로다 (시089:10; 주께서 라합을 살륙 당한 자 같이 파쇄하시고 주의 원수를 주의 능력의 팔로 흩으셨나이다 (사51:9.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사30:7 애굽의 도움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 --- Morrish Bible Dictionary ▶ Rahab, [Ra'hab] Rachab. [Ra'chab] The harlot who secreted the spies that Joshua sent into the land. She had heard of the wonders of God in delivering Israel out of Egypt, and she was aware of the fear that had fallen on the inhabitants. In faith she risked her life in hiding the spies. Her stratagem was successful, and she made an agreement with the spies, that if she did not betray them, her life and the life of her family should be saved when the city was taken. This was only to be binding on them if she brought all into her house, under the token of the scarlet line, hung out at the window from which the spies were let down, the house being built upon the wall. Joshua was careful that the compact should be respected, and she and her relatives were saved. Joshua 2:1-22; Joshua 6:17-25. (수02:1-22 여리고 정탐 (수06:17-25 라합의 구원 Rahab was a traitor to her country, and lied to the king; but it was to throw herself under the protection of the God of Israel. Her falsehood is not commended; her faith is, Heb. 11:31; and her works justified her (before men). James 2:25. That the RACHAB of Matt. 1:5 is the same as Rahab is evidenced by the article; it was the Rachab mentioned in the O.T. (the Greek language having no letter H, a CH [Χ] is substituted). That such women as Rahab and Thamar should be mentioned in the genealogy of the Lord Jesus shows the divine origin of the list, for man would probably have omitted these names. Their insertion exalts the grace that superabounds over all sin. (히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약0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마0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 Morrish Bible Dictionary -------------------------------------------------------------------------------- ▶ 라합/가나안의 기녀… 하나님나라 위해 국적도 포기 라합은 「넓다」는 뜻입니다. 여리고성에 사는 가나안사람으로 기생이었습니다. 라합은 지혜있는 여자였습니다. 통찰력과 판단력이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기생이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종교에 관심이 깊었으며 신앙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필요하다면 국적이나 재래종교를 포기할지라도 새출발을 시도할 만큼 용기가 있고 결단성이 있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싯딤에 도착하여 두 정탐꾼을 여리고로 파송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집 옥상에 정탐꾼을 숨겨두었다가 살려보내는 담대한 일을 진행했습니다. 라합이 정탐꾼과 나눈 대화를 보면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셨고 홍해를 갈랐으며 시혼과 옥을 멸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상천하지에 여호와시라고 증거하였습니다(수02:9∼12). 이는 놀라운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생명을 구해주었으니 너희도 우리 가족을 구해달라는 언약을 받고 그 언약의 표로 붉은 밧줄을 증거물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여리고성이 점령될 때 라합의 가족과 친족이 구원받았습니다(수06:22∼25). 라합은 뒤에 유다지파에 속한 룻의 시아버지인 시온의 아내가 되고 보아스의 어머니가 되어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마01:5). 또한 라합은 신앙의 위인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훈과 적용◁ 첫째,라합은 국적을 포기할 만큼 선택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둘째,훌륭한 종교심이나 하나님 신앙은 직업이나 신분 때문에 장애되지 않습니다.신앙은 현실적인 억압보다 몇 갑절 강합니다.<이병돈목사·은평교회> -------------------------------------------------------------------------------- 라합…타락의 땅에 핀 ‘믿음의 불꽃’ 여리고성은 가나안 땅을 대표하는 큰 도성 중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그에 어울릴 만큼 문화적인 혜택이나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고 발달한 지역일수록 타락하고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이 역사의 실례이다. 이러한 도시의 기생이었다면 그의 사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라합은 자기 신분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판단력이 예민했고 신앙심도 강했다. 더욱이 하나님 신앙이 그의 마음속에 지배적이었던 사실을 보면 놀랍기까지 하다. 이런 과정을 살펴보면 그는 타락생활이나 단순한 방종으로 기생이 된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기생의 길에 들어선 것 같다. 라합의 마음속에는 어느 땐가는 이 길을 정리하고 새 출발을 갖고자 하는 의욕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사람은 생활보다 그의 의식이 일생을 지배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을 판단할 때 현재의 생업이나 그 개인의 현실을 통해 평가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 일생을 통해 여러 종류의 생업을 거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인생의 짧은 단면이 결코 그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의 현실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라합은 정탐꾼들과 약속할 때 자기 가족의 구원을 담보로 받아냈다. 이로 미루어봐서도 자기 가족의 형편이 열악하여 생계를 위해 기생이 됐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그의 훌륭한 뜻을 헤아려볼 수 있다. 여호수아 2장 9∼12절에 보면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고 하였다. 이 본문 속에서 기생 라합의 훌륭한 신앙고백을 보게 된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것을 안다고 하였고 여호와는 홍해를 마르게 하시는 분이요,견고한 시혼과 옥과 같은 나라도 전멸시키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또한 이 소식을 듣고 간담과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소개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상천하지에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다. 이 내용을 보면 라합은 오랜 세월 신앙생활한 사람과 다름없는 분명한 하나님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나 영적 축복은 지역이나 혈통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허락되는 것을 기억하자. 라합은 전도를 받은 것도 아니고 복음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성경공부나 영성훈련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과 광야생활,요르단강 동쪽의 전쟁을 보고 마음속에 뿌리내린 신앙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에 허락되는 은혜는 이렇게 개별적이라는 사실을 주목하자. 전도를 받고 복음을 들으며 하나님을 영접하는 고백을 거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양육자를 통해서 신앙지도까지 받는다면 아주 이상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인 과정을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야 되는 것은 아니다. 라합과 같이 전도자를 통해 복음을 들은 적이 없고 양육을 받은 적이 없어도 깨달음과 개인적인 신앙심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성경을 보면 에녹이 그랬고 노아도 그랬으며 아브라함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다. 하나님은 혈통이나 신분이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오는 자를 영접하시고 자녀로 삼으신다. 또 그에게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은혜의 세계를 허락하신다. 이와 같이 개인적인 신앙만 있으면 하나님과의 교제는 편벽이 없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넓혀가자. 이것을 개인적인 영성 계발이라고 표현한다. 자생능력이 잘 갖추어진 영적인 사람이 되자. 하나님과의 교제나 하나님 체험이나 하나님과 연합하는 깊이까지 더 갖추어나가야 하겠다. 이런 영적 성장은 아무도 범할 수 없는 개인적인 영역이다. 이러한 축복을 경험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자. 전도는 할수록 좋고 꼭 필요한 사역이며 하나님이 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고전 1:21). 또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성경공부나 양육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이 기생 라합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고 있는 그 개인의 신앙과 종교심 그리고 영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집 옥상에 정탐꾼을 숨기는 일을 대담하게 실천할 수 있었다. 또 국적이나 종족종교나 전통까지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그의 결단은 대단했다.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숨긴 사실이 그의 훌륭한 모습이다. 이것은 그의 현실과 상황을 앞지르는 의지적인 선택이었다. 개인과 가족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순간이었다. 자기 일생이나 현실까지도 포기해야만 하는 결정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많은 것이 아니라 몇 차례뿐이라는 것이다. 그 현장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뀌고 인생이 달라진다.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고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고 통곡하며 후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선택의 착오가 이렇게 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바른 선택의 방법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아주 쉽고 단순하다. 언제나 믿음을 앞세우자. 또한 하나님편에 서야 한다. 더 나아가서 영감에 순종하자.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주신다. 라합은 두 정탐꾼에게 진실한 표를 받아냈다. 그것은 바로 붉은 밧줄이었다(수2:18). 붉은 밧줄을 창에 매고 그 집에 가족이 함께 있는 조건으로 맹세를 받아낸 것이다. 라합은 정신도 훌륭했고 믿음도 강했고 일 처리도 다부진 여자였다. 우리에게 항상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일에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확하게 하고 분명히 하자. 모든 일은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마무리를 잘못해 전체를 그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 개인의 삶도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마무리를 잘못해서 평생 오점을 남기는 사람도 많다. 자기 종말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라합과 같이 마무리를 잘하는 사람이 되자. ◇ 라합을 통해 얻는 교훈 라합이 가지고 있던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라합의 사생활이나 라합의 과거는 그의 신앙으로 다 묻혀졌다. 하나님은 현재의 신앙을 보시지 과거의 사생활을 기억하지 않으신다. 결국 라합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보아스의 어머니가 되어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마1:5). 라합과 같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의 사람이 되자. 라합의 집 창문에 매달린 붉은 밧줄은 그 가족들의 생명을 구해낸 징표가 되었다. 이 붉은 밧줄은 약속에 대한 증거물이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라합과 그 가족의 목숨이 걸려있는 그리고 라합의 공로를 기억하게 하는 밧줄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우리의 일생을 통해 우리의 수고나 우리의 공로가 담겨있는, 하나님께 내 놓을만한 붉은 밧줄이 있어야 하겠다. 이병돈(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 라합… 들은대로 믿은 가나안 기생 애굽을 나온 지 40년째 되던 해,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팽팽한 전운이 감돌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랜 광야의 유랑 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러 요단강 건너편에 진을 쳤기 때문이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주변 모든 민족들의 두려운 화제거리였다. 당시 세계 최강의 애굽 군대를 굴복시킨 일,홍해를 건넌 불가사의한 일,요단강 동편의 강력한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정복한 일…. 이스라엘의 최종 정복 대상인 가나안 백성들은 그러한 소식에 온몸의 맥이 풀렸다.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그토록 위대하단 말인가!” 특히 가나안 땅의 첫 관문인 여리고 성은 두려움으로 초긴장 상태에 있었다. 바로 그 도시에서 기생이라는 비천한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던 한 여인 라합이 있었다. 그 여인의 운명은 불보듯 뻔한 것,곧 멸망뿐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그 여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경외심이 불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라합은 이스라엘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천지간에 유일하고 참된 신인 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믿은 대로 행동한 신앙 라합이 하나님을 경외했듯이 하나님도 그러한 라합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리고 성에 잠입한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은 라합의 집에 묵게 되지만 그 사실이 발각되어 여리고 군들사의 검색을 받게 된다. 이때 라합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조국이냐,여호와냐,자기 목숨이냐,이스라엘 정탐군이냐” 이때 라합은 믿음에 따라 행동했다. 여호와 신앙으로 두 정탐꾼을 숨겨주고 여리고 군사를 따돌렸다. 후일 히브리서 기자는 라합의 이 믿음이 그녀를 멸망 중에서 건져내었다고 기록했다(히브리서 11:31). 그 신앙에 따른 축복 하나님은 목숨을 걸고 믿음에 따라 행동한 라합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셨다. 여리고 성이 멸망당할 때 라합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지들을 모두 살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여 유다 지파의 살몬과 결혼하도록 섭리하셨다. 그런데 보라! 라합은 살몬을 통해 룻의 남편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오벳을,오벳은 이새를,이새는 다윗을 낳았다. 말하자면 라합은 다윗의 고조 할머니가 된 것이다(마태복음 1:5∼6). 그리고 그것은 메시아 예수의 가계를 이룬 것을 의미한다. 멸망당할 도시 여리고 성,그 중에서도 비천한 일개 기생에 불과했던 라합이 이토록 큰 축복을 받은 비결은 무엇인가? 모든 세대여,귀기울여 들으라! 그것은 바로 ‘믿음’,곧 믿은 대로 실천한 ‘살아 있는 믿음’이었다. 32.온 세상의 하나님 (여리고 성의 기생-라합 ) 출애굽 40년,/마침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던 해/그 땅의 첫 관문 여리고 성/그 멸망당할 죄악의 도시에서/비천한 기생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던 한 여인/과연 이 여인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가? 정녕 있었네/그녀가 고이 간직한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놓았네/멸망 속에서 구원을 건져 올렸네/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크신 능력을 전해 듣고/온 여리고 백성이 정신을 잃고 마음이 녹았을 때/이 여인만은 믿음으로 믿었네/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온 세상에 유일하신 하나님임을/그녀의 이름은 라합이라 그녀는/여호수아가 파견한 두 사람의 정탐꾼을 숨겨 주었네/그것은 조국애를 초월한 숭고한 믿음/자신의 목숨을 내건 희생의 믿음 그녀는/정탐꾼의 말에 따라 붉은 밧줄을 창문에 매달았네/그것은 자신과 온 가족을 건진 생명의 믿음/죄악과 죽음을 깨뜨리는 보혈의 믿음 보라,믿음의 축복을!/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그 믿음대로 행동한 여인을/이제 그녀는 더 이상 멸망당할 도시의 비천한 기생이 아니네/하나님의 백성/장차 메시아의 가계를 이을 사람이네 복되도다,라합이여/여리고 성의 숨은 보배여/이스라엘의 수호 천사여 김영진<성서원 대표>
9 아합(Ahab)
인물
jesus
7972 70 2006-12-27
▶ 아합(Ahab) 뜻:부친의 형제 [1] 사마리아의 수도로 하는 이스라엘왕 오므리의 아들(B.C.869-850). 부친을 이어 왕이 되었다. 유다왕 여호사밧과 동시대이며 왕의 딸 이세벨과 결혼, 그녀의 바알종교를 주력 지원했다. 엘리야가 아합의 배교를 꾸짖고 전국에 가믐이 들리라고 예언했다(왕상17:1). [2]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예언자 바벨론에서 백성을 속였다(렘29:28). ======== Ahab. [A'hab] 1. Son and successor of Omri, king of Israel. He married Jezebel, daughter of Ethbaal king of the Zidonians, and under her influence became an idolater, and led Israel into the worship of Baal. Of him it is said, there was none like him in very abominably following idols. It was chiefly in his reign that Elijah the Tishbite laboured, and he testified for Jehovah against the apostasy and corruption of the king. The trial of fire from heaven is an especial instance of this, which was followed by the death of 450 of the prophets of Baal, 1 Kings 18:19-40, but there was no repentance in the king. Ahab made two attacks on Benhadad king of Syria and was helped by God so that he obtained the victory; on the second occasion instead of destroying Benhadad (whom the Lord had doomed to destruction) he made a treaty with him. Ahab coveted the vineyard of Naboth, but on his refusal to part with the inheritance given by God to his fathers, Jezebel caused his death and bade Ahab take possession of the vineyard. Elijah met him there and declared that dogs should lick his blood where they had licked the blood of Naboth. The dogs should also eat Jezebel, and Ahab's house should be cut off. Ahab humbled himself before God, and the full end of his house was delayed till his son's days. After this Ahab made another attack upon Syria, and his 400 prophets foretold that he would be successful; and he, though warned of his danger by the prophet Micaiah, went into battle accompanied by Jehoshaphat king of Judah, his ally. He disguised himself, but an arrow, shot at a venture, smote him between the joints of his armour, and he was wounded to death, and the prediction of Elijah came literally to pass. 1 Kings 21, 22. Grace had lingered over this poor idolater, for he was an Israelite; but he died impenitent, and his whole house was soon to perish. 2 Kings 9:7-10. The judgement of God fell on the apostate king who had seized the inheritance of God's people. 2. A false prophet among the captives of Babylon who prophesied a lie, and was roasted in the fire by Nebuchadnezzar. Jer. 29:21, 22. --- Morrish Bible Dictionary ---------------------------------------------------------------- 이스라엘 7대왕-- 우상숭배강요 등 악정 거듭 [유다왕 아사 제 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년을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왕상16:29) 아합은 이스라엘 제7대 왕으로 북이스라엘 왕조 가운데 가장 악명을 떨친 인물이다. 그는 먼저 북방의 거인이었던 베니게와 국교를 맺고 국내의 안정을 이룩하기 위해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왕후로 삼았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엣바알은 바알과 아스다롯의 제사장을 겸임한자로 그의 딸 이세벨을 통해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보급시킴으로 야훼 신앙을 말살하려는 계략을 품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세벨은 시집올 때 바알신상과 아세라목상을 가지고 와서 아합으로 하여금 경배케 했으며 신하와 온 국민들에게까지 신봉을 강요했다.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 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였더라](왕상16 :31-33) 하나님께선 바알 숭배의 대가로 3년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셨다가 갈멜산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응답의 계시로 비를 주셨다(왕상18:1-46). 독부 이세벨의 계교에 따라 선량한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하고 그를 죽인 사건은 아합의 씻을 수 없는 악행이었으며, 이러한 복합적 죄값으로 인해 그는 아람과의 전쟁에서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죽고 말았다(왕상 22:1-39). 욕구충족을 위한 권력남용과 이방신 숭배및 불신앙적 책략이 그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고 할 수 있다. -------------------------------------------------------------------------------- 우상숭배 아내 이세벨에 휘둘려 아합은 『백부』나 『숙부』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제7대 왕이었으며 오므리의 아들이었다. 아합왕은 그 자신의 행적이나 정치적인 능력으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그의 아내 이세벨로 인해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왕의 자질이 없는 것도 아니며 인격적인 결함이 있는 것도 아닌 무난하면서도 재치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큰 약점이 있다면 아내 이세벨에 의해 좌우되는 통치자였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여 이방종교에 지배되었고 우상숭배의 노예가 되어 이방신을 섬기는 전성기를 이룬 영적으로 아주 타락한 왕이었다. 북조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타락이 지속되어 오다가 아합왕때에 와서는 바알과 아세라 신을 집중적으로 숭배 하고 하나의 국교가 될만큼 타락했다. 아합왕때에 이스라엘의 범죄로 3년 이상의 기근이 있었으며 이때에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명이 갈멜산에서 참신을 밝히기 위한 대결은 유명한 사건이었다. 이로인해 이방선지자들이 전멸 되었다. 또 칠천명의 군사로 아람군을 격파하고 대적 벤하닷을 구해주고 평 화조약을 맺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 심판이 예고되었다. 그리고 위증으로 억울하게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했으며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거역하고 위장하여 전쟁에 나갔으나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교훈과 적용 첫째,사람을 잘못 만나 불행해진 사람의 대표적인 실례이다. 사람과의 교제를 선별하자. 둘째,가정을 잘못 다스림으로 나라까지 불행하게 만든 사건이다. 가정을 잘 다스릴 때 나라의 선정도 가능하다. -------------------------------------------------------------------------------- 요부 이세벨과 아합왕의 가정과 생활 본문 : 왕상21:1-29 요절 : (왕상21:25) 1.이웃의 포도원을 탈취한 이세벨 부부 1) 아합은 왕궁 가까이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고 있었다. (1) 포도원을 다른 포도원과 바꾸거나 팔라고 한 아합의 제안을 나봇이 거절한 이유는 무엇인가?(왕상 21:3) (2) 거절당한 아합이 궁에 돌아와서 취한 태도는 어떠했나?(왕상21:4) 2) 요부 이세벨은 계략을 꾸며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다. (1) 이세벨의 간교한 계략은 남편의 탐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결국 무슨 음모를 꾸몄나?(왕상21:8-11) (2) 나봇을 죽이기 위한 이세벨의 거짓 죄목은 무엇인가?(왕상21:13) * 탐심은 별로 큰 죄가 아닌 것 같지만 사람의 분별력을 흐리게 하고 살인을 불러오기까지 한다(시39:6,출23:8) 2.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아합과 이세벨 1) 나봇의 억울한 죽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아합의 가정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셨다. (1) 아합의 가정은 각각 어떤 종말을 맞이하게 되리라고 하셨나?(왕상 21:21-24) (2) 아합의 가정이 멸망하게 된 원인들은 무엇인가?(왕상21:25) 2) 아합과 이세벨은 비참한 종말을 맞이한다. (1) 죽지 않으려고 병사의 복장으로 변장한 아합은 어떻게 죽었나?(왕하09:30-37). (2) 이세벨의 비참한 죽음을 보고 느끼는 점은 무엇인가?(왕하9:30-37) * 남편의 왕권을 믿고 의기양양하였던 이세벨은 그 자신 뿐 아니라 남편과 함께 그 가정도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약01:15). (한국컴퓨터선교회)
8 안드레(Andrew)
인물
jesus
5261 57 2006-12-27
▶ 안드레(Andrew) 뜻 : 남성적 요한의 아들이요 베드로의 형제이다. 갈릴리 해변 뱃새다의 어부로서 세례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가 선생으로부터 예수의 일을 듣고 예수를 따랐다(요01:40-42). 12제자 중에 참예하여 일생을 봉사하였다(마10:2) 예수님이 죽은신 후에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 열두 사도의 하나이며 시몬 베드로의 동생. 벳사이다 출신의 어부이며 예수를 처음 만나 몇 시간 동안 함께 지냈을때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 이튿날 형 시몬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를 찾았을 때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 아니냐? 앞으로는 너를 게파라 부르겠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이들 형제는 갈릴리아호수에서 예수님의 부르심 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형제이며,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다. 에데사에에서 붙들려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는데, 땅에서 십자가의 두 끝을 수직으로 못박혀 죽었다. -------------------------------------------------------------------------------- * 출생 // 예수님의 고향으로 유명한 Nazaret에서 동쪽으로 40Km(약 100리)정도 떨어져 있는 Beth -Saida는 아주 아름다운 동네이다. 어부인 아버지 요나와 어머니 요안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 // '남자다운' '용감한'이란 뜻을 가졌다. *베드로와의 비교// -----------------------------------+-------------------------------------- --- 베 드 로 ----------------- | --------- 안 드 레 ----------------- -----------------------------------+-------------------------------------- *큰 어부 -------------------------- |*작은 어부 *대중적 복음전파 ------------------ |*개인적인 복음전파 *폭죽같이 큰 소리를 지르다가 금새 김 |*지조있는 재구꾼이며 조용한 마음을 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가라 앉는다. ---- | 유란 사람이다. *성격이 매우 급하나 ---------------- |*신중하고 차분함. 심중하고 견실하며 ---------------------------------- | 온건한 믿음을 지녔다. -----------------------------------+-------------------------------------- 그러나 자기 형의 그늘에 늘 가리워 있었으나 자신의 허물을 시인하고 뒷전에서 힘써 일하였다. 본론 주님의 부르심(요1:38-39) 안드레는 처음엔 세례요한을 존경하며 그의 제자가 되었었다. 그러나 세레요한을 존경하며 그의 제자가 되었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세례받으러 오신 에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 Messiah]라고 하자, 가장 먼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날 주님과 대화를 한 후, 그리스도로 확신하고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된, 주님의 선택을 받은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 뒤를 이어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이 믿게 된다. 고기잡이로 돌아가긴 하였으나 몇달 후, 주님께서 '고기잡이를 그만 두고 나를 쫓으라.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하시며 제자직분만 행하라는 부르심을 응답한다. (요 1:40-42) 전달자 안드레 안드레는 베드로 같이 훌륭한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하나씩 차근차근 잘 낚는 어부가 되었다. 그는 사람을 주님께로 소개하는 일을 잘해서 '전달자' '소개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1.자신이 깨닭은 진리= 예수님이 Messiah라는 것=를 형 Simon과 빌립에게 전달 시몬은 침착하고 믿을 만한하고 견고한 행동을 하는 동생 안드레를 은근히 존경하고 있었다. 그가 밝고도 홧니에 찬 어조로 '메시야를 만났다. 와서 보라"고 소리쳤다. 이 확신에 찬 소리는 요한까지 주님꼐로 데리고 오는 역사를 이룬다. 물론 가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를 가지기 까지는 많은 기도와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분은 가족을 전도하기가 헌금 100만원을 내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다. (예화) 어느 사업가가 레스토랑을 지나가다가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갖다데고 열심히 들여다 보고있는 거지 소년을 보았다. "애, 배가 고프니?" 소년은 수줍은 듯이 대답했다. 그는 소년을 식당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음식을 넉넉하게 주문하여주었다. 그러자 그 소년은 계속해서 창 밖만 바라볼 뿐 맛있는 움식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의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왜 않먹니? 배고프다고 해잖아?" 뜻 박에도 소년은 "창 밖에 들여다 보는 아이가 내 동생이예요"라고 했다. 신사는 창 밖의 소년도 데리고 왔다. 두 소년은 풍성한 음식를 먼었다. 아직도 믿음의 밖에있는 가족들을 이와같이 복음의 축제에 초대될 필요가 있다. (요08-9)오병이어의 기적때 보여준 사랑과 믿음 a. 갈릴리 해변 그의 고향옆 벱세다 광야에는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다가 3일동안 굶주린 민중들이 있었다. 안드레는 이들의 먹을 것을 염려하여 예수께서 건의하는 사랑의 소유자이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줄 아는 고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b. 뿐만 아니라, 보잘것 없는 것이지만 예수께 갖고 가기만 하면 분명히 문제가 해결 되라고 믿은, 좋은 믿음의 소유자 이다. 그래서 겨우 떡5개와 물고기 2마리 밖에 없는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믿음을 보았다. (요12:20-22)Halla 인을 주님꼐로 인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헬라인이 예수를 만나고 싶어서 찾아 왔다. 그는 예수께 소개해 주는 폭넓은 사람이었다. 유대인만이 위대하다는 당시인들 처럼 편협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 Andrew는 에수가 세상을 구할 구주이시요, 예수의 복음이 온 인류를 위한 것이요, 기독교는 세계적 종교임을 알았다.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달았을때 그 진리를 열렬히 받아 들였고, 다른 사람들도 이 진리를 알게 되길 원했다. 그래서 죽기까지 열심히 전도하고, 복음 전파 하는데서 기쁨을 찾고 살았다. 둘째자리에 만족하는 안드레 +--- 마가,행전// 4번째 자리-+ +--- 마태,누가// 2번째 자리-+ 그는 중요한 사건에서 제외되었다. (주님의 산상변화. 주님의 고뇌의 기도현장,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Pater가 큰 인물이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임을 알자. 그는 자기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그를 주님께 인도해서 지도자가 되게 했다. 자신은 3대제자 축에 못들고, 뒤로 물러섰다. 자기가 인도한 형 Peter 와 동료 John과 James 형제가 주요 제자가 되고 자기는 소외 되었어도 섭섭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불평없이 뒤로 물러나 둘째자리에 앉는 겸손을 보였고, 단지 주님을 섬김으로 만족하고 충성되고 성실히 사는 사람 이었다. 높은 지위의 열망은 있으나 뒷전에서 조용하게 주님께서 생각해 주시는 것만 감사하면서 만족하고 뒷전에 처진 것을 괴로워 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한 사람씩 주님을 믿는 승리자가 되도록 인도하였다. 교회에서는 베드로 같은 몇 명의 용감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더 필요한 사람은 눈에 뜨이지 않는 뒷전에서 일을 하는, 깊은 신앙을 가진 많은 안드레가 요구된다. 참으로 능력 없으면서도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하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것을 던져주는 [사나이다운] 제자 였다. 그후 안드레의 삶 *유대의 역사가인 Eusebius의 책 [History ] 1)Ephesus 지방에서 열심히 전도하였다. 2)그런데 가롯유다 대신 제자로 뽑힌 맛디아가 식인종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를 구하려고 기적적인 항해를 하여 흑해연안 코가스 산맥이 있는 스구디아(南Russia)에 도착한다. 기적으로 맏디아를 구출하고, 식인종도 거의다 교회 시킨다. 그래서 스구디아와 비잔티움(터기의 수도 이스탄불)에 교회까지 세운다. 3)그후에 그의 전도 공헌은 위경인 '안드레 행전'에 의해 알게 된다. Greece에 와서(드레이스, 마케도니야, 고린도, 파트라스)에서 열심히 전도한다. 그런데 그지역 총독인 '애기아테스의 부인'까지 전도하여 에수를 믿게 한다. 그러자 총독은 그 분풀이 Andrew에게 에수를 피투 성이가 된 Ancrew를 고분하고, 끝내 X형의 십자가에 밧줄로 묶여서 일동안 둔다. 고통속에서 Andrew는 A.D69년 11월말에 이렇게 기도하며, 하늘 나라로 갔다. "그리스도이신 에수님! 내가 뵈었고, 내가 사랑하고, 그안에 있는 나를 받으소서. 당신의 영원한 나라에 내 영혼을 받으소서 아멘" 그래서 Catholic에서는 오늘날에도 X를 [St. Adrew ]라고 부르며, 11월 중에 하루를 {안드레의 날}로 지키며, 열심히 전도한다. 전도 방법에 있어서도 안드레 처럼 가장 친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을 {안드레식} 전도라고 불리어 진다. 이렇게 순교한 안드레는 336년 - 콘스탄틴대제가 비잔티움에 세운 [거룩한 사도들의 성전]에, 그의 아들 콘스탄티어스가 365년 [디모데, 누가,안드레]의 유해를 모셨다.(성물 권위자 마시다켄의 증언) 결 론 안드레의 일생은 자기를 바로 볼 줄 알았고,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천거하는 미력을 보이며 살았다. 예수의 능력을 조금도 의심없이 믿는 큰 믿음과 사랑의 소유자로 살았다. 그리고 남을 인도하기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그는 폭넓으면서도 정열적이었고, 사랑과 믿음이 철철 넘쳐 흐르게 살다간 위대한 제자이다. *예수의 제자된 여러분! 자기를 바로 봅시다.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는 더 좋은 사람을 천거 합시다. 나보다 늦게 믿은 친구일 지라도 좋은 신앙가지면 칭찬하고 인정해 주자. 이렇게 사는자가 주님을 기쁘게 하느자요,에수의 제자입니다. 변치 않는 굳센 믿음과 어려운 사람과 함께 괴로워 할줄아는 사람이 됩시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과 동행하며, 에수님과 함께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전하된 정열적으로 전하며, 그 기쁨속에 사는 자가 되자, 우리가 체험하고, 깨닫는 진리를 꼭 전하는 사람이 되자. 이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예수의 제자요, 작은 안드레인 것이다. <* 홍만조목사 글> (교훈과 적용) ======== Andrew. [An'drew] Native of Bethsaida, brother of Simon Peter, and a fisherman: he became one of the twelve apostles. He had been a disciple of John, but hearing him say "Behold the Lamb of God!" he followed Jesus. He, at once found his brother Simon and told him that he had found the Messiah. There is little recorded of Andrew; he was one of the four who asked the Lord privately when the destruction of the temple should take place, and what would be the sign when the things spoken of should be fulfilled. After revealing that various judgements were coming the Lord added "But of that day and that hour knoweth no man, no, not the angels which are in heaven, neither the Son, but the Father." Mark 13:3, 4, 32. The Lord, as the Servant-Prophet (which is the character given by the Spirit in Mark) did not know the day. Tradition says that Andrew laboured in Scythia, Greece, and Asia Minor, and that he was crucified at Patrae in Achaia, on a cross of this form, X, which cross has since borne his name. Matt. 4:18; Luke 6:14; John 1:40, 44; Acts 1:13, etc. (막13: (마04: (눅06: (요01: (행01: --- Morrish Bible Dictionary
7 사탄, 마귀, 귀신
인물
jesus
10447 55 2006-12-29
복음서에 나타난 귀신들림과 축사(逐邪) 김지철(장신대:신약학 교수) - (막05,1-20 거라사 귀신들린 자의 치유: (마08,28-34; (눅08,26-39)을 중심으로 - 복음서기자들은 인간에게 귀신이 들리게 하는 힘, 또는 인격으로서 귀신의 존재를 보도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귀신을 축출하는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사역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강조한다. 곧 귀신축출 사건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기적사건들 가운데 결정적인 사건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예수에게서 귀신축출 사건은 병치유와 더불어 예수의 치유 기적사건 가운데 한가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로 양자는 종종 서로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별개의 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귀신축출이란 성경에서 보면 사탄의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예수의 몸을 통해 드러났다고 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시는 구체적인 모습이 예수의 행위를 통해 드러남을 비유적으로 나타내 주는 징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마가복음에 나타난 한 이야기(거라사 귀신들린 자: 막 5,1-20)를 통해서 예수의 귀신축출 사건을 살펴보려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축사자로서의 예수의 모습과 귀신들린 자, 그리고 귀신들과의 관계성을 검토해 보려 하는 것이다. 먼저 용어풀이와 복음서 전체에 나타난 흐름을 살펴보고 우리의 본문을 중심으로 석의적 분석을 기초로 하여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에 관련된 몇가지 신학적/목회적인 결론을 맺고자 한다. I. 관련 용어 이해: 사탄(마귀)과 귀신들 Satan 1. 마귀/사탄 히브리어어의 사탄(욥1,6-8.12.2,1-7; (슥3,1.2 등)은 LXX 역에서 마귀로 번역된다. 신약에서 보면 사탄은 36 번, 마귀는 34 번 등장하고 있다. 두 어휘 모두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 사도행전 계시록등에 나타난다. 많은 경위 이 두 어휘는 서로 동의어로 혼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수의 광야 시험 장면인 (막 1,13)에서는 사탄으로 나타나나, 그 병행구인 (마 4,1) (눅 4,2)에서는 마귀로 언급되고 있다. 계시록에서는 둘 다 혼용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실제로 용어사용에 있어서 마귀와 사탄은 의미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마 4,1 병행; (눅 4,2; 참조 (막 1,13; (요 13,2.27; (눅 22,3). 마귀(눅 8,12)/사탄(막 4,5)은 우선 '악한 자'로 이해된다(마 5,37, 13,19.38; (요 17,15(참조 (엡 6,11.16; (살후 3,3; (요1 2,13-14; 3,8.12; 5,18-19). 그리고 유혹자(마 4,3), 원수(마 13,39; (눅 10,19),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 이 세상의 통치자(요 12,31; 14,30; 16,11), 벨리알(고후 6,15), 바알세불(막 3,22 병행)로 불리우기도 한다. 사탄이 하는 일은 주로 사람들을 고소하고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유혹자로 등장한다(대하 21,1; (욥 1,6-2,7; (시 108,6(LXX); (슥 3,1-2; (마 4,3; (눅 22,31: 사단이 밀까브르듯 한다; (막 4,15; 8,33: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이에서 더 나아가 예수의 적대자(마 4,1-11; 병행 (눅 4,1-13), 그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마 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 귀신들의 우두머리로(마 9,34; 12, 24.26; 25,41: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가는 마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나, 요한의 경우는 6,70; 8,44; 13,2에서 마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마귀와 사탄이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용어로 나타나고 있다( 참조 (마 4,1.5.8.11과 4,10; (막 4,15; (눅 8,12; 13,16). 2. 귀신들 마귀/사탄과는 달리 귀신은 자주 복수형태로 등장한다. 신약의 경우 63번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 53번이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다. 곧 마태복음(11 번), 마가복음(13 번), 누가복음(23 번), 요한복음(6 번)에 나타난다. 귀신들은 종종 '더러운 영들'(막 1,23.26.27; 3,11), 또는 '악한 영들'(눅 7,21), '벙어리 영'(막 9,17), '벙어리되고 귀머거리된 영'(막 9,25), '병약함의 영들'(눅 13,11), '귀신들의 영들'(계 16,13.14)로 불리운다. (눅 8,2에서는 '악하고 병약한 영들'과 '일곱 귀신들'이 함께 언급된다. 그러나 단지 '영들'만으로 귀신들을 표현하기도 한다(마 8,16; (눅 10,20; (행 23,8.9). 때로는 레기온(막 5,9; (눅 8,30: 군대/많다)이라는 말을 통해서 귀신들의 숫자가 많음을 표시하기도 한다. 귀신은 주로 사람 안에 거주하면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그들을 아프게 하며 병들게 한다. 이에 예수는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신다( ). 예수의 제자들 또한 예수처럼 귀신들보다 더 강한 영의 능력을 받아 축사를 행한다. 3. '귀신들리다' 이 동사는 신약 복음서에서 13 번 등장한다. 마태복음에 7번, 마가복음에 4번, 그리고 누가와 요한복음에 각각 한번씩 나타난다. 이것은 사람이 그 안에 머무는 귀신에 의해 질병상태에 놓이는 것을 가리킨다. (요 10,21.22에 의하면 이'귀신들리다'라는 말은 '귀신을 지니고 있다'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 15,22에서는 단순히 귀신들림이 아니라, '귀신들려 고통 당하다'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곧 인간의 몸과 마음에 지니고 있는 질병의 근거가 귀신들에게 온 것을 말해 준다. 4. 귀신들의 장소와 시간 귀신들이 머무는 곳은 광야(눅 8,29: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마 12,43 병행; (눅 11,24 참조 (막 1,12.13 병행), 파괴된 곳(계 18,2), 무덤(마 8,28 병행; (막 5,2; (막 5,3 병행; (눅 8,27; (막 5,5)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에 대한 적대자 곧 귀신들이 갇힐 곳은 무저갱(눅 8,31; (계 9,1; 20,1-3 참조 롬 10,7)으로 나타난다. 귀신들이 또한 머무는 곳으로 불과 물, 공중이 나타나기도 한다(9,22; 참조: (마 17,15. 불: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하는 수단(계 20,9; 참조 (눅 9,54); 물: 귀신들의 요소다(계 12,15.16; 13,1; 참조 (막 5,1-13 병행, 공중권세를 잡은 자(엡 2,2)). 귀신이 활동하는 시간은 주로 밤이다. 밤이란 신적인 계시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악한 영들, 죽음의 영이 일하는 시간으로 나타난다(눅 12,20; 참조 (행 20,7-9). 예를 들어, 베드로가 고기낚기를 실패하는 때도 밤으로 나타나며(눅 5,5-7; (요 21,3-6), 예수가 배반을 당하는 때도 밤이다(요 13,30; (고전 11,23), 밤에 체포당한다(참조 (눅 22,53; 예수의 예언: "밤에 너희가 나를 다 버리리라"(마 26,31; 26,34 병행 (막 14,30). 귀신들은 곧 어두움을 가져오는 존재이다(계 16,10). 따라서 예수가 다시 오시는 종말의 때란 더 이상 밤이 없는 빛의 자리이다(계 21,25; 22,5). II. 사탄과 귀신들의 역할 사탄은 첫 장조에서 인간을 유혹했던 뱀과 동일시되고 있으며(계 12,9; 20,2; 참조 (창 3,1-15), 하나님과 적대하는 능력으로 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로 등장한다(막 3,23-26; (마 12,26/(눅 11,18). 사탄의 영역은 어둠의 세계이다(행 26,18; (고후 11,14). 질병과 파괴의 영들이 그에게 복종한다(눅 13,16; (고후 12,7; (살전 2,18; (딤전 1,20). 사탄/마귀는 곧 인간을 적대하는 자로서(삼상 29,4; (왕상 5,18 등), 초월적인 존재로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고소하는 자로 나타난다(욥 1,6-12; 2,1-7; (슥 3,1.2; (대하 21,1(LXX ). 또한 사탄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원수로 나타나므로 마귀의 세계는 하늘의 세계와 대립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로 귀신들 중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자다. 귀신들은 말하자면 그의 졸개들이라고 할 수 있다(마 25,41; 계 12,7.9).마귀는 곧 질병과 죽음을 가져오는 귀신들의 우두머리이다(행 10,38; 참조 (고후 12,7-9; (히 2,14; 참조 (레 20,10.13.14). 마귀는 인간을 죽음과 질병에로 몰고 갈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을 유혹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교하게 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불순종하게 하기도 한다(마 4,1.5.11 병행; (눅 4,2.3.6.13; (계 2,10; 12,9; 20,10). 예를 들면, 마귀는 예수의 비유 말씀 가운데서 곧 잡초를 밭 가운데 뿌릴 뿐 아니라(마 13,39), 하나님의 말씀의 선한 씨앗을 도둑질하기도 한다(눅 8,12). 또한 인간에게 올무를 놓고(딤전 3,7; (딤후 2,26), 인간을 죄에 빠뜨릴 뿐 아니라(요 8,44; (요1 3,8), 처음부터 살인자이고, 거짓말쟁이고, 죄인이다. 유다에게 반역하게 만들 뿐아니라(요 13,2), 인간을 교만하게하고(딤전 3,6), 형제를 미워하게 한다(요1 3,8). 따라서 모든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는 마귀의 자녀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다(요 8,44; (행 13,10; (요1 3,8.10). 사탄은 죄와 사악함의 시조인 것이다(막 4,15; (눅 22,3 병행; (요 13,27; (행 5,3; (딤전 5,15). 그러나 이러한 마귀의 사역은 일정한 시간에 제한되어 있다(계 12,12).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마귀는 천년동안 갇히울 것이다(계 20,2). 그리고 결정적인 마지막 전투 후에(계 20,10), 또는 마지막 심판 후에(마 25,41), 마귀는 영원한 불에 던지워 멸망당할 것이다(마 25,41; (계 20,10). 그러나 사실은 마귀의 다스림의 세계는 이미 무너졌다(참조 (요 12,31; 14,30; 16,11). 예수께서 이미 마귀의 일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나타나셨기 때문이다(요1 3,8). 예수께서 귀신을 내 쫓음은 곧 마귀의 세계가 종말을 고했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도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마 12,28 병행; (눅 11,20). III. 귀신들림과 예수의 귀신축출 1. 귀신들림이란 인간 안에 들어온 귀신들이 그 인간을 육적으로 영적으로 괴롭히며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예: (삼상 16,14-23: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사울)를 번뇌케 한다). 성경은 귀신들린 사람을 '귀신을 지녔다'고도 말한다(눅 4,33; (마 11,18 병행; (눅 7,33: 세례요한; 예수에 대해서 (요 7,20; 8,48.49.52; 10,20). 그러나 귀신들은 사람에게 '들어가기도' 하며(눅 8,30; (막 5,12.13; (눅 8,32.33). 능력있는 말씀에 의해 그에게서 '떠나기도' 한다(막 1,26 병행; (눅 4,35; 4,41; 8,2; (마 8,32 병행; (막 5,13/(눅 8,33; 8,35.38; (막 7,29.30; (마 17,18; (눅 11,14). 예수를 만난 귀신들이 떠나기 전에 귀신들린 자에게 소동을 일으키기도 한다(마 1,21-28; 5,1-20; 7,24-30; 9,14-29 등). 이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곧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지니고 있음으로(막 1,24; 3,11; 참조 (행 16,17) 그들이 영적 존재임을 알려준다(귀신들림의 구체적인 현상은 III. 3. 또는 IV. 3. 을 참조할 것) 2. 마가복음에는 네 개의 중심적인 귀신축출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막 1,21-28; 5,1-20; 7,24-30; 9,14-29). 그러나 그 외에도 짧은 보고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마 9,32-34; 12,22(눅 11,14); (막 1,32-34.39; 3,7-12등). 귀신축출 이야기에 나타난 귀신들린 사람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근거없는 자들로, 사회의 변두리에 쫓겨난 사람들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행동이나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열악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반드시 모든 사람이 다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귀신축출 사건(막 1,21-28)을 보면, 그 사람은 유대 사회의 중심흐름에 놓여 있는 사람이며, 그의 공동체에서 종교적인 생활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귀신들린 아이의 경우도 그 아이는 그의 가족과 함께 있었고 그 아버지와 함께 예수의 제자들을 보기 위하여 동행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막 9,14-29). 경제적으로도 그 당시 사람들의 평균수준보다 오히려 낳은 상태에 있었던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경우도 가정에 머물고 있었으며(막 7,24-30), 그녀는 딸을 집밖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딸이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고, 집을 떠나기에는 너무 그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 가정에서 그와 같은 딸을 돌보았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녀의 가정이 부유한 가정이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막 5,1-20)는 버려진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무덤 동굴에서 살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의 변두리마져도 그를 용납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그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간주되어, 성전에 들어가거나 예배에 참여하거나 종교적 식사에 참석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이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 귀신이 매우 폭력적이어서 이웃과 공동체의 자리가 그를 유리시킬 수밖에 없는 파괴적인 존재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위에 언급된 대로 귀신들림이 혼돈된,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은 때때로 그가 자신의 상황에 전혀 반대되는 성향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든지, 아니면 귀신들은 영적인 적대자를 직면했을 때 그 자신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쨋든 귀신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인간에 대한 적대적인 사역이 예수에 의해 거부됨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예수의 귀신축출 사역 1) 축사자로서의 예수: 예수는 당시 유대적인 세계관과 같이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곧 마지막 시대에 마귀와 그 세력들은 다 제거되어질 것이라는 유대 종말론의 한 단면을 가지고 계셨다(1 QS 3,24.25; 4,20-22; 1 QH 3,18; 1 QM 1,10.11 등).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귀신축출과 병치유는 말하자면 바로 이러한 유대 종말론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 또한 그것을 보여준다(마 11,4-6 병행; (눅 7,22.23). 다시 말하면 예수의 병치유와 그에 따른 귀신 축출은 구약 예언적 말씀에 대한 성취라 할 수 있다(참조 (사 29,18.19; 35,5.6; 61,1). 이를 통해 예수는 자신의 종말론적인 자기 인식과 그의 축사행위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 특히 귀신축출에 대한 종합보고인 (마 12,43-45(병행; (눅 11,24-26)을 보면 예수는 귀신을 쫓아내는 분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적대자들에 의해서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고소를 당한다(막 3,22; (마 9,34; 12,24; (눅 11,20). 이것은 말하자면 예수가 축사자로 나타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적대자들의 그러한 비난을 예수는 거절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축사자였다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고 있다. 예수는 자기 스스로 성령/하나님의 손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마 12,28; (눅 11,20)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가 헤롯을 향해 자기의 사명과 운명을 언급한 구절인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눅 13,32) 는 말씀은 바로 예수가 축사자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뿐 아니라, 축사자 예수의 이름을 빌어 축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막 9,38 병행 (눅 9,49) 그러한 명성에 걸맞는 현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축사능력은 그의 제자들(70인)에게도 전수되고 있다. 그들은 예수 앞에 나아와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라고 기뻐하며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축사자의 권위는 이미 제자들을 선택할 때 부여된 것으로 마가는 보도하고 있다. 마가에 의하면(3,14)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는 예수와 더불어 함께 있음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을 파송하는 것이다. 특히 제자 파송에서 그들의 역할은 첫째는 말씀 선포였고, 둘째는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었다. 즉 예수는 제자들에게 축사의 권위를 부여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축사를 행하는 권위의 전승은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제자들의 사 역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이에 힘입어 바울도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 16,18)고 축사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2) 귀신축출의 과정: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 귀신들린 자에 대한 예수의 치유는 대체적으로 귀신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는 축사행위로 이루어진다(마 15,21-28 병행; (막 7,24-30; 막 1,23-28 병행; (눅 4,33-37; (막 5,1-20 병행; 9,14-29 병행). 예수는 축사행위를 통해서 육체적인 질병도 치유했다. 예를 들면 맹인의 고침(마 12,22-24; (막 10,46-52 병행; 2,1-12 병행), 벙어리(마 9,32.33 병행; (눅 11,14; 참조 (막 9,14-29 병행), 중풍병(막 2,1-12 병행; (눅 13,10-17), 문둥병(막 1,40-45 병행; (눅 17,11-19), 열병(막 1,29-31 병행)의 치유등이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축사의 특징은 귀신에 대한 꾸중과 위협이다(막 1,25 병행; (눅 4,35; (막 3,12 병(행; 9,25 병행; (눅 4,39 등). 그 외에도 침을 바르는 것(막 7,31-37; 8,22-26; (요 9,6.7). 안수하는 것(마 8,15 병행; (막 1,31; 마 9,29 병행; 20,34; 막 7,32.33; 8,22-26; 참조 막 5,41 병행)도 병행된다. 여기서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축사자로서의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귀신축출의 과정을 살펴보면, a.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막 1,23: 귀신들린 사람의 소리지름) b. 귀신(들린 자)의 응답: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막 1,24)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막 5,7) c. 예수의 침묵명령: "잠잠하라"(막 1,25)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 1,25; 5,8; 9,25). 이는 축사행위에 있어서 하나의 도식이라 할 수 있다. 그 중간에 귀신을 향한 예수의 물음이 나타난다. "네 이름이 무엇인가?"(막 5,9). 이름을 질문함으로 귀신을 무장해제 시킨다. 막 9,21-22에서는 예수가 귀신들린 아이의 질병 과정을 묻는다("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d. 예수가 귀신으로 하여금 다시 귀신들렸던 자에게 되돌아오지 못하도록 명령함(참조 (마 12,43-45; 병행; (눅 11,24-26). e. 귀신들이 예수에게 관용을 요청함(막 5,10-12: 돼지에게로 들어가기 원함). f. 예수가 귀신들로 돼지에게로 들어가도록 허락(막 5,13). g. 귀신들린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다(막 5,15). h. 목격자들의 두려움과 놀라움(막 1,27: "다 노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이 과정에서 귀신의 폭력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소리지르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함/ 돼지를 물에 빠뜨림(막 5,4-5/11-13),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경련을 일으키게 함(막 1,26; 9,26).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병치유의 기적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예수와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닌 멀리있는 사람이 귀신들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귀신을 쫓아낸 경우도 있다(막 7,24-30: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는 사실이다. 3) 귀신축출의 수단: 예수의 말씀으로 귀신을 내 쫓기도 하시며(막 1,25; 9,25), 하나님의 영/손가락으로 내쫓기도 하시고(마 12,28; (눅 11,20), 자기 권위로 내쫓기도 하신다(막 9,25: 내가 네게 명령한다). 특히 성령을 통해 나타난 귀신축출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오심을 의미한다(막 3,22-27 (마 9,32-34; 12,22-30; (눅 11,14-23). 따라서 축사행위는 단지 하나님 나라의 준비나 도래의 표지라기 보다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현실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을 뜻한다. 강한 자의 비유는 그것을 말해준다(마 12,29; (막 3,27; (눅 11,21-22). 예수는 그의 축사행위에서 사탄의 능력을 박탈하고 구속한 것을 의미한다. 귀신축출 자체가 바로 메시야적 행위라는 것이다. 귀신축출은 사탄을 가두는 첫 단계이고, 마지막 심판에서 궁극적 승리가 나타날 것이라(마 13,30: 추수 때)는 말씀이다. IV. 복음서와 원시기독교회에 나타난 귀신축출 보고의 특성 1. 마태복음(마 ): 사탄과 마귀의 이름이 서로 호환되고 있지만(4,10; 12,26; 16,23), 마귀라는 이름을 보다 선호(4,1.5.8.11; 13,39; 25,41)한다. 마태는 사탄의 유혹자로서의 성격을 부각시킨다(4,13). 마태는 예수의 축사의 역할을 마가복음보다는 축소시킨다. 예를 들면 막 1,21-28의 가버나움에서의 귀신축출의 이야기를 생략한다. 마 8,24-34에 이르기까지 축사의 이야기를 담지 않고 있다(요약보고에서만 취급: 마 4,24). 그러나 마태에게서도 귀신축출의 행위는 예수의 중요한 계시행위였다(마 12,22-30). 마 9,32-34(벙어리 귀신의 축사: 눅 11,14)에서 축사는 소경과 벙어리를 고치는 메시야적 행위로 이해된다(사 42,7.16; 29,18; 35,5; 42,18-20; 43,8; 61,1(LXX)). 예수의 축사행위를 통해서 종말에 나타날 귀신들의 고통이 이미 시작됐음을 알고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는가?"라고 예수에게 묻고 있다(마 8,29). 이에 예수는 다만 귀신들을 향해 "나가라"(마 8,32)고 명령하신다. 마태에서는 예수가 기름이나 침이 아니라, 말씀으로 축사를 행하신다(마 8,16). 2. 마가복음(막 ): 마가는 곧 예수의 공적인 첫 번째 행위가 귀신축출임을 명백히 한다. 마가복음의 13 개의 치유이야기에서 가장 큰 범주는 축사(1,21-28; 5,1-20; 7,24-30; 9,14-29)인 것이다. 마가는 곧 예수의 사역의 요약보고에서 그의 귀신축출의 모습을 언급하므로 예수의 귀신축출이 그의 사역에서 지닌 의미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1,32-34; 3,11-12).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사탄의 중요한 역할은 예수를 그의 선교적 사명에서 빗나가게 하는 일이었다(막 1,13: 광야시험; 8,33: 베드로의 간청을 사탄의 요구로 이해). 만약 마가가 씨뿌리는 자를(4,3.14) 예수로 이해했다면, 사탄은 예수의 사역을 파괴하는 자로 이해한 것이다(4,15). 마가는 귀신이라는 단어를 13 번, 더러운 영이라는 단어를 11 번 사용한다. 때로는 둘을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한다(참조 3,22.30; 7,25-26). 귀신들이라는 용어는 축사의 문맥에서만 사용된다(1,34.39; 3,15). 귀신들은 사람들에게 하는 일은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소리지르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1,26). 귀신들은 곧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자로서, 자해하는 자로 묘사(5,3-5; 9,22)되고 있다. 곧 사람을 땅에 넘어지게 하며 입에 거품을 물게 하고 이를 갈게 한다(9,18). 그러나 귀신은 동물에게도 들어갈 수 있는 존재(5,11-13)로 묘사되기도 한다. 예수가 귀신을 내쫓을 때에 예수가 사용한 동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즉 '꾸짖다'( : 막 1,25; 3,12; 9,25), '입막음하다'( : 1,25-26), '명령하다'( : 9,25: 귀신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명령하다)는 동사를 통해 귀신의 사역을 제어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1,27; 2,7; 4,41; 6,1-6.14-16.49-50.54; 8,27-28)에 대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사람들 중에 귀신들도 중요 역할을 담당한다(1,24-25.34; 3,11-12; 5,7)고 말한다. 이러한 고백은 마가복음서의 시작에서부터(막 1,1), 예수의 세례받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1,11), 그리고 적대자들(대제사장)과(14,61) 이방 백부장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지속됨을 보여준다(15,39). 이러한 사실을 통해 마가는 그의 예수상을 제시하려 한다. 3. 누가복음(눅 ): 광야유혹 이야기에서 누가는 마귀가 '잠시동안 그를 떠났다'(4,13)라고 보고함으로 독자로 하여금 예수의 적대자가 다시 등장할 것을 기다리게 한다. 그렇다고 귀신들의 역사가 가롯유다에게 마귀가 들어갈 때까지 마귀가 침묵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그의 사역을 통해 귀신들과 투쟁하고 있다(4,33-37; 6,18; 7,21; 8,2.26-39; 9,37-43; 눅 10,17-18; 11,14; 13,11.32). 누가는 마가보다 더 분명하게 마귀가 원시기독교회에서도 적대자임을 말해준다(눅 8,11-12; 행 6,7; 13,5). 가장 결정적인 예수에 대한 적대는 가롯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서 예수를 배반하게 하는 것이다(눅 22,3-4). 그의 제자들도 항복하도록 만든다(눅 22,31-32: "사탄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사탄의 파괴적인 능력을 예수는 기도로서 승리한다. 또한 사탄은 제자들을 완전히 파괴시키지는 못한다. 예수의 공생애 사역중에 70인 제자의 보고가 우리에게 흥미를 끈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계속해서 예수의 말씀 곧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는 말씀을 통해 사탄의 종말론적인 멸망이 예수의 사역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모습은 사도행전에서 보다 명백하게 보여진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께서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예수는 성령을 통해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자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축사는 곧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4. 요한복음(요 ): 놀랍게도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자신이 행하는 축사의 모습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요한복음 기자가 귀신이라는 용어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가 귀신들렸다(7,20: 8,48.49.52)고 비난받고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7,20: 이는 그가 미쳤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10,21-22).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마귀로 불리우고(6,70), 사탄이 곧 유다에게 들어갔다(13,2.27)고 말한다. 8,44에서는 마귀가 예수와 대조되고 있다(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거짖말쟁이/거짓의 아비). 예수는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마귀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심판받고 무너질 것이다(12,23-36)고 말씀하신다. 한가지 눈여겨 볼 것은 공관복음서에서 사탄의 패배는 예수의 축사행위와 연관되어 있으나, 요한복음에서는 사탄의 패배는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다(요 14,30; 16,11)는 점이다. 5.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축사: 예수는 제자들에게 축사를 가르치셨으나(마 10,8 병행, 눅 9,2; 막 3,15 병행; 6,13; 눅 10,17 등), 제자들이 행한 축사는 성공(눅 10,17)과 실패(막 9,18)가 엇갈리면서 나타나기도 한다. 원시기독교회에서 축사와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마 7,22; 막 16,17; 눅 10,17; 행 3,6.16; 4,7.10.30; 16,18). 치유하는 기도(참조 행 9,40; 28,8)와 제의적인 기름부음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기도 했다(약 5,14). 또 안수를 행하거나(행 9,12.17; 28,8), 손을 붙잡거나(행 3,7; 참조 9,14). 전체 몸을 만지는 행위도 나타난다(행 20,10: 유두고; 참조 왕상 17,21; 왕하 4,34). 베드로의 구원하는 그림자에 씌우는 경우(행 5,15), 바울의 수건(행 19,12)을 놓은 경우도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치유에는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의 모든 세력을 지배하시는 주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마 28,18; (빌 2,9.10; (골 2,10.15 등). 우리는 또한 바울의 축사적인 기도를 알고 있다(고후 12,7-9). 그러나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로 바뀌고 있음을 보게된다. V. 거라사 귀신들린 자의 치유이야기(막 5,1-20 병행; 마 8,28-34; 눅 8,26-39). 1. 짜임새: 막 1,23-28이 유대 회당에서 행한 축사행위이라면, 막 5,1-20은 이방 거라사 지방 무덤가에서 행한 축사행위이다. 이 본문은 그 짜임새가 아주 명확하게 구성되어 있다. 서론과 질병의 상태에 대한 언급(1-5 절), 예수님의 귀신과의 논쟁(6-13 절), 증거자들의 태도(14-17 절), 고침받은 자의 모습(18-20)이 차례로 나타난다. 여기서 몇가지의 주제들이 반복, 또는 중복되고 있다.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2. 6 절), 귀신들린 자가 무덤에 머무는 것에 대한 묘사(3. 5 절), 귀신들의 요청(10. 12 절), 갑자기 일어난 사건에 대한 목자들의 보고(14, 16 절)가 그러하다. 또한 이미 있은 일을 나중에 기록하는 방식의 언급도 있다. 예를 들면, 귀신들린 자가 예수를 멀리서 바라보다(6), 예수가 추방명령을 내렸다(8), 귀신들린 자가 군대귀신 집혔던 자로 확인된다(15c), 도시로부터 온 증거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다시 보고한다(16 절: 돼지떼들의 일). '예수가 배에서 내려온 후 곧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2 절)는 묘사와 '귀신들린 자가 그를 멀리서 보고 달려왔다'(6 절)는 언급이 서로 긴장 관계를 이루는 것 같기도 하나 양자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바다 건너편'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옴으로(4,35; 5,21; 6,45; 8,13) 여기서도(막 5,1) 그 동안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의 한 부분임을 암시한다. 그 표현 뒤에는 각각 기적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 풍랑이 잠잠해지는 사건(4,35-41), 귀신들린 자의 귀신쫓아냄(5,1-20), 물위를 거니신 기적(6,45-52), 바리새인들의 표적 요청에 대한 대답을 하시면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막 8,13)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를 중심으로 한 모습을 살펴본다면, 바다 건너편(1 절)으로 가서, 그곳에 도착하여(2 절: 배에서 내리다),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다시 배에 타는 것으로 되어 있다(18 절). 특히 18-20 절은 선교 신학적인 동기가 들어 있다. 귀신축출의 양식/동기를 중심으로 본문을 분석해 본다면, 1)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1-2 절) 2) 귀신의 방어시도(6-7 절) 3) 예수의 축출명령(8 절) 4) 귀신의 내쫓김(종종 시위적으로 묘사된다: 13 절) 5). 목격자들의 두려움(15.20 절)과 귀신축출에 대한 소식이 퍼짐(14a.18,20). a. 질병의 특수성과 그 중증에 대한 묘사(지금까지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됨을 강조: 3-5 절) b. 치유된 자에게 행한 치유에 대한 실증(15 절: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c. 목격자들의 두려움의 반응(14.16-17.20 절: "보고 두려워하더라."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와 귀신과의 만남에서 드러난 대화와 그 결과를 보면, 예수는 a. 귀신의 이름을 묻는다(9 절). b. 귀신들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드러내며 방어적인 요청을 한다(10-12 절). c. 이제 귀신들은 새로운 자리로 내쫓김(12-13 절)을 당한다. 2. 귀신축출과정의 구체적인 설명 1)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1-2 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1-2 절). 예수가 거라사 지방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리자 마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아와 예수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람은 더러운 영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더럽다'( )는 말은 유대 종교적인 용어이다. 즉 부정한 장소인 무덤에서 그가 나왔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무덤이란 바로 귀신들이 머무는 장소이기도 하다. 거라사라는 이방지역과 더불어 무덤이라는 장소에 대한 설명은 따라서 부정함의 극대화를 드러낸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인격의 대면이다. 곧 이라는 말로서 어떤 긴장관계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즉 귀신들린 자의 부정한 영이 자기보다 강한 적대자를 만난 것 같은 낌새를 알아 이제 구체적인 도전적인 만남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2) 귀신의 방어적인 시도: 6 절의 도입부/7 절의 구체적인 시도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6-7 절). 귀신들린 자는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간청한다. 절하는 것은 예배하는 형태이다. 전적으로 복종적인 자세를 보인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방어한다. 그렇다면 6 절은 만남의 두 번째 단계인가? 여기에서 명백한 것은 예수의 우월성이 드러나고 귀신의 방어가 실패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러운 영이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있다. 이러한 귀신들의 큰 소리와 귀신들린 자의 큰 소리가 귀신축출의 설명가운데서 항상 반복되는 특성이다( : 소리지르다. 귀신들이 부르짖음: 막 5,5; 9,26; 눅 9,39). 소리지름 자체가 그가 영적인 인격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귀신들린 자는 예수에게 방어양식을 들이댄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있는가?'(단수로 되어 있다). 이는 상대방을 거절하며 그 한계를 긋는 언어인 것이다.(막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위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왕상 17,8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거라사인은 이방인으로서 높으신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그 아들로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방지역에서 더러운 귀신들에 의한 고백이라 할 수 있다. "나를 괴롭게하지 말라"는 간구에서 이미 예수의 힘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의 힘이란 귀신의 역할과는 다른 것임도 보여준다. 즉 귀신을 멸할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이시다(1,24: 나를 멸하러 왔나이까?). 3) 예수의 축출명령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8 절). 즉 귀신의 방어적인 간구 이전에 이미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는 명령을 하셨다는 것이다('나오라': ). 이는 꾸중이 담긴 전형적인 추방명령이다. 어디로 가라는 가에 대한 것은 불분명하다. 4) 귀신의 내쫓김의 진술 "허락하신 대로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13) 추방명령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즉 귀신들의 순종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에 복종했다. 여기에 축사자의 능력이 있다. 그 추방명령에 의해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간 것이다. 귀신들의 움직이는 모습, 즉 들어감과 나감은 성서에 구체적으로 진술되고 있다(참조 눅 22,3: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다). 5) 목격자의 반응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 하더라." 거주자들이 일어난 사건을 보기 위하여 왔다. 그들은 예수에게 나와서 치유받은 자가 어떻게 변모되었는지를 보았다. 그 치유의 모습은 명확하게 제시된다. 이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붙잡힌다. 이 두려움은 신현현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이해된다. 모든 보고를 들은 그들은 예수에게 그 지역을 떠날 것을 간청한다. 이 떠날 것에 대한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것이다(아니면, 소유자들이 계속적인 손해볼 것에 대한 반응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18-20: 치유받은 자, 그리고 그의 선포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 이에 목격자의 두려움과 기적적인 행위의 소식이 널리 퍼졌다(목격자들의 반응: 15.17 절) 3. 귀신들림의 특성 1)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막 1,21-28)은 예측 불가능한 무질서함을 보여준다. 그가 회당에 참여한 것을 보면 보통 때는 유대 종교사회의 주요흐름에 동참했던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 것으로 보이다. 어쩌면 영적인 적대자를 만났을 때에만 자기 고유한 모습을 보여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거라사 귀신들린 자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막 5,1-20). 그는 무덤, 곧 부정함의 장소에 그 거처를 두고 있다(3a). 그 질병은 광포함으로 나타난다(3-4). 사람들은 그를 쇠사슬로 묶어둘 수도 맬 수도 없었다. 그는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다. 이는 귀신의 광포함을 가리킨다. 그뿐만 아니라 밤과 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지르는 것이다(5). 통제할 수 없는 슬픔과 한 맺힘이 그를 붙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덤이라는 장소와 그의 행동 모습이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돌로 상하게 하는 것이다(5). 이러한 자학은 자기 파괴적인 충동에 의한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이러한 전체적인 진술은 귀신들의 이름이 레기온으로 주어지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즉 막대한 힘을 가지고 모든 묶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만약 한 사람 안에 2000 귀신이 거주한다면, 그는 무한한 힘을 사용할 것이다(이사야 65 장(LXX)은 귀신들림의 질병을 묘사하는 기본본문으로 이해됐다. 사 65 장에서 이방인들은 산에서 우상/귀신들에게 제사드리며(3 절), 무덤에서 사는 자들이고(4 절), 돼지고기를 먹는 자들이다). 산 사람과의 교제는 끊어지고 소외되고 상실된 인간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2) 귀신들은 인격적인 존재로 설명된다. 그들은 계시적인 비밀, 예를 들면 예수의 정체성을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자기의 운명을 알기에 예수로부터 침묵하도록 요청 받기도 한다(막 1,24.34 병행; 눅 4,34.41; 막 3,11; 5,7 병행). 귀신들린 자의 소리침은 곧 귀신들의 소리침으로 이해된다(참조 막 1,23 병행; 눅 4,33; 막 3,11; 5,5; 5,7 병행; 막 9,26 병행; 눅 9,39; 눅 4,41). 귀신은 귀신들린 자에게 경련을 일으킴으로 자기의 광포함을 드러내며, 귀신들린 자가 자기에게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막 1,26 병행; 눅 4,35; 8,29; 막 9,18.20 병행; 눅 9,39.42). 3) 축사의 과정 a. 이름을 물음: 9 절: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많은 귀신에 붙잡힌 것에 대한 표현이다. 9-12 절에서 단수와 복수가 계속적으로 뒤바뀐다. 내 이름은...우리가 많음이다. 우리를 돼지에게로... 막 1,24 에서는 단수와 복수가 혼용되어서 등장한다. 이는 인격적인 분열 때문인가? 아니면 속임수의 변명인가? 명백한 것은 예수가 오신 것은 사탄의 세력들을 멸하기 위함이다. 예수의 질문은 귀신에 대한 강압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b. 허용요구: 귀신들의 복종의 고백과 예수에 대한 요구가 함께 나타난다. 돼지떼가 바다로 빠진다(구약에서 바다란 종종 파멸의 자리이다). 결국은 귀신들이 그 파멸의 구덩이에 빠진 것을 의미한다. c. 추방명령: 예수의 우월성과 귀신들의 종속성이 뚜렷하게 대비되어 있다. 예수의 추방명령은 다른 때의 예수의 부드러운 온유함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여기서 귀신에 대한 예수의 분노가 들어있다고 해도 옳을 것이다. 13 절에서 귀신들의 나옴과 들어감이 묘사된다. 귀신들의 상하고 파괴하는 활동성을 드러난다. 광포와 자기 파괴적인 분노가 드러난다. 돼지떼에게 돌진하는 모습( )은 인간적인 판단에 의해서 조절되지 않는 격렬한 움직임을 뜻한다. 귀신들린 자의 광포가 돼지에게 전가되었고 곧 자기파괴가 명백히 드러났다. 귀신들린 자는 스스로 돌로 상해했으나, 돼지 떼는 언덕길로 내달아 물에 빠져 죽었다. 생명을 상하고 파괴하는 더러운 영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4) 귀신들림에서 치유 5,15b에서 3-5 절에서 보였던 광포한 모습이 전적으로 변화되어 있다. 그는 예수 곁에 앉아있다. 소리지르고 스스로 상하게 하는 대신에 정신이 들어 있다. 광포대신에 이성으로 되돌아왔다( 은 의 반대개념이다). 그는 전에는 벌거벗고 돌아다녔으나, 이제는 옷을 입고 있다. 예수의 귀신축출은 귀신들린 자를 조용한, 그리고 이성적인 정신상태로 되돌려 보냈다. 예수는 그를 귀신들로부터 자유하게 했다. VI.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반성 1. 예수가 축사자로서 활동하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도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의 질병을 귀신에게로 돌렸다(더러운 영/ 더 악한 영: 마 12,43-45 병행; 눅 11,24-26; 벙어리 귀신: 눅 11,14; 벙어리의 영: 막 9,17.25; 연약함의 영: 눅 13,11; 참조 눅 8,2). 따라서 치유란 귀신을 쫓아내는 데 있었다(마 9,33; 10,8; 12,24.27.28; 막 1,34.39; 3,15.22; 6,13; 9,38; 16,9.17; 눅 9,49; 11,15.18-20; 13,32). 예수는 육체적인 연약함, 예를 들면 소경(눅 7,21; 마 12,22-24; 막 10,46-52 병행), 벙어리(막 9,14-29 병행; 마 9,32.33 병행; 눅 11,14), 중풍병(막 2,1-12 병행; 눅 13,10-17), 문둥병(막 1,40-45 병행; 눅 17,11-19), 열병(막 1,29-31 병행), 게다가 마음과 정신의 질병까지도 귀신을 내 쫓음으로 치유했던 것이다(막 1,23-28 병행; 눅 4,33-37; 막 5,1-20 병행; 7,24-30 병행; 9,14-29 병행). 말하자면 예수시대에 귀신을 축출하는 것과 질병을 고치는 것은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되었다(막 1,32-34 병행; 눅 6,18.19).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이 양자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귀신들림과 정신질병, 또는 귀신과 육체적인 질병과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귀신들림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광포함/자기상해 등의 귀신들림의 전형적인 모습과 정신질병과를 구분할 수 있는가? 2.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마 11,4-6 병행; 눅 7,22.23) 있어서 예수는 그의 치유를 구약의 성취로서 해석했다(참조 사 29,18.19; 35,5.6; 61,1). 유대주의의 종말론적인 기대가 귀신들에 대한 예수의 승리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막 3,27 병행; 참조 눅 13,32). 만약 예수가 하나님의 성령/손가락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이라면(마 12,28a/눅 11,20a),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한 것이라(마 12,28b 병행; 눅 11,20b)는 말씀이다. 따라서 바알세불에 의해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에 대해서 단호히 거절하신다(막 3,22 병행). 예수의 영을 잘못 이해하는 자는 곧 거룩한 성령에 대한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짓는 것과 같다(막 3,28-30 병행)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축사는 마귀의 힘을 종말론적으로 제거했다는 표징이며, 동시에 마귀와 싸워 승리함으로 예수가 마지막 승리자가 됐다는 증거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이 쫓겨나가는 자리에는 항상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가장 구체적으로 세워지고 있는 자리를 어디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이 시대에도 인간을 개인적, 집단적으로 억압하며 파괴시키는 세력들을 향해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축사적 행위를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3. 예수는 귀신적인 인간/음식의 불결함에 대해 결코 두려워하거나 기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본질을 바꾸어 버렸다. 그는 친히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었고 질병들린 사람의 동무가 되심으로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함을 몸으로 보여주었다(마 9,10 병행; 막 2,16; 눅 5,30; 15,2; 행 10,1-11,18; 갈 2,11-14). 또한 귀신들린 자와 귀신과를 구별함으로써 귀신들린 자와 귀신을 동일시하며 귀신들린 자를 사회와 종교에서 영원히 제거하는 당시의 관습을 타파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종교사회의 판단에 의해 억압되어 있는 인간 본연의 가치를 드러내고, 한 인격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다시 가정과 종교적 사회로 되돌려 보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정결/부정결에 대한 판단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그 판단으로 사람들이 자유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억압받게 되는 것인가? 우리의 가정과 사회, 그리고 종교는 오히려 이러한 갈등과 억압을 증폭시키고 한 맺힘이나, 억압에 대한 저항적 세력화된 귀신들림을 만들고 있는 주범은 아닌가? 4. 예수는 축사행위를 할 때에 어떤 고정된 축사양식을 도입하지 않았다. 어떤 특별한 도구도 사용하지 않고(예를 들면, 의약품/기구/향료등), 또한 어떤 권위에도 호소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한 권위를 갖고 축사를 행한다(마 12,28; 눅 11,20). 그렇다면 오늘의 축사 행위는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가? 우리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는 않는가? 5. 예수의 축사행위 자체에만 관심가진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마 7,22-23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행위 없이 축사가 행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님을 분명히 선언한다. 그것은 마치 사랑이 없으면 그 성령의 은사가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고전 13,1-14,1). 따라서 예수의 축사사역에는 인간을 파괴하는 귀신들에 대한 분노와 동시에 인간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들어가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귀신축출의 목표는 귀신들린 자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가정과 종교에로의 회복, 그리고 또한 평화를 누리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긍휼 때문에, 그리고 인간을 파괴하는 사탄과 그의 세력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이 길을 가고 있는가?
6 욥(Jop)
인물
jesus
4446 32 2006-12-28
▶ 욥(Jop) 뜻: 원한다 (1) 아라비아 우스에 사는 의인으로 큰 재산가요 자녀가 많은중에도 여호와 를 경외하 였다(욥01:1). (2) 여호와가 사탄에게 욥을 칭찬하셨더니 사탄이 말하기를 그가 재산이 많고 자녀가 많 아 행복된 생활중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역할 이유가 없다 고 대답했다. 여호와가 사탄에게 욥의 생명을 해하지 말고 무었이든 시험 해 보라 하여 재산과 자녀를 다 잃고 자시늬 몸에는 창질이 나고 세 친구 로부터 여러가지 유혹을 받았으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변함이 없었 다(욥01:8-22, (욥04:1, (욥08:1, (욥11:1< 욥07:4-16, (욥42:6). (3) 그러므로 여호와가 전보다 배의 축복을 주셨다(욥 42:12-15). (4) 140세를 살며 자손 4대를 보고 별세하였다(욥 42:16). (5) 욥기를 보면 홍수시대는 기록되어 있고 소돔 고모라의 멸망사는 기록되지 않은 것으 로 보아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인듯 하며 저작자는 모세라하는 이도 있고 다윗이라 하는 이 도 있으며 소설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으나 에스겔 (스 14:14을 보아 소설이 아닌 것을 중명할 수 있다. (6) 욥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있으니 - 심한 고난중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 지 않고. - 낙심하지 않고 - 유혹을 받지 않고 - 스스로 위로 받고. - 끝까지 인내함이다 (약05:11) -------------------------------------------------------------------------------- 욥… 가진것 모두 잃고도 믿음지킨 의인 15. 알몸으로 나왔은 즉, 알몸으로 돌아갈지라 ( 알몸 신앙의 소유자 - 욥 ) 도대체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시험이고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사랑인가 너무나 정직하고 경건했기에 너무나 순전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기에 사단의 시기의 대상이 된 사람 동방의 의인 우스 땅의 부호,욥 하나님도 욥을 믿었기에 사단의 가혹한 시험 앞에 욥을 내버려두었다 그리하여 모든 재산을 잃고 모든 자녀를 잃고 아내마저 욕하며 떠나가고 친구들조차 의심하며 비난의 말을 쏟아놓네 영혼과 육체가 나날이 고통 속에 시들어갈 때 욥은 잿더미 위에서 슬피 울며 하나님을 바랐네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렇듯 영혼의 아픔 속에 욥의 고통은 점차 깨달음이 되어 가고 육체의 무너짐 속에 영혼이 자유를 얻어 훨훨 춤추고 있네 마침내 폭풍 가운데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을 듣네 이제는 정금같이 단련된 신앙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네 모든 것을 잃은 후에 모든 것을 배로 얻었으니,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나님의 시험은 정녕 하나님의 사랑이라 15. 욥-육체의 고통 속에서 영혼의 깨달음을 동방에 경건한 의인이 있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곧 이스라엘의 족장시대에 동방의 우스 땅에 경건한 의인 한 명이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욥.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욥을 사단에게 자랑할 정도였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기 1:8) 욥의 이야기 속에서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욥에게 닥친 극한 고통과 시련은 그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결정적인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욥을 시기하고,하나님은 욥을 믿으셨다. 의인 욥은 부자였고 화목한 가정을 유지했다. 사단은 이 점을 노리고 욥의 경건함을 시기하여 하나님께 고소한다. “욥의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면 정녕 주를 욕하리이다” 하나님은 사단의 간교한 의도를 알았지만 욥을 믿었기 때문에 사단으로 하여금 욥의 소유물을 치도록 허락한다. 다만 욥의 몸에는 손대지 말라는 제한과 함께. 그 결과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는다. 재물,가축,하인,그리고 10명의 자녀들까지…. 하지만 욥의 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신앙 고백을 들어 보라!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 즉 또한 알몸으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욥 1:21) 육체의 고통 중에도 욥의 영혼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깨닫는다 사단은 실패했다. 그러나 사단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욥을 고소한다.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면 정녕 주를 욕하리이다” 하나님은 다시 허락하고 욥은 온몸에 악창이 나서 죽음보다 더한 육체의 극한 고통을 겪는다. “주여,어찌하여…어느 때까지니이까” 영문 모를 고통 앞에 욥은 잿더미 위에 앉아 기왓장으로 온몸을 긁으며 삶을 한탄하고 생을 통곡한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논리를 펴면서 욥의 회개를 촉구한다. 하지만 욥은 온몸으로 울면서 오직 하나님만 바란다. 마침내 폭풍 가운데서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 앞에 욥의 영혼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깨닫고 겸허하게 회개의 고백을 드린다. 미약한 피조물이 감히 창조주 하나님께 이유를 물은 죄에 대해서…. 이로써 욥은 정녕 의인이 되고 경건한 자가 된다. 김영진 <시인·성서원 회장> (교훈과 적용)
5 야고보(James)
인물
jesus
5501 24 2006-12-27
▶ 야고보(James) 뜻 : 발 뒤축을 잡음 [1] 12제자 중 큰 야고보로 부친은 세베대 모친은 살로매다. 그 아우 요한과 같이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 생활을 하다가 베드로의 형제와 같이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다(마04:20). 그 성격이 급하여 어떤날 주님과 같이 사마리아를 지나다가 유숙하고자 하나 허락지 않을 때에 그 형제가 주님에게 와서 그 곳에서 천벌을 내려 멸하기를 청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이 "우뢰의 자식"이라는 별명을 주셨다(눅09:54, (막03:17). 베드로와 같이 그 형제는 주의 특별하신 교훈을 받고 또 다른 사도들이 보지 못하는 이적을 여러번 보았다(마07:1, (막05:37, 막01:29-31, (막13:3-14, (막14:32-35). 주후 44년에 헤롯왕에게 참살당했다.(행12:1-2). - 열두 사도의 하나이며 알패오의 아들. 고대 전승은 작은 야고보와 동일 인물로 보는데 '작은'이란 신장이나 나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요한의 형제이며, 예수님의 친척이기도 하다. ( 그의 어머니와 마리아는 종자매이다 ). 야고보의 순교는 스테반이 죽은 후 약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이는 헤롯 아그립파가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되자마자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얻을 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매서운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2] 12제자중 작은 야고보. 그 부친은 알패오 모친은 마리아 형제는 요세이다(마10:3, (막05:40). - 블레셋과 애굽에서 전도하다가 애굽에서 순교. [3] 예수의 동생(막06:3). 그는 예수의 부활때 부터 믿기 시작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큰 기둥이 되었다(갈01:29). 예루살렘 공회의 회장(행15:13). 야고보서의 저술(약01:1). 전설에는 주후 62년에 돌에 맞아 죽었다고도 하고 혹은 69년에 유대 관리 들이 죽였다고도 한다. [4] 사도중 한 사람인데 다대오의 부친(눅06:16). -------------------------------------------------------------------------------- [3] 야고보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야곱과 같은 이름으로서 "약탈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는 여러명의 야고보가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믿음을 실천하는 신 앙으로 이름을 남긴 예수님의 동생도 있다. 보잘 것 없는 나사렛 마을의 목수 집안에서 태어난 야고보는 가난하기는 했지만 신실한 부모와 형제들 사이에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유대교의 엄격한 생활 습관을 익혔다. 예수의 바로 밑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는 어린시절부터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더욱이 아버지 요셉이 죽은 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는 형의 믿음직스러운 모습은 야고보로 하여금 형제로서 의 우애를 초월하여 가장에 대한 신뢰감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 생활하면서도 야고보는 그가 사랑하는 형에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자신보다 남을 위하고 선행을 하며 사는 예수의 모습이 그에게는 단지 자랑스러운 형의 모습일 뿐이었다. 공생애 기간에 집을 떠난 그의사역을 수행하는 예수가 세속적인 혈연관계만을 생각하는 야고보에게는 가족을 버리고 객지를 전전하며 이상한 짓을 하는 미친사람으로여겨지기도 했다. 형을 사랑하고 의지했던 만큼의 무게로 이제는 배신감과 불안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와같은 불신의 마음은 사랑하던 형 예수가 처형되는 데에도 찾아가지 않는 무정한 동생이 되게 했다. 그러나 인간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부 활 사건이 있은 후 그의영혼을 덮고 있던 불신의 구름은 걷힌다. 예수는 더이상 "육신의 형"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그의 마음 을 점령한 것이다. 뜨거운 믿음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 야고보의 인생은 오순절날 성령세례를 받고 놀라운 변화를 일으킨다. [예수의 동생]이 아닌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믿음의 행진을 하는 야고보의 활약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야고보는 무릎이 단단하게 굳어 [약대 무릎을 가진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기도를 많이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야고보는 중생한 이후에도 계속 율법을 준수하며 성별된 생활을하였는데 이러한 신앙관은 그가 성경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야고보서]에 잘 나타나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야고보는 스스로 믿음을 실천하며 삶으로써 불신자들에게까지 존경을 받았다.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의로운 사람]으로 인식되던 야고보의 인생은 오히려 율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그막을 내렸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어 삶 전체를 통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야고보의 굳은 믿음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미움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돌과 몽둥이에 맞아 죽은 야고보의 영혼은 그의 영원한 주인이신 순간까지 경건하게 살가 간 야고보의 신행일치 의삶은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입으로만 믿음을 자랑하는 오늘의 외색하는 자들에게 일침을 주고 있다. 진정한 예수 사랑과 올바른 복음전도는 믿음을 실천하는 "성화된 생활"을 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야고보 (예수의 동생) *** [야고보]는 야곱과 같은 이름으로서 "약탈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는 여러명의 야고보가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믿음을 실천하는 신 앙으로 이름을 남긴 예수님의 동생도 있다. 보잘 것 없는 나사렛 마을의 목수 집안에서 태어난 야고보는 가난하기는 했지만 신실한 부모와 형제들 사이에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유대교의 엄격한 생활 습관을 익혔다. 예수의 바로 밑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는 어린시절부터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더욱이 아버지 요셉이 죽은 후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는 형의 믿음직스러운 모습은 야고보로 하여금 형제로서 의 우애를 초월하여 가장에 대한 신뢰감을 갖게 해주었다. 그러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 생활하면서도 야고보는 그가 사랑하는 형에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자신보다 남을 위하고 선행을 하며 사는 예수의 모습이 그에게는 단지 자랑스러운 형의 모습일 뿐이었다. 공생애 기간에 집을 떠난 그의사역을 수행하는 예수가 세속적인 혈연관계만을 생각하는 야고보에게는 가족을 버리고 객지를 전전하며 이상한 짓을 하는 미친사람으로여겨지기도 했다. 형을 사랑하고 의지했던 만큼의 무게로 이제는 배신감과 불안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와같은 불신의 마음은 사랑하던 형 예수가 처형되는 데에도 찾아가지 않는 무정한 동생이 되게 했다. 그러나 인간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부 활 사건이 있은 후 그의영혼을 덮고 있던 불신의 구름은 걷힌다. 예수는 더이상 "육신의 형"될 수 없었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그의 마음 을 점령한 것이다. 뜨거운 믿음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 야고보의 인생은 오순절날 성령세례를 받고 놀라운 변화를 일으킨다. [예수의 동생]이 아닌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믿음의 행진을 하는 야고보의 활약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야고보는 무릎이 단단하게 굳어 [약대 무릎을 가진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기도를 많이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야고보는 중생한 이후에도 계속 율법을 준수하며 성별된 생활을하였는데 이러한 신앙관은 그가 성경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야고보서]에 잘 나타나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야고보는 스스로 믿음을 실천하며 삶으로써 불신자들에게까지 존경을 받았다. 이처럼 모든 사람에게 [의로운 사람]으로 인식되던 야고보의 인생은 오히려 율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그막을 내렸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어 삶 전체를 통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야고보의 굳은 믿음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미움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 돌과 몽둥이에 맞아 죽은 야고보의 영혼은 그의 영원한 주인이신 순간까지 경건하게 살가 간 야고보의 신행일치 의삶은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입으로만 믿음을 자랑하는 오늘의 외색하는 자들에게 일침을 주고 있다. 진정한 예수 사랑과 올바른 복음전도는 믿음을 실천하는 "성화된 생활"을 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4 엘리야(Elijah)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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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6 16 2006-12-27
▶ 엘리야(Elijah) 뜻 : 여호와는 하나님 [1] 이스라엘의 예언자 중 가장 무서웠던 예언자. 북왕국 아합왕(B.C. 876-854)과 아하시야왕 시대에 걸쳐 사역하였다. (1) 디셉 사람(왕상17:1). (2) 아합왕에게 예언하기를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으리라 하고 그릿 시냇가에 숨어있을 때 여호와가 가마귀를 시켜 조석 식물을 날라다 주게했다(왕상17:1-7) (3) 사르밧과부집에 유숙하는 중에 한줌의 보리가루와 적은 기름으로 여러 날을 먹었어도 없어지지 않게 하고 그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을 다시 살려 주었다(왕상17:8-24) (4) 아합왕 때에 왕과 백성이 바알우상과 아세라우상을 숭배함으로 견책하고 아합왕에게 참신과 거짓 신을 가려내자 하여 바알선지 4백명과 아세라의 선지 4백5십명을 데리고 갈멜산에 올라가 송아지로 재물을 삼고 각기 자기의 신에게 기도하여 불로 응답함을 보자하여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 850명이 정오가 지나도록 외쳤으나 응답이 없고 엘리야가 여호와한테 부르짖을 때 불이 내려와 제물과 도랑의 물까지 모두 태워 버렸다. 즉시 백성들을 시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 850명을 기손 시내로 끌고 내려가 모두 죽였다.(왕상18:19-40) (5) 왕후 이세벨이 이 소식을 듣고 엘리야를 죽이려하므로 주의 천사가 어루만지고 식물을 주고 호렙 산굴에 있을 때는 여호와가 강한 바람과 지진과 작은 소리의 세가지로 보이시고 명령하시기를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왕이 되게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대신 선지자가 되게하라 하셨다(왕상19:1-6) (6) 농부 엘리사가 경작하고 있을때 자기 겉 옷을 던져 따라오게 하였다 (왕상 19:19-21) (7) 아합이 나봇을 돌로 쳐 죽이고 포도원을 뺏었을 때 왕 앞에 나타나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으리라 하였다(왕상21:17-19) (8) 이스라엘왕 아하시야가 사자 50명씩 두번 보내어 오라 하는 것을 천화로 사루게 하고 세번째에야 가서 왕이 죽을 것을 예언했다 (왕하01:9-16) (9) 승천하게 되어 엘리사에게 세번이나 작별 인사를 하였으나 떠나지 않으므로 무엇을 구하느냐 물으니 당신의 영감을 배나 원한다 하므로 내가 승천하는 것을 보면 성취하리라 하고 겉옷을 떨어 뜨리고 홀연히 불 수레와 불말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을 타고 승천하였다 (왕하02:1-11) (10) 그의 심정과 재능이 세례 요한과 비슷하다 하였다(눅01:17) (11) 예수님이 변화하실 때에 모세와 같이 나타나서 주님과 말씀하셨다 (마17:3) (12) 야고보는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하여 주신다고 엘리야을 비유로 권면하였다(약05:17) *그는 험상한 모습과 탈속한 옷차림,비호같이 빠른 걸음, 기근도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건장한 모습, 굴에서도 살수있는 억센 습관이 그의 특색이었다. 여호와 신의 예배에 절대적인 선지자였고 국가 운명에 대하여 예민한 통찰과 염려를 한 애국적인 인물이며 구약 선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2] 베냐민의 족장(대상08:7) [3] 레위사람(대상23:19, (대상24:23) ======== 엘리야 Eliah. [Eli'ah] 1. Son of Jeroham, and one of the heads of the tribe of Benjamin. 1 Chr. 8:27. (대상08: 여로함의 아들 2. One who had married a strange wife. Ezra 10:26. (스10: 엘람 자손 ======== Elias. [Eli'as] The Greek form of ELIJAH, q.v. --- Morrish Bible Dictionary ======== Elijah. [Eli'jah] Priest who had married a strange wife. Ezra 10:21. (스10: --- Morrish Bible Dictionary -------------------------------------------------------------------------------- 엘리야의 생애 1. 엘리야의 등장 (왕상 17;1) 엘리야선지는 오므리 왕자의 아합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요단 북편에있 는 길르앗(Gilead) 지방의 디셉에서 등장하여 아합에게 수년동안 가품이있을 것을 경고하였다. 2. 그릿시냇가에서 (왕상 17:2-7) 아합에게 가뭄이 있을 것을 경고한 후 엘리야선지는 하나님의 명대로 아합을 피해 요단강 앞 그릿시냇가로 가서 숨고 까마귀들이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고 시냇물을 마셨으니 계속된 가뭄자므로 시냇물이 말라 더 이상 마시지 못하였다. * 그릿시냇가 (Cherith brook):그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론은 없으나 중세시대에는 요단 동편 길갈 근처로 현재의 와디켈트(Wadi Qekt) 로 생각 했고 오늘날의 대부분 학자들은 엘리야의 고향에 있는 여러 강줄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마 성서에 언급된 요단 앞과 그 내용전개를 보면 디셉에서 그리 멀지 아니한 요단강 근처의 한 조그마한 와디(Wadi) 강줄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3. 사르밧에서 과부의 공궤를 받음(왕상 17:8-24) 그릿시냇물이 마르자 하나님의 명대로 시돈지역에 속한 사르밧 (두로와시 돈의 중간지점)으로 올라갔다. 그가 사르밧의 성문에 이를 때에 아들과 같이 떡 하나를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하는 과부를 만나 그 떡을 자신이 먼저 먹은 다음 그 과부의 집에 가뭄이 마칠 때까지 기름과 밀가루가 부족하지 않을 만큼 먹을 수 있는 기적을 베풀어 주었다. 이일 후 하루는 그 과부의 아들이 병으로 죽자 엘리야는 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린후 하나님께 기도하여 낫게 하였다. 사르밧에서 3년을 지낸후에 엘리야는 가뭄이 끝날 것을 아합에게 고하기 위하여 사마리아로 내려가는 궁내대신 오바다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오바댜는 엘리야로 아합에게 안 가기를 청하였으나 엘리야는만나기를 맹세했고 이에 오바댜가 할수없이 아합에게 엘리야를 고했다. 아합은 나가 엘리야 앞에 이르고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신과의 대결을 갈멜산에서 갖기로 제의하였다. 4. 갈멜산의 대결 (왕상 18: 19-46) 엘리야선지의 제의를 수락한 아합은 바알선지 450명과 아세라 선지 400명을 갈멜산으로 나오게 하였다. 마침내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 850명 은 제단을 쌓아놓고 불의 임함으로 대결을 시작하였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먼저 단을 쌓고 제물을 올려 놓고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며 부르짖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자 단 주위에서 뛰어 놀았고 이에 오정쯤 되어 엘리야는 저들에게 "너희 신이 묵상하고 있는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길을 가는지 아니면 잠이 들었는지 모르니 큰 소리로 부르라"고 조롱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더 큰 소리로 부르며 자신들의 규레대로 창과 칼로자해하여 피를 흐르게 하며 부르짖었으나 저녁 때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에 엘리야는 주위의 모든 백성들을 모이게 하고 돌로 여호와의 단을 쌓고 주위에 도랑을 만들고 송아지로 각을 떠서 제단의 나무위에 놓았다. 그리고 물을 가져다가 번제물과 나무위에 여러번 갖다부어 도랑에 물이 가득하게 될 때까지 분 다음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여호와여 내게 응답 하소서"하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까지 태우고 도랑의 물도 다 마르게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외쳤고 엘리야의 명령대로 바알과 아세라선지자를 잡아 기손시내로 데려다가 모두 죽였다. 그리고 나서 엘리야는 아합에게 비가 올 것을 알려 주었고 강이 범람하기 전에 마차를 탸고 내려가라고 말하였다. 이 말과 동시에 큰 비가 내렸고 아합은 속히 서둘러 이스라엘로 갔다. 이때 엘리야는 이스르엘 입구까지 아합왕 앞에 행하였다. 5. 이세벧을 피해 브엘세바로(왕상 19:1-3) 이세벧은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를 갈멜산에서 죽인 것을 알고 사자를 보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 소식을 엘리야가 듣고 그곳을 피해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자기 사람과 함께 갔다. 6. 로뎀나무에서의 통곡(왕상 19:4-7) 이세벧을 피해 브엘세바로 온 엘리야는 자기 사람을 그곳에 놓고 다시남으로 하룻길을 걸어 한 로뎀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 죽기를간 구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천사가 와서 깨운 후 숯불에 구운떡과 물을 먹고다시 잠이 든 후 천사에 의해 일어나 다시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7. 호렙산으로 (왕상 19:8-18) 로뎀나무 아래서 천사가 가져다 준 음식을 먹고 힘을 얻는 엘리야는 40일을 행하여 하나님의 산호헵산에 가서 한 굴에 거하였다. 그곳에서 "다메섹의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에게 각각 기름을 부어 아람왕과 이스라엘의 왕과 자신의 후게자로 세우라는 명을 받았다. 8. 엘리사를 만남 (왕상:19:19-21) 호렙산에서 명을 받은대로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아벧므홀라에서 열 두겨리의 소로 밭을 갈고 있는 엘리사를 만나 자기 겉옷을 던져 자기를 따라오 게 하였으며 엘리사는 이때부터 엘리야는 따라 다니며 그의 수종을 들었다. 9. 나봇의 포도밭 사건으로 아합이 죽을 것을 예고함(왕상 21:1-26)엘리야가 엘리사를 만난 후 아합은 아람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부친(오므리) 이 빼앗겼던 성읍을 도로 찾았다. 이일후 아합은 자기궁 가까이에있는 나봇의 포도밭을 사는데 실패하자 근심하다가 왕후인 이세벧의 모략으로 돌로 쳐 죽인후 그 포도밭을 차지하였다. 이 일을 엘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아합 앞에 나가 그가 죽어 그 피를나봇이 죽은 곳에서 개들이 핥을 것을 예고하였다. 이에 아합은 잘못을 뉘우치고 옷을 찢고 금식하며 행보를 천천히하며 겸손하자 하나님은 그 재앙을 아들의 시대에 내리게 하셨다. 그리고 아합이 아람을 물리쳐 승리한 후 3년째에 아합은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연합군을 조직하여 아람의 길르앗 라못을 치러 올라갔다. 이 싸움에서 아합은 부상을 당해 저녁에 죽어 사마리아에 장사되었고 그 병거는 사마리아의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에 부으니 개들이 그 피를 핥았다. 10. 아하시야에게 경고함(왕하1:1-4) 사마리아에서 여호사박 17년에 즉위한 아하시야왕은 통치기간 중 악행과 바알신 숭배와 그 아비의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통치말년 그가 다락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을 때 에글론 신에게 치료 유무를 알아보기 위해사자를 보냈는데 엘리야를 통해 침상에서 죽을 것을 보고 받고 오십부장 50인을 엘리야가 보냈으나 불에 타서 죽었다. 이에 다시 오십부장 50인을 보냈으나 마찬지로 불에 타죽었고 세번째로 보낸 오십부장 50인들은 간절히생명을 간구하매 죽지 않고 엘리야와 함께 왕에게 갔다. 왕 앞에서 엘리야는 말하기를 "네가 바알세불에게 물으려 하니 이스라엘에 그 말을 물을 만한 하나님이 없음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찌라"고 하였고 그 말대로 아하시야는 죽고 그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었다. 11. 엘리사와 함께 승천 직전의 노정(왕하2:1-5) 아사히야가 죽고 여호람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때 엘리야선지는 하나님이 명령대로 길갈로 갔으며 그곳에서 엘리사를 머물게 하고자 했으나 엘리사는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리고 난후 엘리야는 벧엘과 여리고로 갔고 그때마다 엘리사를 떼어 놓으려고 하였다. 12. 엘리야의 승천(왕하2:6-11) 여리고에서 요단을 건넌후 곧 승천하기를 앞둔 엘리야선지는 엘리사에게 구할 것을 말하라고 하였고 이에 엘리사는 스승이 가졌던 영감의 갑절을 구했다. 그리고 난 후 엘리야는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이 내려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고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취하였다. -------------------------------------------------------------------------------- 이스라엘 선지자-- 이방종교 [바알] 추방 큰공 아합의 왕권과 정면대결한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빈자의 상징이었던 털옷을 어깨에 걸치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다니면서 바알숭배와 아세라 경배 타도를 부르짖었다(왕하 1:1-8). 이스라엘 왕 아합이 바알의 사당을 건축하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을 때 그는 왕앞에 나타나 바알숭배의 대가로 이스라엘 땅에 수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예언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 17:1절). 그후 엘리야는 왕의 박해를 피하여 요단 동편에 있는 그릿 시냇가에 몸을 숨겼으며 여호와께서는 매일 그에게 까마귀를 통하여 떡과 고기를 공급하게 하셨다(왕상 17:2-7). 계속 땅에 비가 없으므로 시내가 말라 버리자 엘리야는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서 한 과부가 공궤하는 떡과 물을 먹고 마시므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왕상 17:8-16). 엘리야의 절정적 사역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백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백명과 대결하여 승리한 일이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 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 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 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 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 18:38-40). 엘리야의 능력의 기도는 3년6개월간 가뭄이 계속되던 땅에 단비를 내리게 했으며 그리고 아합과 이세벨의 학살령을 피하며 호렙산 동굴에 은둔하고 있을때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⑴ 예후를 세워 종교개혁을 단행케 함으로 바알숭배를 청산했으며 ⑵아람왕 하사엘을 통하여 아합의 왕조를 진멸케 했고 ⑶엘리사를 후계자로 삼아 이스라엘의 회복과 신앙부흥을 일으키게 했다. 이 과업을 끝낸후 그는 제자가 지켜 보는 가운데 불말과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다(왕상 19:15 -21, 왕하 2:11). -------------------------------------------------------------------------------- 갈멜산(Mount Carmel)에서 우상숭배자 85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함 성경:열왕기상 17∼18장 엘리야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다. 엘리야는 길르앗의 디셉 사람이며 큰 선지자였다.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이며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는 것이 특징이었다. 엘리야는 순수하면서도 엄격하고 조용하면서도 담대한 사람이었다. 아합왕의 죄로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않을 것을 선포하고 그릿 시냇가에 은신하며 까마귀의 도움으로 생존하였다. 그후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기적으로 살았고 죽은 아들을 소생시키기도 하였다. 엘리야의 큰 헌신은 3년후 오바댜를 통해 아합을 만나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4백50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4백인을 갈멜산에 모아 모든 백성 앞에서 참 신을 분별하도록 제안하였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규례대로 몸을 상하며 바알을 불렀으나 실패했다. 저녁 때에 엘리야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고 열두지파를 위해 열두 돌을 취하였으며 열두 통의 물을 붓고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심과 종이 주의 종인 것과 이 일이 주의 일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할 때 불로 응답하셨다. 결국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기손강에서 살해되었다. 그후 흡족한 비가 허락되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하사엘과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한 후 요단강 동쪽에서 불 말과 불 수레를 타고 승천 하였다. ▷교훈과 적용◁ 첫째, 엘리야는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의 모범을 보인 사람이다. 환경과 상황을 초월한 순종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자. 둘째,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위임할 때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다. 참된 충성은 하나님의 큰 손이 함께하신다. -------------------------------------------------------------------------------- 최후의 하나님의 권고(왕상 17 - 22장) 이스라엘은 특별한 나라였습니다. 곧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점에서 아주 특이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국가 자체가 하나님을 위한 종교기관입니다. 곧 종교와 국가가 분리될 수 없는 혼연일체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러한 요소는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의 국가는 종교와 국가와는 서로 다른 위치와 이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돕는 다든지, 적대관계가 되든지 하는 관계가 형성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유 국가들에게서는 종교를 인정하고 서로 독립한 가운데서 돕고 있습니다. 반면에 공산국가에서는 적대시하고 탄압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철두철미하게 종교가 곧 국가요 국가가 곧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왕으로부터 제사장 그리고 모든 백성들에게 이르기까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고 섬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가 유지를 위한 헌법이란게 따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율법이 곧 국가의 헌법입니다. 그리고 왕의 위치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시기 위한 대리자였으며, 제사장은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해 주는 중보자였습니다. 선지자는 혹 왕이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방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파숫군이었습니다. 따라서 왕이 올바른 통치를 하지 못한다든지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자기 직무를 다하지 못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자해져서 부패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참된 모습들도 상실해 버리게 됩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백성들을 위하여 세워진 직분자들의 위치는 아주 막중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 하나가 잘못될 때 파급되는 악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얻어 당시에 유력한 통치자로 세인들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정략적으로 이웃 나라들과 맺은 정략결 혼으로 말미암아 이방신들이 이스라엘 안으로 들어오게 되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이 이방신들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기도 하며, 하나님만을 섬기는데 있어서 등한시 하게 되었고 우상숭배나 하나님 숭배나 별반 다른게 없다라고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세워진 이스라엘 국가 자체의 설립 의도가 무너지게 되며 이스라엘이라는 독특한 존재 이유마저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왕 한 사람의 실수가 나라 전체를 무의미하게 타락시킬 수가 있었기에 모세는 신명기에서 왕제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사무엘 역시 경고를 했던 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왕을 택하셔서 왕제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불합리한 모습의 실례를 보여주시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이스라엘의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릴 것을 우려하신 하나님은 여로보암을 택하시어 10지파를 갈라 북 이스라엘왕국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견고한 집을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왕상 11:30). 그러나 여로보암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금송아지로 바꾸어 섬길 뿐만 아니라 전 백성들도 그와 함께 경배하도록 종용하였고 따라서 하나님은 그를 폐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이은 이스라엘의 왕들도 역시 여로보암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에 계속된 찬탈과 반목의 역사가 지속됩니다. 이런 참혹한 상태에서 강력하게 왕권을 쥔 사람이 오므리였습니다. 오므리는 국방을 튼튼히 하고 자신의 왕권을 강력하게 세워나갔으므로 당시 주변 국가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될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 강대국가였던 앗시리아에까지도 오므리의 명성이 들릴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오므리는 외적으로 아주 강력한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로보암의 정책과 별반 다른 점이 없었으며 특히 북방의 두로와 시돈과 화친정책을 썼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는 아람이 이스라엘에 대한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었는데 아람 배후에 있는 두로와 시돈과 화친을 맺음으로 아람이 쉽게 이스라엘을 침공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화친정책으로 오므리는 아들 아합을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시켰습니다. 그리고 아합은 오므리를 이어 북 이스라엘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 아합에 대해 성경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 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산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16:30-33)고 기록합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앞날이 결정적인 변화를 갖게 됩니다. 곧 이전의 왕들은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의 형상을 바꾸어 섬겼습니다. 그러나 아합시대에 와서는 아예 여호와에 대한 어떤 종교 행사도 하 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철저하게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제거하고, 오히려 바알과 아세라를 위한 제사장을 세우며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떠나 바알과 아세라에게 경배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도의 시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전 모든 왕보다 아합이 악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당시의 상황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버리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의 영적 상태를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기록이 곧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 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16:34)는 말씀입니다. 여리고성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최초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점령했던 곳입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었습니다(수 6:26). 그런데도 불구하고 히엘이 여리고성을 재건하던 중 그 아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리고성을 쌓고 있음을 볼 때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대가 여호와의 말씀을 떠나 깊은 어둠에 빠지게 된 것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에 깊이 빠진 결과였으며 바로 이러한 일이 아합과 이세벨에 의해 자행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나라로 세움을 받은 이스라엘이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을 떠나 버리고 배역해버린 상태에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선지자로 세 움을 받은 이가 곧 엘리야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엘리야는 아합을 찾아가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 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17:1)고 선포 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떠나고 바알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기근이 선포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근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약속의 땅에서의 전쟁이나 기근은 곧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레위기 26장 참조). 그후 과연 3년 6개월간 이스라엘 지방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그러자 속이 탄 아합이 엘리야를 찾아 나섭니다. 엘리야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선지자들을 이세벨의 박해 가운데서도 보살펴 준 군대장관 오바댜를 통해 아합을 만납니다. 엘리야를 본 아합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18:17)고 하자 엘리야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18:18)고 지적하면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 명을 모아 갈멜산에서 누가 진정한 하나님인가를 드러내도록 대결을 하자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과 선지자들이 갈멜산에 모이게 되 었습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 를 좇을지니라"(18:21)고 신앙의 촉구를 합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떠나 바알과 아세라에 길들여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입니다. 먼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준비해 놓은 제물을 태우도록 하였습니다만 저녁이 다 되도록 아무런 응답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 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 하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18:36-37)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늘로서 불이 내려와 번제물을 태우고 모든 백성이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18:39)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잡아 기손강에서 처단합니다. 이 대결의 목적은 누가 진정한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의 통치자이신 것을 밝히고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신앙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 비가 내려 그간의 기근이 종식됩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이세벨은 아직도 의기양양해서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40일간의 광야길을 걸어 시내산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선 엘리야는 하늘로서 불이 내리는 증거를 목도한 이스라엘이 아직도 신앙으로 바로 서지 못하고 여전히 이세벨의 눈치를 보는 연약하고 패역한 모습을 심판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고 강한 권능이 개입하셔서 과연 하나님이야말로 온 우주의 왕이시며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이신 것을 나타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 가운데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세미한 소리 가운데 앨리야에게 응답하십니다. 먼저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으로 삼고, 이스 라엘의 왕으로는 예후를 기름붓고, 선지자로서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19:17)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배도한 이스라엘 위에 커다란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 후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19:18)고 하시면서 특별히 주를 위해 남은 자를 남기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어느 시대나 그의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모두가다 바알 앞에 무릎을 꿇을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만은 특별한 섭리와 보 호 아래 그들의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도록 돌보아 주시는 법입니다. 믿음을 지키기가 힘이 들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하나님 의 백성들은 결코 그러한 상황이나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자기들의 신앙을 지켜나갑니다. 비록 생명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박해가 심하고 믿음을 지키기가 고달프다해서 배신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세상을 더 불쌍히 여기고 위하여 기도하며 연약한 성도들이 신앙을 잃지 않도록 위해 기도하며 힘씁니다. 엘리야 시대에도 모든 사람 들이 다 하나님을 떠난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순전한 7천명의 성도들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라도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그러므로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라도 정당화시킬 수 없습니다. 성도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법입니다.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악했느냐 하는 것은 나봇의 포도원을 이세벨이 탈취하는 사건에서도 잘 나타납니다(21장). 나봇의 포도원은 기업으로 주어진 땅입니다. 한 번 기업으로 주어진 땅은 결코 팔 수도 없었으며다른 이에게 어떤 이유에서라도 명의 변경이 되질 않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그 땅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된 이스라엘에게 값없이 기업으로 주신 땅이기 때문에 사거나 팔 수 없었습니다. 혹시 팔았다 하더라도희년까지의 남은 햇수를 계산하여 값을 치루되 희년이 되면 원 소유자에게 돌려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나봇이 기업으로 받은 땅을 차지하려고 했고 이세벨은 악한 수법으로 나봇을 죽이고 차지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계율을 어긴 아합에게 "네가 죽 이고 또 빼앗았느냐"(21:19)고 하시면서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21:19)고 저주하셨습니다. 참으로 그 시대는 불법이 난무하는 시대요 공의가 잠자는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과연 이러한 나라를 하나님은 어떻게 처리하실까요? -------------------------------------------------------------------------------- 엘리야 / 신앙 등진 민족에 눈물의 채찍을 들다 엘리야가 선지자로 활동했던 시대는 북조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무섭게 타락한 시대였다.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이 아합과 결혼하여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종교를 끌어들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시대였다. 왕실에서부터 우상종교를 장려하고 우상숭배를 강요하므로 온 나라가 영적으로 패역한 때였다.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850명이나 있을 정도였다. 궁궐에 머무르는 우상종교의 선지자가 이렇게 많았다면 모든 예식이나 의식이나 궐내 행사에 이들의 활동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을 것이다. 정치와 내정까지도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에 대항하고 이들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엘리야는 이 일을 맡아 북조 이스라엘을 구해내는데 결정적인 사명을 감당한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께 소명된 사역자들은 어느 시대나 헌신과 사역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 개인의 사명에 따르는 수고와 희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엘리야 시대와 같은 상황은 특히 아주 불리하고 힘든 시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엘리야는 자기의 책임을 다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엘리야의 개인적인 결단이나 하나님께 대한 순종심을 우리도 꼭 배워야 하겠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자기 사역이나 사명을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맡겨주시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사역의 노정을 따를 뿐이다. 택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일을 맡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예언자의 사역도 평생의 과정 속에 포함된 사역의 일부분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맡겨지는 사역에 얼마나 충성되고 성실한가이다. 또한 예언자로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메시지나 요청되는 헌신에 대해 자기와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하겠다. 이런 부분이 엘리야가 보여준 좋은 모범이다. 엘리야는 종교적으로 그렇게 삼엄한 분위기를 무릅쓰고 아합과 이세벨 앞에 두 차례나 나아가 대면하여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그들의 죄를 지적하였다. 이는 엘리야의 개인적인 용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신 영적 담력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된 마음과 성령이 임재하는 영감이 함께 할 때 엘리야와 같은 헌신이 우리에게도 가능하다. 우리가 깊은 기도를 드릴 때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하나님의 영감에 이끌리는 경우를 경험한다. 또 나와 함께 하고 계신 성령의 임재를 너무 분명하게 느끼지 않는가. 이와 같이 성령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하겠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년동안 우로가 없으리라”고 선언하였고 3년 후에 다시 아합에게 나아가 바알의 선지자들과 백성들을 산에 모으게 하고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 참신을 분별하게 하였다. 두 제물을 끌어오게 하고 그 중에 하나를 택하여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이 붙게 하는 신이 참신이라고 백성 앞에 공포하고 그들과 영적 전쟁을 벌인 것이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먼저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을 불러 불이 내리기를 기도했으나 그들은 실패했다. 다급해진 그들은 자해행위를 통해 몸에서 피를 보이면서까지 간절히 부르짖었으나 응답이 없었다. 결국 이들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그 뒤에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대신하여 열두 돌로 제단을 쌓았다. 이는 북조 이스라엘에서 진행되는 사건이었으나 엘리야의 마음에는 남북조를 포함하여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회개의 제단을 삼은 것이다. 그 주위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파고 돌 위에 나무를 놓고 그 위에 각을 뜬 제물을 올려놓았다. 불로 응답받아야 하는 제단인데 제물과 나무 위에 12통의 물을 부어서 도랑까지 물이 가득하게 되었다(왕상18:23∼35). 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왕과 이세벨과 백성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엘리야의 강한 신앙의 표현이었다. 또한 엘리야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의 고백이었다. 아합왕이나 백성들은 이러한 엘리야의 담대한 신앙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엘리야의 간절한 신앙은 벌써 하나님 응답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우리는 반드시 신앙을 가져야 한다. 다음 단계는 신앙을 소유한 사람으로 그치지 말고 신앙이 몸과 마음을 지배하도록 신앙에 이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날마다 모든 일에 일일이 신앙을 적용하는 생활이 중요하다. 이런 면에서 엘리야의 사건은 우리에게 좋은 시범을 보여준 실례이다. 이 현장의 엘리야를 상상해보자. 바알의 선지자들에 대해서는 분노에 찬 의분이 가득했을 것이고 남북조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또 다른 감정,마음의 눈물을 흘리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용서해주도록 도고하는 간절함이 함께 했을 것이다. 여기서 그 시대와 모든 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대표적인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는 엘리야의 헌신을 볼 수 있다. 선지자나 예언자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책임지려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엘리야를 본받아야 하겠다. 이때에 엘리야가 드린 기도에 주목해보자. 엘리야는 세 가지 조건을 분명히 밝히고 기도 드렸다. 첫째는 주께서 하나님이 되심을 보여달라는 기도였고,둘째는 내가 주의 종이 됨과 셋째는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일을 행함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이 기도에 하나님이 불로 응답하셨다(왕상 18:36∼38). 엘리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였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일하고 계신 사실을 증명하는 기도였다. 이러한 엘리야의 기도의 태도는 갈멜산의 사건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응답받기 원하는 기도에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 욕심으로 기도하거나 정욕으로 구하는 것을 하나님은 금하셨다(약 4: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자. 자녀를 위한 기도도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자. 부모나 부부간의 기도도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자. 우리 기도가 훨씬 담대해지고 하나님편에 서는 기도가 된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정확한 기도를 드리는 비결이 된다. 자기 중심을 뛰어넘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영적 체험을 경험하게 된다. 엘리야의 기도는 기도에 대한 영적 원리이다. 이 원리를 따르면 기도의 내용이 정리되고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속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돼 있기도 하다. 우리의 기도를 점검해보자. 엘리야는 육신의 죽음을 거치지 않고 승천,또 하나의 큰 교훈을 남겨주었다. 구약의 에녹과 엘리야는 육신의 죽음을 거치지 않고 변화받아 영계로 옮겨갔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 의인의 부활과 살아있는 성도 중에 준비된 성도의 휴거도 있다(살전 4:16∼17). 엘리야는 이 휴거에 대한 실례를 보여 준 사람이다.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휴거를 믿을 수 있게 한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이다. 하나님의 넓은 섭리를 헤아려보자. 이병돈 <서울 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엘리야를 통해 얻는 교훈과 적용> 엘리야의 담대한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하고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자기 신앙을 밝혔다. 요즘 교회에 출석하는 많은 성도 중에 사람들 앞에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엘리야의 모습과 이렇게 숨어서 믿으려는 사람들을 비교해볼 때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믿음을 자랑하고 신앙생활을 간증하며 살아야 하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한다. 오늘 내용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엘리야가 비를 주시라고 기도할 때의 땅에 꿇어 엎드렸고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했다고 소개하고 있다(왕상 18:42). 이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를 배우자. 한번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최선의 정성을 기울이는 믿음의 기도를 드려보자. 이러한 기도를 왜 하나님이 외면하시겠는가. 기도에도 정성과 양적인 분량이 있다. 진지하고 진실한 기도를 드려보자. ======== ▶ Elijah. [Eli'jah] This remarkable prophet is introduced abruptly in scripture in the midst of the apostasy of the kingdom of Israel, which was brought to a head in the reign of Ahab. The object of his ministry was to recover the people to the God they had forsaken. This will explain the miraculous displays accompanying his testimony, by which the people were left without excuse. It may be noted however that the miracles had a judicial character. He shut heaven that it did not rain, and he called fire down on the captains and their fifties. They were intended to recall the people to their allegiance and responsibility to God. He is called "Elijah the Tishbite who was of the inhabitants of Gilead" (1 Kings 17:1), and with no further introduction he delivered a message to Ahab of fearful import to Israel, that there should be no rain or dew these years but according to his word. In the Epistle of James we learn that what was pronounced so boldly in public was the outcome of inward exercise and earnest prayer. He forthwith retired from the public eye, and was miraculously cared for at the brook Cherith, being fed with bread and flesh morning and evening by ravens. The brook at length becoming dry, he went to Zarephath belonging to Zidon at the commandment of the Lord, where he lodged with a poor widow, whose faith was tested at the outset by the prophet's request that she should provide for his need first from her slender store of meal and oil, on the assurance of the Lord God of Israel that her barrel of meal and cruse of oil should not waste till He sent rain on the earth. She was further tested by the death of her son, upon which the power of God in resurrection was taught her through the instrumentality of the prophet. The soul of the child came again into him and he revived. This widow is referred to in Luke's Gospel along with the case of Naaman the Syrian, as illustrating the abounding of the grace of God beyond the limits of Israel. 1 Kings 17. In the third year the time had at length arrived for the rights of Jehovah to be vindicated before all Israel, to the confusion of the followers of Baal. Elijah under the full direction of the Lord came forth from his mysterious retreat, and showed himself to Obadiah, the governor of Ahab's house, who was engaged in searching the land for provender. This man, though in such apostate surroundings, was truly pious, and had befriended Jehovah's prophets when Jezebel had sought to slay them. Assured by Elijah that he was ready to show himself to Ahab (though this latter had in vain sought him in many kingdoms to wreak vengeance on him for the prolonged drought), he reported Elijah's appearance, and the prophet and king were soon face to face. Charged with troubling Israel, the prophet in the power of God rejoined that the guilt of this lay on Ahab and on his house, in forsaking Jehovah for Baal. He directed him to call all the prophets of Baal together to mount Carmel, and there before the assembled throng of Israel he stood alone for God. Nothing can exceed the interest of this moment when the question raised was whether Jehovah or Baal was the God. Sustained by the mighty power of Jehovah, His faithful servant directed everything. The issue is presented: the prophets of Baal offered their sacrifice, and from morning till noon in vain implored the intervention of their god. There was no voice nor any that regarded. Their failure being patent to all, Elijah then invited the people to draw near. He repaired Jehovah's altar that was broken down, building it of twelve stones, according to the number of the tribes of Israel, he offered his sacrifice, deluged three times with water the altar, wood, and victim, till the trench around the altar was full; then offered up in the hearing of Israel an affecting prayer to the "Jehovah God of Abraham, Isaac, and of Israel," upon which the fire of the Lord fell, and all was consumed, the sacrifice, wood, stones, dust, and water. "Jehovah, He is the God" was the twice repeated cry of Israel in view of these things; and, controlled by the power of God in the prophet, they, at his bidding, seized the prophets of Baal, who were to a man slain by him. Upon this he told Ahab that there was a sound of abundance of rain, while he himself retired to the top of Carmel to note the first indications of the approaching blessing; and then, still in the power of God, he ran before Ahab's chariot to the entrance of Jezreel. 1 Kings 18. Jezebel let him know that her vengeance was at hand; and at the threat of this terrible woman, the prophet, lately so bold, fled the country. We now see Elijah in the wilderness, a weak and timid man, weary of the conflict, occupied with himself rather than the Lord, and asking to be allowed to die. Sustained by miraculous food, he went in the strength of it for forty days and nights to Horeb, the mount of God. Here the Lord dealt most graciously with his poor and feeble servant, who is found pleading his own jealousy for God while interceding against Israel. Wind, earthquake, and fire would have well suited the prophet in his frame of mind, but the still small voice was that of the Lord, and Elijah had to learn that He had not given up His people. He had yet 7000 whose knees had not bowed to Baal. But Elijah was to anoint Hazael to be king over Syria, Jehu to be king over Israel, and Elisha to be prophet in his room. Judgement should be executed where necessary and by instruments prepared of God. Elijah thereupon departed, and finding Elisha threw upon him his mantle. 1 Kings 29. For a time Elijah was in retirement, but he again reappeared on the occasion of Naboth's murder, and with the old energy of faith prophetically announced the doom of Ahab and Jezebel to Ahab's face. Once more the prophet is seen, confronting Ahab's successor and son Ahaziah, who, following closely in his parents' steps, had sent messengers to Baalzebub the god of Ekron to inquire whether he should recover from his sickness. Two captains and their fifties, who had been sent to arrest him, were smitten with fire from heaven at Elijah's word. Accompanying the third, who humbly begged for their lives, the prophet announced to the apostate king the judgement of the God he had despised. 1 Kings 21; 2 Kings 1. We have now reached the closing scene of this truly remarkable man's long and faithful service for Jehovah. The ordinary lot of man should not be his. Traversing in the close company of Elisha the spots which, however now perverted, told of certain great truths — Gilgal, of the necessity of the judgement of self, the place of circumcision — Bethel, of the faithfulness of God and the resources which are His for His own, the place where God had appeared to Jacob — Jericho, of the power of God as against all that of the enemy — they reached the Jordan through which they passed dry shod, the waters being separated hither and thither by Elijah smiting them with his mantle. The land of Israel is left by the well-known figure of death, "and it came to pass, that as they still went on and talked, that, behold, there appeared a chariot of fire and horses of fire, and parted them both asunder; and Elijah went up by a whirlwind into heaven." Figuratively he had passed through death, and ascended to heaven: this forms the basis of Elisha's ministry. 2 Kings 2. In the N.T. John the Baptist was in the character of Elijah as the prophet who was to come before "the great and terrible day of the Lord," to affect the hearts of the people, if he had been received; but not being received, except by a few, John declared to the Jews that he was not Elijah. So it remains for Elijah's ministry to be fulfilled ere Christ appears in glory. Mal. 4:5, 6; Matt. 11:14; Luke 1:17; John 1:21. (말04:5-6 (마11: (눅01: (요01: Moses and Elijah were seen on the mount of transfiguration, as representatives of the law and the prophets; but theirs was then a subordinate place, for the proclamation was "This is my beloved Son; hear him." Matt. 17:3; Mark 9: 4; Luke 9: 30. Elijah's testimony was given in righteousness: his ministry demanded that the righteous claims of God as the Jehovah of His people should be satisfied. Elisha's ministry differed from this, and was more of grace. (마17: (막09: (눅09: --- Morrish Bible Dictionary
3 골리앗(Goliath)
인물
jesus
3093 11 2006-12-26
▶ 골리앗(Goliath) 뜻:방랑자 엘라 골짜기에서 이스라엘과 대진할 때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블레셋의 거인 장수(삼상17:4). ▶ 골리앗/“지나친 과신으로 죽음 자초” 불신앙인으로 주님께 대적하다 심판/인간 완력 의지할것 못돼… 겸손 일깨워 골리앗은 「유랑자」라는 뜻이다. 키가 6규빗(2백90㎝)이나 되는 체구가 건장한 거인이었다.그 머리에는 놋투구를 썼고 어린갑을 입었는데 갑옷의 무게가 놋 5천세겔(약 1백96㎏)이었다고 한다.그가 가졌던 창자루가 베틀채 같다고 하였으며 놋 단창을 겸하여 메는 장사였다. 골리앗은 가드사람으로 블레셋 군대의 대장이었다.블레셋은 골리앗을 앞세우고 이스라엘에 전쟁을 걸었다.그런데 그 전쟁방식이 군대를 동원하는 전투가 아니라 한 사람을 뽑아 일대 일로 싸워 전쟁의 승부를 판가름하자는 것이었다. 이때에 이스라엘중에서는 아무도 대답이나 응수하는 자가 없었다. 때마침 다윗이 전쟁터에 있는 형들을 보려고 왔다가 이 사실을 목격하고 분개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할례없는 이방백성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였다고 사울에게 나아가 골리앗과 싸울 것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게 된다. 그는 평소와 같이 손에 막대기를 가졌고 매끄러운 돌 다섯개를 골라 주머니에 넣고 나아가 골리앗을 쳐 이기게 되었다.골리앗은 자신의 힘과 체구를 지나치게 믿고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가소롭게 여겼으나 결과는 골리앗의 죽음으로 끝났다. 블레셋 군대의 대장이었다면 장사라는 조건 한 가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그에게 지략이나 전술이나 많은 전쟁의 경험을 가진자였는데 보잘것 없이 무너졌다.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 ▷교훈과 적용◁ 첫째,인간의 힘이나 완력은 의지할 조건이 못된다.힘을 믿고 살다가 실패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둘째,골리앗은 불신앙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심판되었다.하나님께 겸손하자. <이병돈목사·은평교회>
2 에서(Esau)
인물
jesus
4596 8 2006-12-27
▶ 에서(Esau) 뜻 : 털이 많다 이삭(Isaac)의 처 리브가가 낳은 쌍동아이중의 큰 아들로서 그 별명은 에돔이다. 그는 어려서 부터 사냥을 좋아하여 그 사냥한 고기로 부친 이삭을 기쁘게 하였다. 사냥에서 배고파 돌아올 때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겨 팥죽 한 그릇에 동생 야곱에게 팔았다(창25:24-34). 부친 이삭이 축복하여 주려는 장자의 복을 야곱에게 빼앗기고 분노하여 야곱을 죽이려 하였으나 야곱이 알고 도망하여 죽이지 못하였다(창27:41-44) 20년 만에 만나 화목하고 세일산 부근에 이주하여 그 자손이 크게 번창하니 곧 에돔 족속이다(창35:5). ------------------------------------------------------------------ 에서 (Esau) 창세기 27장1∼27절 에서라는 뜻은 털이 많다는 뜻입니다. 에서는 야곱과 함께 태어난 쌍둥이였는데 먼저 출산되어 형이 되었습니다. 에서는 몸이 붉고 털이 많아 그 피부가 갖옷 같았습니다. 또한 야곱의 간계에 말려들어 붉은 것을 먹었다 하여 그의 별명이 에돔이 되었습니다(창25:30) 이 별명은 단순한 그 개인의 호칭으로 끝나지 않고 그 후손이 에돔족이 되는 에돔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창36:9). 에서의 후손 에돔족은 세일지역에서 창대하게 번성하였으며 그 지역의 원주민이 되었습니다(신01:8, 9, 19). 그러므로 세일산을 에서의 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욥01:1, 9, 19). 에서의 인간됨은 남자답고 단순하며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외모와 속성에 어울리는 활동적인 사람이며 사냥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기도가 없어 비종교적인 사람으로 하나님의 미움을 받았습니다(롬09:13). 또한 결정적인 실수는 장자권을 붉은 죽 한그릇에 팔 정도로 영적인 축복에 대해 경솔했던 일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히12:16∼17). 또한 헷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여 가족의 큰 근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 이삭과 리브가의 장남이며 야곱의 쌍둥이 형이다. 그의 별명은 에돔 이었는데 그 뜻은 [붉다]는 의미이다. 태어날 때부터 피부색깔이 붉 었으며 몸에 털이 많았고 그리고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기업을 넘겨 주고 붉은 죽을얻어 먹은 탓으로 에돔(붉음)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는 성장한 후 헷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한 탓으로 스스로 이스라엘 족장의 계열에서 벗어나서 에돔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창세기 저자가 우리에게 또하나의 의문을 던져주는 것은 왜 하나님께선 이들 쌍둥이(에서와 야곱)가 어머니 리브가의 복중에 있을때 부터 에서의 편을 들지 않고 동생 야곱의 편을 들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5:23) 태속에 있는 쌍둥이를 두고서 한편은 축복하고 한편은 저주한 것은 하나님의 지나친 편애와 월권이 아닐까?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고 살아보지도 못한 생명에게 어떻게 그런 운명론적 판결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에서를 변호한다면 그는 한마디로 말해서 멋있고 인간미 넘치는 사나이다운 사나이었다. 검소하고 소박하며 광야와 산길을 타고 다니면서 단련한 건강한 체구를 가진 남성으로서 그는 결코 야곱처럼 약삭빠른 사람은 아니었는듯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에서의 생애와 사상을 벌써 태중에서 읽었기에 그런 예언적 판결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에서의 결정적 오류는 그중요한 장자의 명분을 값싼 죽 한그릇과 바꾸어 먹었다는 사실에 있다. 즉 에서는 그에게 부여된 생의 기본권 리를 존중하고 그 가치의 존귀함을 인정하는 신앙보다 순간적 욕구충 족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동생에게 넘겨주 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 삶에 있어서 빵은 삶의 수단에 불과하며 하나님의 장자됨의 권리는 너무나 존귀하고 거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에서] (털이 많은이라는 뜻) 는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중에 한 아이이다. 에서라는 이름의 어원은 히브리어 에사브(털이 많음)와 히브리어 크아데렛 세아르(전신이 갖옷 같다) 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창세기 30절에서는 에서가 야곱의 죽(아돔[adom])을 원해서 별명을 에돔(edom) 이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잉태하지 못하던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뱃속에서부터 서로 싸웠다.출산을 할 때 쌍둥이 중에 먼저 나온 아이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지었고 후에 나온 아이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으므로 이름을 야곱이라 칭하였다(창25:19-26)고 한다. 야곱은 성장하여 양치기가 되었고 에서는 능숙한 사냥꾼이 되었다.그런데 아버지 이삭은 고기를 무척 좋아했으므로 에서를 끔찍히 사랑하였다. 어느날 에서는 사냥에 실패하여 굶주린 채 돌아왔다. 이때 야곱이 죽을쑤고 있었다. 이에 에서가 죽을 나누어 달라고 말하지 야곱은 장자권과 죽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장자권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있던 에서는 야곱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는 40세가 되어 이족 헷 족속의 아내 브에리의 딸 유딧과 엘론의 딸 바스맛을 얻는다.그런데 부모가 이를 근심하므로 부모의 뜻을 따라 또동족의 아내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을 취한다. (창28:9,36:3).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므로 죽기 전에 사랑하는 아들 야곱이 장자 축복을 받도록 하려고 계략을 꾸민다. 그래서 에서가 축복받는 기념으로 이삭에게 맛있는 요리를 마련하려고 사냥을 나간 사이에 야곱이 에서를 대신하여 장자 축복을 받게 된다. 에서가 돌아와 사냥에서 잡은 짐승으로 별미를 만들어 바치며 축복을받으려했으나, 이미 장자의 축복은 야곱에게 돌아갔으므로 축복 대신 되려저주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에서는 야곱을 미워하며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야곱을 죽이려고 결심한다. 이러한 에서의 마음을 안 리브가는 에서의 분노가 풀리기까지 야곱을 하란의 외가로 피신시킨다. 그래서 야곱은 밧탄 아람에있는 외삼촌 하반의 집에서 20년을 보내게 된다 (창27:41-31:55). 그후 야곱은 일족을 거느리고 다시 돌아온다. 돌아오면서 야곱은 에서가 여전히 자신을 미워하고 해를 입힐 것을 두려워하여 철저한 준비를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에서는 동생 야곱을 용서하고 따뜻하게 맞아들인다. 그후 형제는 사이좋게 지내며 이삭의 장례도 함께 치른다. 에서의 전기중에 두드러진 특색은 야곱과의 투쟁이다. 이 투쟁중에서 가장 핵심은 장자권의 양도이다. 장자권의 양도는 부친 사후에 우선권( 창27:29) 과 가정에 있어서의 제사권(민 3:12) 과 유산권 등등의 권리의상실을 의미한다. 이 행위 때문에 신약성경은 에서를 [망령된 자](히12:16)라고 그의 품성을 폭로하고 있다. 즉 그의 품성이 하등의 신성한 것을인정하지 않고 그의 마음이 물질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을 용서하고 따스하게 맞아들이는 에서의 화해의 관용과 용서하는 마음이 죽 한 그릇에 장권을 넘겨주고 또 장자권을 차지한 야곱을 미워하여 죽이려한 에서의 근시안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성급한성격으로 인한 잘못을 상쇄시킬 수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에서는 세일의 구릉 지대에서 호리 사람을 쫓아내고 거기에 정주했다. 그래서 에서의 자손은 세일지방에서 크게 번성했으며 세일산을 "에서의산"이라고도 불리었다. 에서는 에돔의 조상이 되었다. -------------------------------------------------------------------------------- 본 문 : 창25:27-34 요 절 : (창25:34) 1.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영적 특권을 포기한 에서 1)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림으로 종가집의 축복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1)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현실적인 이유는?(창25:29-34) (2) 장자의 명분과 바꾼 식물을 우리 값으로 환산한다면 얼마나 될까?(창25:34상) (3) 장자의 명분을 팔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창25:34하) 2) 약속의 가정에서 태어난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포기하고 팔아버린 것은 결코 이삭의 가정 재산이나 명분을 포기한 정도가 아니었다. (1) 하나님의 자녀에게 약속하신 유업은?(약2:5) (2) 우리가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지 않았어도 그의 자손이 되어 약속의 유업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갈3:29,4:7) * 에서가 육신의 배고픔으로 인해서 장자의 명분을 포기한 것은 곧 약속의 땅 가나안을 포기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영원한 나라(천국)를 포기한 상징적인 행위이다. 2. 신앙의 가정에서 이탈해 가는 에서의 세속생활 1). 장자의 명분을 포기한 에서는 결국 장자에게 주는 축복의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1)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계시(창25:23) (2)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어머니의 역활(창27:6-14) (3) 에서의 탄식과 후회(창27:30-34,히12:17) 2).에서는 그의 결혼에 있어서도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들이므로 신앙의 가정을 포기하고 있다. (1) 에서의 아내는 어느 지방 사람인가?(창26:34) (2) 에서가 이방여인과 결혼한 일은 그의 부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창26:35, 27:46) (3) 에서의 두 번째 결혼 대상자는 어떤 사람인가?(창28:8-9) *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문에 손자로 태어난 에서는 믿음의 길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받지 못한채 이방인에게 동화되어 버리고 말았다.(창36장참조) ======== ▶ Esau. [E'sau] A twin son with Jacob of Isaac and Rebekah, though Esau was actually the first-born. He is described as "red, all over like a hairy garment;" with this his name corresponds, which signifies 'hairy.' Gen. 25:25. The first thing we read of him is the selling of his birthright to his over-reaching brother Jacob, for a mess of pottage. Concerning this he is called in the N.T. a profane person, because he valued not that which was the gift of God. He afterwards sought the blessing carefully with tears, but found no place of repentance. Gen. 25:29-34; Heb. 12:16,17. (창25:29-34; 에서 (히12:16,17 Jacob, through want of faith in God, surreptitiously obtained the blessing of his father (who, contrary to God's election, intended it for Esau), in which Isaac said that he had made Jacob Esau's lord, and given all his brethren to be his servants. The blessing of Esau was "Thy dwelling shall be the fatness of the earth, and of the dew of heaven from above; and by thy sword shalt thou live, and shalt serve thy brother;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ou shalt have the dominion, that thou shalt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Gen. 27:37-40. Esau hated his brother, and intended, when the days of mourning for his father were ended, to kill him. The words of Isaac were fulfilled. David put garrisons throughout all Edom (where the descendants of Esau dwelt, Gen. 36:8) and all they of Edom became his servants, 2 Sam. 8:14; but later on in the days of Joram, Edom revolted from under the hand of Judah; and though Joram was able to punish them, yet Judah was growing weaker, and 'Edom revolted from under the hand of Judah, unto this day.' 2 Kings 8:20-22. Obadiah announces Edom's final judgement: no remnant is restored. See EDOM. (창27:37-40 (창36:8 (삼하08:14 (왕하08:20-22 Esau had three wives (see BASHEMATH) and a numerous posterity, which increased to a powerful tribe. When he went to meet Jacob he was accompanied by four hundred men. It may be God had warned Esau, as He did Laban, not to hurt Jacob; or possibly his anger may have abated: for when they approached, "Esau ran to meet him, and embraced him, and fell on his neck and kissed him, and they wept." They were thus happily reconciled, and at the death of Isaac his two sons buried him. Gen. 33:4; Gen. 35:29. (창33:4 (창35:29 In Mal. 1:2, 3 Esau is referred to as having been hated by Jehovah, whereas Jacob had been loved. This is quoted by Paul in Rom. 9:13, where God's sovereignty is being enforced. It was foretold that the elder should serve the younger before they were born, and before they could have done either good or bad: this was God's sovereignty. But it was not foretold that God would hate Esau; it is not mentioned till the close of the Old Testament, after Esau in his descendants had displayed his unrelenting enmity to Israel, and Esau personally had long before that despised the gift of God in his birthright. The passage in Malachi is thought by some to refer to the nations which descended from the two brothers. (말012, 3 (롬09:13 --- Morrish Bible Dictionary ------------------------------------------------------------------ 에서…동생에 팔아버린 장자권…남은 건 방황뿐 세속의 사냥감을 좇아서 (어리석은 육체의 사람-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가문/하나님의 약속이 깃든 축복받은 집안/그 빛나는 집안의 장자로 태어난/에서. 그러나/ 장자의 명분일랑 일찌감치 잊어버리고/어제처럼 오늘도 사냥감을 쫓아/이리저리 가나안의 들판을 헤맨다/그의 기쁨은 화살통/그의 자랑은 사냥한 짐승들. 들판을 헤매다 허기진/에서/팥죽 한 그릇에/장자의 명분을 팔아넘긴다/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티켓을/휴지처럼 가나안 들판에 구겨 던진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기도를 받는 그 순간에도/들판을 헤매던/에서/마침내 잃어버린 장자권에/목놓아 슬픈 울음을 터뜨리다. 머리를 쥐어뜯고/울며/몸부림치며/동생의 간교함에 몸을 떨었지만/그에게 주어진 것은/이슬조차 사라진 메마른 산악/약속의 땅 가나안을 슬피울며 떠나가네. 오늘,에서의 후예들/그들도 에서처럼/욕망의 화살통 둘러매고/사냥감을 찾아 세속의 들판을 이리저리 헤맨다/어리석음의 들판을/오늘도 헤매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축복 받은 가문, 하나님의 약속이 깃든 믿음의 집안에 경사가 생긴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집안에 쌍둥이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먼저 세상에 나온 형은 에서, 뒤이어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온 동생은 야곱.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 한 집안의 장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정녕 축복된 일이었다.장자는 한 집안의 물질적,정신적 유산을 물려받고 그것을 이어갈 책임과 특권을 가진다.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이 빛나는 언약의 가문에서 에서는 그런 소중한 장자권을 가지고 태어난다. 가나안 땅의 들판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하지만 언약 가문의 큰아들 에서는 장자의 명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털 많은 들 사람인 에서의 관심은 온통 화살통과 사냥감에 있었다.“오늘은 좀 더 큰 놈을 사냥해야 할텐데…”하면서,오늘도 어제처럼 화살통을 둘러메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그 날은 저녁 늦게까지 사냥감을 쫓다가 배가 무척 고팠다.그때 동생 야곱을 만나고, 그에게서 팥죽 한 그릇을 얻어먹는 대가로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린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장자권 따위는 그만큼 에서의 관심 밖이었다. 이렇게 에서는 언약 가문의 축복 티켓을 휴지 버리듯 가나안 땅의 들판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친다. 장자권을 잃고,슬피 울며 가나안 땅을 떠나가다 세월은 흐르고, 언젠가 에서가 아비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 기도를 받고자 했을 때, 이미 그것은 동생 야곱에게 빼앗긴 뒤였다.“내 아비여 내 아비여, 내게도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창세기 27:38)” 그야말로 방성대곡.슬피 울며 몸부림쳤지만, 에서가 받은 축복이라곤 언약의 땅 가나안에서 제외된 곳.기름진 땅과는 거리가 멀고 이슬조차 사라진 광야의 메마른 산악 지대뿐이었다.성경은 이러한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자’라고 일컫는다(히브리서 12:16). 오늘도 먹을 것을 바라고 입을 것을 바라며, 오직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욕망의 사냥감을 쫓아 세속의 들판을 이리저리 헤매는 에서의 후예들이 얼마나 많은가.그러나 세속의 들판에서 그들이 얻을 것은 후회와 눈물뿐, 잃은 것은 복음과 천국인 것이다. 김영진(시인·성서원 회장) (교훈과 적용)
1 이스라엘(Israel)
인물
jesus
2077 4 2006-12-28
▶ 이스라엘(Israel) 뜻:하나님이 투쟁하심 야곱 이 처가에서 고향에 돌아 오다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기고 축복으로 받은 이름(창32:22-28). 그 후부터 그 이름을 족명,국명을 삼아 이스라엘 족속 이스라엘 자손이라 불렀다(출16:31, (행01:6, (출01:7, (출05:1). ▶ 이스라엘/유다 Israel. [Is'rael] Name given to Jacob after 'a man' had wrestled with him, to whom he clung when he was by him crippled. It signifies 'a prince of God:' and it was said, "as a prince hast thou power with God and with men, and hast prevailed." It thus indicated the way of blessing with regard to the nation in which God's government in the earth was to be established. The twelve sons of Jacob became the heads of the twelve tribes, and they and their descendants were called the children of Israel, or simply Israel. At the division of the kingdom, the ten tribes were called 'Israel,' and the two tribes 'Judah,' though this distinction is not at all times rigidly adhered to: thus the princes and kings of Judah are called princes of Israel, and kings of Israel. 2 Chr. 12:5, 6; 2 Chr. 21:2; 2 Chr. 28:19. So those who returned from exile, though they were in the main of the two tribes, are called people of Israel, or Israel. In the prophets also, though the ten tribes are not called Judah, the two tribes are at times called Israel. The ten tribes in the prophets are often spoken of as EPHRAIM, which was the chief of the ten. Though Israel was reckoned as ten tribes, it is most probable that the portion of Simeon, being situated on the extreme south, was united to Judah, as well as the territory of Dan in the S.W., though the people of Simeon may have scattered themselves among the other tribes, and those of Dan have gone north and joined their tribe there. (대하12:5-6; 5 때에 유다 방백들이 시삭을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라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나아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붙였노라 하셨다 한지라 6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가로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 (대하21:2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아우 아사랴와 여히엘과 스가랴와 아사랴와 미가엘과 스바댜는 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대하28:19 이는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 THE KINGDOM OF ISRAEL commenced when Jeroboam was made king, to whom it was promised that his house should be established if he followed the Lord. He, on the contrary, to prevent the people going to Jerusalem, immediately set up the golden calves at Dan and at Bethel. The kingdom was given up to idolatry, and a series of judgements followed. Baasha murdered Jeroboam's son and successor; and his own son and successor was slain by Zimri; Zimri was killed by Omri, and after a civil war of four years with Tibni, Omri became king and reigned with his successors forty-five years, ending with Jehoram the son of Ahab. He and the survivors of the house of Ahab were slain by Jehu directly or indirectly, and Jehu began the 5th dynasty, B.C. 884. He and his successors reigned, with varying judgements upon them, for a hundred and twelve years. Zachariah was the last, being the fourth successor of Jehu, as God had said, 2 Kings 15:12: he reigned only six months and was murdered by Shallum. During another fifty years the kingdom was spared: but there was no repentance. About B.C. 740 the two and a half tribes east of the Jordan were carried into captivity, and Israel became tributary to Assyria. Hoshea murdered Pekah, and after nine years of anarchy succeeded to the throne. He revolted against Assyria, trusting to Egypt; but Samaria was taken, and Israel carried into captivity. Thus ended the kingdom of Israel, B.C. 721. From about B.C. 784 to 725 Hosea was God's prophet in Israel. He solemnly pleaded with them, protesting against their evil ways, and was ever ready to help them to turn to God, though his efforts were, alas, in vain. 2 Kings 17:13-18; Hosea 13:16; Hosea 14:1-9. (왕하15:12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자손이 이스라엘 위를 이어 사대까지 이르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니라 (왕하17:13-18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 (호13:16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호14:1-9 이스라엘의 회복 약속 Israel when carried away were placed in Halah and in Habor by the river of Gozan (in the neighbourhood of the river Khabour, an affluent of the river Euphrates), and in the cities of the Medes. As far as is known they never returned, though doubtless individuals found their way back in the days of Ezra and Nehemiah, and in the four hundred years that followed before the Lord appeared. Jews from those districts were present on the day of Pentecost; but as a body they are still commonly regarded as 'the Lost Tribes.' God knows where to find them when His set time of blessing arrives. The twelve tribes surely exist, and remnants of them will again come into the land. Ezek. 48:1-29; Matt. 19:28; Acts 26:7; James 1:1; Rev. 7:5-8. (겔48:1-29 새 땅의 분배약속 (마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행26:7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약0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계07:5-8. 5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The ten tribes will be dealt with differently from the two, who were in the land when the Lord was presented to them, and who rejected Him, and demanded His crucifixion. The ten tribes will, by a mighty hand and with fury poured out, be brought into the wilderness, and there God will plead with them, cause them to pass under the rod, and bring them into the bond of the covenant; but the rebels will be purged out. Ezek. 20:31-38. The question as to the wounds in the hands of the Lord, which He received in the house of His 'friends' is connected with Judah, who will be judged when in the land, and only one third of them after being refined, will be owned as God's people. Zech. 13:6-9. When God thus purges and restores a remnant of all the tribes, and brings them into full blessing in the land, the name of ISRAEL will embrace them all as it did at the first, and God will be their God for evermore. Ezek. 37:1-28. (겔20:31-35 31 너희가 또 너희 아들로 화제를 삼아 예물로 드려 오늘날까지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라 32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열국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숭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 3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단정코 다스릴지라 34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열국 중에서 나오게 하며 너희의 흩어진 열방 중에서 모아내고 35 너희를 인도하여 열국 광야에 이르러 거기서 너희를 대면하여 국문하되 (슥13:6-9 6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9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겔37:1-28 마른 뼈들의 골짜기 비유와 화평의 언약 --- Morrish Bible Dic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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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대표 1.창조 2.족장 3.출애굽 4.광야 5.정복 6.사사 7.통일왕국 8.분열왕국 9.포로 10.포로귀환 11.중간 12.예수 13.초대교회 14.세계선교 관련그림.지도 1.창조 2.족장 3.출애굽 4.광야 5.정복 6.사사 7.통일왕국 8.분열왕국 9.포로 10.포로귀환 11.중간 12.예수 13.초대교회 Ani
1창세기[Genesis] 2출애굽기[Exodus] 3레위기[Leviticus] 4민수기[Numbers] 5신명기[Deuteronomy] 6여호수아[Joshua] 7사사기[Judges] 8룻기[Ruth] 9사무엘상[I Samuel] 10사무엘하[II Samuel] 11열왕기상[I Kings] 12열왕기하[II Kings] 13역대상[I Chronicles] 14역대하[II Chronicles] 15에스라[Ezra] 16느헤미아[Nehemiah] 17에스더[Esther] 18욥기[Job] 19시편[Psalms] 20잠언[Proverbs] 21전도서[Ecclesiastes] 22아가[Song of Solomon] 23이사야[Isaiah] 24예레미야[Jeremiah] 5예레미아애가[Lamentations] 26에스겔[Ezekiel] 27다니엘[Daniel] 28호세아[Hosea] 29요엘[Joel] 30아모스[Amos] 31오바댜[Obadiah] 32요나[Jonah] 33미가[Micah] 34나훔[Nahum] 35하박국[Habakkuk] 36스바냐[Zephaniah] 37학개[Haggai] 38스가랴[Zechariah] 39말라기[Malachi] 40마태복음[Matthew] 41마가복음[Mark] 42누가복음[Luke] 43요한복음[John] 44사도행전[Acts] 45로마서[Romans] 46고린도전서[I Corinthians] 47고린도후서[II Corinthians] 48갈라디아서[Galatians] 49에베소서[Ephesians] 50빌립보서[Philippians] 51골로새서[Colossians] 52데살로니가전서[I Thessalonian] 53데살로니가후서[2 Thessalonian] 54디모데전서[I Timothy] 55디모데후서[II Timothy] 56디도서[Titus] 57빌레몬서[Philemon] 58히브리서[Hebrews] 59야고보서[James] 60베드로전서[I Peter] 61베드로후서[II Peter] 62요한일서[I John] 63요한이서[II John] 64요한삼서[III John] 65유다서[Jude] 66요한계시록[Reve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