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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Jesus) 뜻 : 구세주, 예수(Jesus)는 고대 그리스어: Ίησους 이에수스의 라틴어 표기이며, 이에수스는 다시 여호수아(히브리어: Jehoschua) 혹은 예슈아(히브리어: Jeschua)를 코이네 그리스어로 옮긴 사두람이다. Jehoschua의 어원은 접두어 Je- (히브리어: JHVH/YHWH:Jahveh 야훼, 하느님)와 히브리어: Hoshea(구원, 구세라는 뜻을 가진 호산나)를 덧붙여 이루어진 사람이다. [1] 예수 그리스도 [2] 예수 그리스도 족보중 한 사람 (눅03:29) cf. 예수아 ---------------------------------------------------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 ▶ 예수님의 칭호(Jesus) (1) 주 (마03:3, (막01:3, (눅03:4). (2) 길 (요14:6, (히10:20). (3) 신 (고후03:17-18). (4) 홀 (민24:17, (창49:10). (5) 곶 (애02:1). (6) 예수 (마01:21,25). (7) 감독 (벧전02:25). (8) 구주 (눅02:11, (행13:23, (욥19:25, (사63:8). (9) 인자 (마08:20, (요01:51, (히02:6, (단07:31). (10) 임금 (행05:31). (11) 생명 (요14:6, (요11:25, (골03:4). (12) 말씀 (요01:1, (계19:13). (13) 반석 (고전10:4, (민20:11). (14) 참빛 (요01:9, (요08:12). (15) 부활 (요11:22). (16) 진리 (요14:6). (17) 기묘 (사09:6). (18) 모사 (사09:6). (19) 목자 (벧전02:25). (20) 사도 (히03:1). (21) 실로 (창49:10). (22) 산돌 (벧전02:4). (23) 아멘 (계01:7, (계03:14). (24) 남편 (사54:5). (25) 분수 (슥13:1). (26) 가지 (슥03:8, (슥06:12, (사11:1, (렘23:5). (27) 유대왕 (마02:2, (눅23:3). (28) 돋는 해 (눅01:78). (29) 선지자 (눅24:19, (신18:15,18). (30) 독생자 (요01:14,18). (31) 메시야 (요01:41). (32) 양의 문 (요10:7). (33) 집의 터 (고전03:11). (34) 후 아담 (고전15:45). (35) 중보자 (딤전02:5, (딤전12:24). (36) 재판장 (딤후04:8). (37) 하나님 (히10:37). (38) 이긴 자 (히02:15). (39) 오실자 (히10:37). (40) 산 소망 (벧전01:3). (41) 대언자 (요일02:1). (42) 새벽별 (계22:16, (민24:17, (사42:1). (43) 섭정자 (단09:25). (44) 택한 종 (마12:17, (사42:1). (45) 임마누엘 (마01:23, (갈07:14). (46) 그리스도 (마01:23, (갈07:14). (47) 구원의 문 (요10:9). (48) 선한 목자 (요10:11, (히03:20, (시023:1). (49) 본되신 자 (요13:15, (롬15:5, (벧전2:21-23). (50) 포도나무 (요15:1). (51) 생명의 주 (행03:15). (52) 만유의 주 (행10:36) (53) 영광의 주 (고전02:8). (54) 청결한 자 (히01:3). (55) 대제사장 (히03:1, (히04:14, (히05:1, (히06:20, (히07:24). (56) 만유의 주 (계17:14, (계19:19). (57) 만왕의 왕 (계17:14, (계19:16). (58) 영광의 왕 (시024:7-8). (59) 평강의 왕 (사09:6). (60) 시험한 돌 (사28:16). (61) 우리의 의 (렘23:6). (62) 그 왕 다윗 (렘30:9, (호03:5). (63) 겸손한 왕 (슥09:6). (64) 의로운 해 (말04:2). (65) 다윗의 자손 (마09:27, (마21:9, (마22:42,45). (66) 거룩하신 자 (눅04:34, (행03:14, (요일02:20). (67) 이스라엘 왕 (요01:49). (68) 생명의 양식 (요06:35,38:51). (69) 거룩한 아들 (행04:27). (70) 구언하실 자 (롬11:26, (사59:20). (71) 교회의 머리 (엡04:15, 엡05:23). (72) 크신 하나님 (딛02:13). (73) 승천하신 자 (히04:14). (74) 언약의 보증 (히07:22). (75) 믿음의 주인 (히12:2). (76) 보배로운 돌 (벧전02:4-6). (77) 신실한 증거 (계01:5). (78) 처음과 나중 (계01:17, (계02:8, (계21:6, (계22:13). (79) 진실하신 이 (계03:14). (80) 창조의 근원 (계03:14). (81) 다윗의 뿌리 (계05:5, (계22:16). (82) 여호와의 종 (사42:1,19, (사52:13, (사:12:17). (83) 여호와의 팔 (사53:1) (84) 언약의 사자 (말03:11). (85) 하나님의 아들 (마03:17, (막01:11, (눅03:22. (요01:49). (86) 안식일의 주인 (마12:8). (87) 우리 유월절 양 (고전05:7,출12:). (88) 하나님의 형상 (고후04:4, (히01:3). (89) 장인의 버린돌 (벧전02:7, (시118:2). (90) 알파와 오메가 (계01:17, (계02:18, (계21:6, (계22:13). (91) 만물의 지으신 자 (요01:3, (요22:13). (92) 하나님의 어린양 (요01:29, (계05:6). (93) 미리 알게 하는자 (계05:5). (94) 유대 지파의 사자 (계05:5). (95) 영생하신 아버지 (사09:6). (96) 전능하신 하나님 (사09:6). (97) 지극히 높으신 자 (단07:25). (98) 여호와의 짝된자 (슥13:7). (99) 하늘로써 내려온자 (요03:13). (100) 집 모퉁이 요긴한 돌 (엡02:20). (101) 하나님의 영광 (히01:3). (102) 거룩하게 하시는 자 (히13:12). (103) 죽음에서 먼저 사신자 (계01:5). (104)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미05:2). (105) 여호와의 기뻐하는 자 (사42:1, (마03:17). (106)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계03:7). (107) 아름다운 소식 전하는 자 (사05:27). (108) 세세에 찬양 받으실 하나님 (롬09:5). (109)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을 잡은 이 (계02:12). (110) 일곱 신과 일곱 별과 일곱 등대를 가지신 이 (계02:1). (111) 일곱 별과 일곱 등대를 주장하는 이(계02:1). (112) 눈이 불같고 발이 빛난 주석 같으신 이 (계02:28). ▶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란 예수의 칭호는 마태복음 (마04:3, 4:6, (마08:29, (마14:33, (마16:16, (마26:63, (마27:54, 마가복음 (막03:11, (막05:7, (막09:7, (막15:39, 누가복음 (눅01:35, (눅04:41, (눅08:28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마태에 있어서 예수는 그가 출생한 이래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그를 그렇게 선포하고 있다(마03:17)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고백은 마14:33과 27:54과 같이 예수에 대한 직접적인 칭호로서 신앙 고백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호칭은 메시야와 동일시되어 불려지기도 하였다(마26:63).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포되는 광경을 볼 수 있으며, 귀신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으며(마3:11, 마5:7) 예수는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누가복음에서는 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태어날 아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 질 것을 말하고 있다(눅1:35). 그리고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 마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호칭하고 있다(눅4:3). 킹즈베리는 기독론적인 문서인 마태복음 전체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발견해 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에게 있어서 마태의 예수는 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성서 속에서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마태복음 17:1-8에 나오는 예수의 변모에 관하여서 예수의 수세이야기와 비슷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하늘에서 들여오는 음성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마태복음 17:5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자기의 유일 무이한 선택된 아들로서 다시 한 번 선포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증거로서 포도원 비유에서의 농부의 아들을 자기로 알레고리화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소작인들에 의해 결국 성밖에서 죽어야 하는 포도원주인의 아들을 알레고리 적으로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을 증거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비교적 역사적-경제적 사실과 많이 부합하는 문서로 간주되는데, 이러한 비유들은 투쟁, 변호, 방어, 공격, 도전 등 주로 논쟁을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서의 모든 비유를 알레고리 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포도원 비유가 나오는 마태복음 21:33-46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짐작하고 비유를 들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큰 증거로서 삼고 있다. 또한 이 비유는 이사야 5:1-7의 포도밭의 노래를 소재로 하고 있다. 즉 이사야의 이 텍스트로부터 가져왔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관복음서안의 이 포도비유가 수정되며(죽은 포도원 주인 아들의 죽는 장소에 따라 복음서마다 다른 것은 편집…수정하는 과정에서 결국 십자가의 고난에 그리스도가 매달리게 될 장소는 성밖이란 점에서, 그렇게 수정…편집되었다는 것)복음서안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는 달리 혼인잔치 비유는 맥락상으로 살펴 볼 때 예수의 십자가상의 고난을 넘어선다. 전자가 십자가 처형을 예견한다면, 후자는 마태복음 28:18 이하에서 제자들이 받는 위대한 사명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마태는 알레고리를 통해 이 비유를 예수에게서 시작해서 마태 자신의 시대에 이르는 구속사에 대한 묘사를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 중의 왕은 하나님, 그의 아들은 부활하신 예수, 혼인잔치는 메시아 향연, 초대받은 자들은 이스라엘, 종들은 제자들과 교회의 전도사들, 초대에 대한 무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의 거부, 종들을 때리고 죽이는 것은 교회에 대한 이스라엘의 박해, 군인들의 도시파괴는 예루살렘의 멸망,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차별 없이 초청해 옴은 이방인의 교회영입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심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비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왕의 아들인 혼인 잔치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메시아 향연인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주로 고백적인 배경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의 백부장의 신앙고백은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진술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곧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베드로의 고백이 나오는 16:16과 대제사장의 질문이 나오는 26:63에서 마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메시야라는 칭호는 서로 동격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스 콘첼만에 의하면, 메시야 칭호의 유래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역사적 출처는 모호한 것이다. 예수가 이미 자신을 그렇게 붙였는가 또는 교회가 비로서 이 칭호를 그에게 부여했는가하는 점은 그 칭호가 어디서 유래했으며 무엇을 의미하는 가하는 물음에서 중요하지 않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출4:22), 그리고 왕으로부터 나타난다. 시편 2:2의 기름 부은자, 7절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이것은 동양적 궁중 문학 양식이다. 물론 유대교는 하나님이 몸으로 낳았다거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구약성서의 왕칭호가 예수에게 이전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는 메시야의 의미와 동일하다는 가정이 이 시편귀절에 근거하여 자주 제기된다. 그러나 유대교안에서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 칭호들 사용한 것을 찾아볼 수없다는 사실이 그런 가정을 반영해 준다. ▶ 그리스도 그리스도(메시야)란 칭호는 마태복음 1:1, 1:16-18, 마2:4, 마16:16, 11:2, 16:20-21, 마22:42, 마23:10, 마26:63, 26:68, 마27:17, 27:22, 마가복음 8:29, 9:41, 누가복음 2:11, 9:20에 잘 나타나 있다. 마태는 이 ?메시야?라는 칭호를 한 차원에서만 사용하지 않았다. 마1:1에서 이 칭호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예수 메시야).마1:18, 마16:21도 같은 경우로 원문상 논란이 있으나 ?예수 메시야?가 정확한 독법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 메시야?라는 칭호가 단순한 이름으로 취급되었다 할지라도 마태복음서에 있어서 이 칭호는 ?예수가 메시야이시다?는 근본적 진리는 늘 함축하여 사용된다. 마태는 기독론적 칭호로서의 메시야란 칭호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메시야 그 분은 구약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고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그 오시는 이이시며,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시는 왕으로 오신 예수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완성시키는 분이며, 하나님의 권위로 사람들에게 구원 또는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통해 이 메시야라는 칭호를 더 나아가 유대인의 왕,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도 규정지으려 했다. 만약에 메시야란 칭호의 사용이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로 결과되게 되는 것이라면, 예수 메시야의 행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서의 행동이었다는 것과 메시야라는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의 대용어라는 이해가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한스 콘첼만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칭호이긴(막 8:29)하지만, 그리스도는 예수그리스도란 결합에서 단순히 이름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바울이 단지 형식적인 관사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도 이 진술은 타당하다. 그런데 그리스도란 의미가 이름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물론 희랍어를 쓰는 세계에서였다. 희랍인들은 메시야 칭호를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구원자의 본질을 다른 칭호와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기원 상으로 볼 때 메시야는 민족주의적인 유대교적 종말론에 속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구약성서에서 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본래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인 구원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구원자에 대한 표상들이 융합되어졌다. 즉 초월적인 존재로 고양되어 졌다는 것이다. 메시야는 묵시문학적 문헌의 대부분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다. 묵시문학에서 메시야 개념이 침투되어 있는 부분은 이차적 발전단계에 속한다. ▶ 인자(人子) 인자(사람의 아들)는 마태복음 마08:20, 마09:6, 마10:23, 마11:19, 마12:32, 12:40, 마13:37, 13:41, 마16:13, 16:27-28, 마17:9, 17:12, 17:22, 마19:28, 마20:18, 20:28, 마24:27, 24:30, 24:33, 24:37, 24:39, 24:44, 마25:31, 마26:2, 26:24, 26:45, 26:64, 마가복음 막02:10, 2:28, 막08:31, 8:38, 막09:9, 9:12, 9:31, 막10:33, 10:45, 막13:26, 막14:21, 14:41, 14:62, 누가복음 눅05:24, 눅06:56, 눅07:34, 눅09:22, 9:26, 9:44, 9:58, 눅11:30, 눅12:8, 12:10, 12:40, 눅17:22, 17:24, 17:26, 17:30, 눅18:8, 18:31-32, 눅19:10, 21:27, 21:36, 눅22:22, 22:48, 22:69, 눅24:7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인자라는 칭호는 마태복음서의 기독론적 칭호들 중 매우 중요한 칭호 중의 하나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 이론은 도전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칭호는 다른 복음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지칭하는 칭호로 마태복음서도 사용되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이 그렇게 분명하다 하여도 인자와 관련된 몇 가지 물음들은 아직도 마태복음서 연구가들 사이에 명쾌한 결혼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마태가 사용한 이 용어의 정확한 용법이 무엇인가? 이 용어는 왜 마태복음 8:20 이전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 용어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 칭호가 성격상 대중적인 경우는 진정한 한 기독론적 칭호로 작용하고 그 외에는 고백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의 보충적 역할을 함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인자는 예수의 사역의 세 구별된 국면을 따라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의 공적 사역과 관계된 것이고, 둘째는 그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관련된 것이다, 세째는 그의 재림과 관계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만히 보면은 이러한 인자의 기능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과 상당히 일치되어 나타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예수의 재림과 관련하여 거의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인자라는 칭호는 소위 예수님의 현지사역과 관련하여서는 그렇게 중요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킹즈베리에 의하면, 이 인자라는 칭호야말로 마가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가장 합당한 칭호이며, 따라서 아무런 수정이 필요 없는 유일한 칭호란 것이다. 그리고 이 칭호의 뛰어난 점은 마가복음에 있어서 이것이 항상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만 말씀되어진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에 이것은 예수의 자기이해(self-understanding)의 표현인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여러 칭호들 중 인자칭호는 가장 규범적인 것이 되며, 예수께 대한 다른 칭호들을 재해석하여 하나님께 예수님에 정하신 신적 운명이 고난과 죽음이란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도 예수를 예수 인자라 칭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인자의 기능이 나사렛 사람의 정체를 밝히는 것과는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킹즈베리에 의하면, 마가는 예수를 매우 분명하게 다윗적 메시야, 왕,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인자는 독자들에게 예수가 누군가를 설명하는데 사용된 흔적이 없다. 그는 인자의 세가지 면을 지상적인 자, 고난받는 자, 묵시적인 자로 이해했다. ▶ 주(主) 주라는 칭호는 마태복음 7:21-22, 마8:2, 8:6, 8:8, 8:25, 마9:28, 마14:28, 14:30, 마15:22, 마16:16, 16:22, 마17:4, 17:15, 17:16, 마18:21, 마19:27, 마20:30, 20:33, 마21:3, 21_19, 마24:42, 마25:11, 25:20, 25:22, 25:24, 25:44, 마26:22, 26:33, 26:35, 마가복음 1:17, 8:29, 막10:28, 막11:3, 막14:31, 누가복음 2:11, 눅5:8, 8:24, 8:45, 눅9:33, 9:49, 9:54, 9:61, 눅10:17, 눅11:1, 눅12:41, 눅13:23, 눅17:37, 눅18:28, 18:41, 눅19:8, 19:25, 눅22:33, 22:38, 22:49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한스 콘첼만에 의하면, 이 칭호는 원시교단에서 헬레니즘, 그리스도교에로의 이행이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다음 두가지가 격렬히 논의되고 있다. 이 칭호는 어디서 유래했는가? 언제 그리고 어디서 이 칭호가 그리스도교에로 들어왔는가? 이미 원시교단에서인가? 또는 헬레니즘 교회에서인가? 이미 원시교단이 예수를 주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까닭은 maranatha라는 부름은 순수히 묵시문학적 그리스도론의 표현이다. 교회는 스스로 고대하는 자로 이해한다. 그에 반하여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오실자를 기대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현재 지배하는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인 교단이란 윤곽이 들어 났다. 그 부름은 이제 예수는 주이시다. 이것은 간구가 아니라 환호와 선포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주는 교차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각기 뚜렷이라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즉 아들은 본질이오 주는 아들에게 부여된 지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를 부를 때에는 주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은 이 칭호에서 올리워진 자에 대한 관계성의 현재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칭호는 성서개념과 친밀히 결합돼 있다. 성령은 주의 역사의 현존이다. 주를 부르는 것 자체가 성령에 의해 역사 되는 행위이다. 킹즈베리에 의하면, 마태복음을 연구하는 몇몇 학자들은 대개 검증되지 않은 근거들 위에서 마태가 사용하는 주요한 기독론적 칭호는 주 혹은 퀴리오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면밀한 검토에 의해 들어 나는 증거에 따른다면, 이 칭호가 그렇게 두드러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마태는 퀴리오스라는 용어를 적어도 세 가지 수준에서 사용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의 능력을 지닌 분, 다윗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지닌 주, 인자의 능력을 지닌 주인 것이다. 마태복음 27:63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빌라도를 퀴리오스라고 부를 때 이 말은 순전히 전통적인 용법, 영어의 Sir와 동의로서 사용되고 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이 말은 많은 곳에서 하나님을 지칭한다. 물론 이 말은 예수의 칭호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퀴리오스란 말이 예수를 믿으면서 그에게 나오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만 나온다는 의미에서 고백적인 칭호이다. 이러한 것의 유일한 예외는 마지막 심판의 장면에서 저주받는 자들도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마7:21-23, 마25:37) 마태복음에서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기독론의 중심적인 칭호가 아니라 오히려 보조적인 칭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칭호는 그 칭호 자체를 넘어서 보다 명확한 다른 칭호를 암시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은 마태복음 9:27, 마12:23, 마15:22, 마20:30-31, 마21:9, 21:15, 마22:42, 마가복음 10:47-48, 누가복음 18:38-39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를 보면은 귀신들려서 예수께 나아 오는 자의 입에서 자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치유와 관련된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다윗의 자손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할 때 호산나하면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는데, 하지만 복음서의 이 구절들을 찾아서 자세히 보면, 그 다음 구절은 다윗의 자손의 영향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구절들이 나오는데 이를테면, 이는 누구냐에 대한 반문으로 사람들은 이는 나사렛사람이 아니냐는 구절은 다윗의 자손의 칭호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 한스 콘첼만에 의하면, 족보는 역사적인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남게 되는데 바로, 마가복음 10:48-소경 바디매오의 외침이다. 마가복음 11:1- 의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다윗 왕국의 도래에 관한 환호가 있다. 이것은 현시 전설 적이다. 한편 마가복음 12:35-17에서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요한복음 첫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윗의 자손인 예수그리스도는 태초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다. 콘첼만에 의하면, 이 구절들은 교회공동체의 두 단계 그리스도론을 표현해 준다고 한다. ▶ 하나님의 사자(使者) 마21:37, 요06:38, 요07:29, 요08:42, 요09:4, 요10:36, 요17:8, 21 ▶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 되시는가? 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요 1:1) 나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요 1:3) 성육신하신 예수님(요 1:14, 20:27)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요 1:36, 요3:1-21)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요02:11, 요06장)) 나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요10:11) 나를 다스리시는 예수님(마02:6) 나의 부활하신 예수님(요11:25, 요20:1-8) 나의 선생이신 예수님(요13:13) 나의 생명이신 예수님(요15:4-5) 나의 친구이신 예수님(요15:14) 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요17:9) 나의 왕이신 예수님(요17:9, 마02:1-6) 나의 모퉁이 돌이신 예수님(마21:42) 나의 반석이신 예수님(고전10:4) 나의 대언자 이신 예수님(요일02:1) 나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히12:2) (이영제목사, 한국컴퓨터선교회)
22 여호수아(Jehoshua)
인물
jesus
8795 55 2006-12-27
▶ 여호수아(Jehoshua) 뜻: 여호와의 구원 [1] 사사 여호수아. (1) 에브라임지파 눈의 아들로서 본명은 호세아다(민13:8). (2) 모세(Moses)의 수종자가 되어 항상 회막곁에 있었다(출33:11) (3) 가나안에 보낸 12정탐군중의 한 사람으로 10지파의 정탐을 보고 할때에 민중을 낙담케 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으나 여호수아는 갈렙과 같이 강경히 말하기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그들의 신은 그들의 신은 그들 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니 두려워 말고 쳐들어 가자고 하였다(민13:1-14:10) (4) 그래서 여호와가 20세 이상된 자로 여호와를 원망한 자를 모두 광야에서 죽게 하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가리라 하셨다(민14:26-32) (5) 여호와의 명령으로 제사장 엘르아살이 회중의 목전에서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모세의 후계자를 삼았다(민27:18-23). (6) 여호아가 여호수아에게 너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개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같이 있으리라 하셨다 (신31:23) (7) 모세가 죽은 후에 싯딤에서 두 사람의 정탐군을 여리고에 보냈다(수02:1) (8)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12인을 택하여 언약궤를 메우고 요단강을 육지같이 건너서 길갈에 진치고 여리고 성을 쳐서 취하는 동시에 전일 2인의 정탐군을 숨겼다가 돌려보내준 기생 라합을 구원하였다 (수03:11-17, (수05:10-15, (수06:20-27) (9) 아이 성을 치다가 패하자 그 장본인 아간을 잡아 아골 골짜기에서 돌로 쳐 죽인후 아이성을 다시 쳐서 불살라 황폐케함(수07:4-29) (10) 계속 아나안 7족을 멸하여 이스라엘 12 지파에게 분배하고 자기는 에브라임산지 딤낫세라를 받아 그 성읍을 증건하고 거기 거하였다 (수19:49-51) (11) 살인한자를 위하여 요단강 동편과 서편에 도피성을 셋씩 건설하고 임종시에 백성을 세겜에 모으고 성실과 진정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권면한 후 별세하니 110세 였다. 딤낫세라에 장사 하였다 (수19: (수20:, (수24:1,14,19,20, (행07:45). [2] 벳세메스인 여호수아. 블레셋이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아 가있는 동안에 많은 재앙이 있으므로 젖뗀 암소 두마리에 메워 보냈더니 여호수아의 집에 이르렀다. 그곳 사람들이 그 궤를 들여다보다가 여호아의 치심을 받아 5만7천인이 죽은고로 무서워서 그 궤를 기럇여아림으로 보냈다(삼상06:7-21) [3] 유대왕 요시아 때에 예루살렘 통치자 여호수아였다(왕하23:8) [4] 여호사닥의 아들로서 대제사장이다(학01:1) 여호와가 스가랴에게 명하여 스바냐의 아들 요시야에게서 은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수아 의 머리에 씌우라 하였다(슥06:9-12). ---------------------------------------------------------------------------- [여호수아]("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 는 그 이름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평생토록 헌신한 하나님의 종이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 눈의 아들로 태어난 여호수아의 본래 이름은 [호세아]("구원"이란 뜻)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혹독한 학대를 받으며 노예 생활을하고 있을때 태어나 자유를 구가할 해방의 날을 고대하며 성장하였다.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애굽의 억압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이스라엘 백성의 숨통을 죌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이룬 모세를 따라 귀향길에 오른 여호수아는 모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무려 40년간이나 모세의 부관으로 있으면 여호수아는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연단을 받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긍정적인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는 탁월한 군사적,정치적 역량까지 갖추어 민족의 지도자로서 쓰임을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계속되는 고난과 역결 속에서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믿고 소망을 잃지 않는 여호수아는 결국 모세의 후계자로 지목받게 되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감당하기에 부족함을 아는 여호수아는 두렵고 떨릴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권면과 약속의 말씀으로 큰 힘으리 주시고 백성들까지도 지원하여 순종을 약속함으로 여호수아는 강하고 담대한 지도자로서 첫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성령충만하여 지혜가 뛰어나고 하나님의 능력이함께 하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였다. 오직 야훼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믿음의 행력앞에 요단강이 갈라지고 철옹성 같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무장한 여호수아의 군대는 가나안 족속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하나님께 약속받은 땅을 점령해 나갔다.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이 야훼의 성전임을 아는 여호수아는 하나님의지시에 복종함으로써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여호수아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해와 달의 운행까지도 변경시키시고 그의 백성과 함께 전쟁에 임하시므로 이스라엘이 거두는 승리의 전과는 차라리 당연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믿음과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을 치루고 가나안 땅을점령한 후 여호수아는 각 지파별고 토지르리 나누어 주었다. 자신의 몫에 욕심 을 내지 않고 먼저 백성들에게 공정하게 토지를 분배해 준 여호수아는 자신을 위해서는 작은 산지만을 차지할 정도로 청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처럼 훌륭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인 여호수아도 두가지 실수를 보였다. 가나안 정복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기브온 거민들과 언약을 맺음으로 훗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는 씨앗을 남겼다. 또한 후임자를 육성치 못함으로 인하여 사사시대에 이르러 혼란을 야기케 하였다. 그러나 85세에 민족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아 110세에 죽음을 맞기까지 자신은 물론 그의 백성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강조하며 스스로 본을 보인 여호수아의 생애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귀감이되고 있다. 어떠한 위험이 다가와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강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약속의 땅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 성경:출애굽기 33장11절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본명은 호세아였고 에브라힘 지파의 눈의 아들이었습니다(민13:8). 일찍부터 모세의 수종자가 되어 측근에서 그를 도왔으며 모세의 감화를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종교심이 강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맡은 일에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청년기에 이미 영적인 사람으로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회막을 떠날 줄을 모르고 기도하였다는 성경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출33:11). 또한 12명의 정탐꾼을 각 지파에서 선발하여 가나안땅에 파송하였을 때 여호수아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때에 열 사람의 불신앙의 보 고와 여호수아와 갈렙의 신앙의 보고는 유명한 간증이 되었습니다. 결국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허락속에 모세의 안수를 받고 그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민27:18-23).그 후 가나안 7족속을 진멸하고 그 땅을 12 지파에게 분배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지도자의 궁핍을 느끼지 못할만큼 여호수아는 모세의 자리를 잘 지켰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선민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는데 자기들의 사명을 만족스럽게 바로 감당했고 선민의 지도자의 자질을 잘 갖춘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교훈과 적용 첫째, 여호수아는 영적인 자질도 좋았고 성막을 떠나지 않는 영적인 갈급함이 하나님의 큰 종이 되게 하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둘째, 12정탐꾼을 대신했던 그의 믿음은 그 민족을 대신한 영적인지도자가 되었습니다. -------------------------------------------------------------------------------- 본 문 : 수24:1-18 요 절 : (수24:15하) 1.여호수아는 그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주님과 백성을 섬기는 일에 절대 충성을 다하였다. (1) 모세의 후계자가 될 만한 여호수아의 신앙면모를 정리하여 보자(민14:1-9) 2) 여호수아는 그의 가정을 대표하여 신앙절개를 선언하였다. 개인의 신앙고백과 함께 가정적인 신앙고백은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는 힘을 얻는다. (1)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어떤 선택을 하라고 하였나?(수24:14-15) (2) 가족을 대표하는 여호수아의 확신있는 결단은 무엇인가?(수24:15하) * 신앙은 언제나 강요할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아울러 여전히 다른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결국 불신앙이다. 오직 하나님과 이방신 중 하나만을 선택하고 온 가정이 하나가 되는 길이다. 2. 신앙의 대를 잇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 1)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그의 신앙결단을 따라서 함께 다짐하였다. (1) 백성들이 장담한 내용은 무엇인가?(수24:16) (2)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이유 4가지는?(수24:17-18) 2) 백성들의 각오와 장담은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마치 베드로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이라고 장담하였으나 그 마음가짐이 얼마가지 못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1) 백성이 자신들의 힘으로 능히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나?(수24:19, (창08:21, 마26:41)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에 실패한 역사적인 이유를 이스라엘의 가정에서 찾아보자(삿02:8-10, (신04:9-10). * 신앙은 개인의 신념만으로 성공할 수 없으며 성령님으로부터 믿음의 도움을 구하여야 한다. 가정에 있어서 부모의 책임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교육을 시키는 일이다. -------------------------------------------------------------------------------- 여호수아의 가나안 침입 개시 새 지도자 여호수아 : 한 세대를 거쳐 광야에서 방황한 후 이스라엘은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출애굽에 필적하는위대한 일이다. 넓은 의미의 가나안 정복은 모세가 트란스 요로단 지방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때부터 다윗왕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가나안 땅에 침입하여 그 땅을 점령한 가나안에한정된다. 모세가 죽은 후 여호와게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이 요단 강을 건너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으로 가라. 곧 광야와 레바논에서부터 유프 라테스강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대해(지중해)까지 너의 영지가 되리라]고 하셨다(수1:1-4). 이리하여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정복의 새 지도자가 되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착하기까지의 중요한 요건은 가나안 7족과 전쟁하여 그 땅을 정복하는 일과 그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다. 구약성서의 여호수아서는 이 사실에 대한 기록이다. 가나안의 정세 : 가나안은 당시 통일국가가 아니고 반유목민의 부족연합과 도시의 혼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의 도시는 당시 2대 세력,즉남의 애굽,북의 힛타이트 혹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는 세력 사이에끼어 있는 때로는 우세한 제국에 충성을 서약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었다. 이스라엘이 점령하려고 한 당시의 가나안은 문화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그들의 성은 잘 건축되고 강력히 요새화되었으며, 높은 기술을 가지고있었다.경제적으로는 애굽, 북부 메소포타미아, 기타 나라의 넓은 범위에 걸쳐 무역을 행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이들은 큰 위협이 되었다. 모세의 가나안 공격 계획은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그것은그땅의 대략 중간 지점을 동쪽으로부터 공격 점령하여 남과 붑을 갈라놓은다음, 각 부분을 따로따로 정복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이러한 계획을 새지도자 여호수아게게 전해준 것이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침입은 주전1250년 이후의 일이다. 여리고 정탐 :여호수아의 첫 공격의 목표는 여리고 성읍이었다. 여리고는 가나안의 첫 관문으로서 그곳을 통과히지 않고는 가나안을 정복할 수없었다. 요단 강을 건너가기 전에 여호수아는 요단 강 동편 12km 지점의싯딤에 진을 치고 이곳에서 두 사람의 정탐꾼을 여리고로 밀파했다. 그들이 여리고를 정탐한 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진지로 무사히 돌아왔다. 이 일에 대해 기생 라합의 보호와 도움이 컸었다. 그들이 돌아온후 여호수아는 백성을 거느리고 싯딤의 진지를 떠나 요단 강에 이르렀다. 요단강을 건넘:이스라엘은 3일간 요단 강을 건너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이때는 바로 맥추절(4-5월경)로 우기가 끝날 무렵인 동시에 헤르몬산의융 설기여서 갑자기 물이 불어 강이 넘쳐 건너기가 매우 위험한 때였다. 그런데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자들의 발이 물을 밟고 들어서자 곧 요단강 물이 완전히 그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바닥의 마른 땅으로 건너갈수있었다.(수3:15-17). 이때 강을 건너간 자는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1,200-1,600인 정도로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강을 건널 때 강물이 막혀진 지점은 하구에서 25km상류인 [아담]부근이었다. 여기서는 강물이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의밑을 자형으로 깊이 파고들어가면서 흐르기 때문에 윗부분이 갈라져 큰언덕이 강중에 무너져내러 강물이 막히는 경우가 있었다. 실제로 아라비아의 역사가 노와이리(Nowairi)에 의하면 주전 1267년에 약4시간 동안요단강물이 그쳤다고 한다. 또 1927년 대지진때에는 여기서부터 약간 상류에 있는높이 245m 의 강안의 언덕이 추락하여 강물이 막혀 12시간 반동안 강박이 마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것은 단순한 자연현상의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이었다. 요단강의 기적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명해12 지파의 수대로 강 바닥에서 12개의 돌을 가져다가 두개의 기념비를 세우게 하셨다. 그 하는 요단강의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섰던 곳에 세우고, 또 하나는첫 진을 친 [길갈]에 세우게 하였다. 이것은 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히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기위함 이었다. 길갈의 본영을 둠 : 길갈은 여리고의 동편 31km 요단 강과의 중간 지점에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넌 후 처음으로 진을 친 곳으로서 이곳에 이스라엘 군이 본영을 두었다. 이것을 거점으로 하여 여리고와 아이성이 곧 점령되었다. 후에 기브온 사람들은 이곳에 찾아와서평화의 언약을 맺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사람들을 도와 남쪽의 동맹에대항하기 위해 길갈에서 그의 군대를 이끌고 갔다. 또한 그는 여기서 북쪽의 동맹에 대항하기위해 출정했다. 군대가 출정하는 동안 백성들은 이곳에 남아 있었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유월절을 개행하였다. 중앙 팔레스틴의 정복 여리고 성 함락 :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동북쪽 31km 요단강 하구에서 북서쪽 13지점에 있는 현재의 텔 에스술탄(Tell es Sultan)으로 판명되었다. 이곳은 팔레스틴의 관문이며 전략상의 요지로서 견고한 성벽에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 여호수아…‘믿음의 영도자’ 약속의 땅을 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40년동안 광야생활을 지도한 하나님의 종은 모세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과정에서의 지도자는 여호수아였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버금가는,모세를 계승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이 두 사람이 선민을 인도하는 기간에는 지도자의 결핍을 모르는 시절이었다.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이나 훌륭한 지도자를 만난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다. 백성이 마음놓고 살 수 있으며 안심하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그런 면에서 우리 마음에 여러가지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 나라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정말 사랑하고 세월이 갈수록 존경하고 추앙할 만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했다. 지도자의 빈곤만큼 국민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지도자를 위해서도 교회가 책임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하겠다. 훌륭한 지도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며 깨끗한 양심과 공의로운 마음이 함께 하는 사람이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종으로 모세의 뒤를 잇게 된 것은 모세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었다.(민 27:18) 여호수아는 성령으로 감동된 사람인 것을 하나님이 밝혀주시고 그에게 기름 붓도록 지시하셨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지배된 사람이었다. 이러한 영적인 축복이 그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갖고 있었던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깊은 교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좌우한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쏟은 마음의 충심이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는 사랑의 깊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세가 성막을 떠난 뒤에도 청년 여호수아는 성막을 떠나지 않고 기도했다는 표현 속에서 그의 영성을 읽을 수 있다.(출 33:11)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깊은 친교는 다른 방법이 없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함으로 사귐을 더하고 영감이 지배하는 대화식 기도를 통해 사귐의 깊이를 더해 가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경우 청년 시절에 이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분이 그를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이 선민을 위한 중요한 사역을 맡길 때 누구를 택하시겠는가? 이때에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큰 계획을 추진한 것처럼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큰 섭리를 진행하는 적임자였다. 이와같이 누구나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그 나름대로 거치는 과정이 있다. 여호수아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사용하는 원리로 생각할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쓰임 받은 모든 하나님의 종들이나 오늘날 하나님과 잘 어울려 일하는 모든 일꾼들이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영적으로 잘 적응시키는 훈련을 쌓아가자. 여호수아가 정탐꾼으로 선발되어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 신앙의 보고를 한 사건을 생각해보자. 12명 중에 10명은 불신앙의 보고를 했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보고를 했다. 이 사건은 그들이 평소에 갖고 있던 신앙의 실상을 그대로 밝힌 거나 같다. 여호수아가 평상시에 가셨던 하나님과의 교감이 이렇게 현실을 뛰어넘는 보고를 하게 한 것이다. 불신앙의 사람들의 보고처럼 아낙 자손에 비해 이스라엘 민족이 메뚜기 같이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민 13:33) 하나님이 함께 하므로 “그들은 우리의 밥”(민 14:9)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같은 여호수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이렇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과 살아 있는 교제를 나누는 성도들은 무슨 일에나 어떤 경우에서건 신앙의 답을 내릴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앙의 깊이가 되고 하나님 임재에 대한 많은 체험이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는 환경이 여호수아를 흔들 수 없었다. 열명의 정탐꾼이 40일동안 동행하면서 갖가지 불신앙의 이론을 통해 흔들었어도 여호수아는 결코 동요되지 않았다. 이같은 사실은 하나님과 묶여 있는 사람들이 현실에 대한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내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갈렙의 협력이 없었을지라도 자기 혼자만으로도 당당히 그 같은 신앙의 보고를 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신앙 속에 담겨있는 신앙의 담력이다. 신앙 안에서 더 큰 은혜를 경험해보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예정대로 이스라엘 열두지파에게 땅을 분배한 사건은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넓은 땅을 하나 같이 전쟁을 통해서 빼앗아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광야 생활을 통해서는 전쟁을 연습한 일도 없고 전쟁을 위한 전투를 훈련시킨 적도 없었다. 이러한 민족을 앞세워 모든 지역을 전쟁을 통해 정복하는 일은 얼마나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었겠는가? 그러나 여호수아는 믿음 하나로 이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여기서 한 사람의 놀라운 믿음의 결실을 확인하자.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단합된 믿음으로 얻어낸 결과가 아니었다. 백성들은 전혀 수동적이었고 여호수아 개인의 믿음이 이 큰 역사를 이루어낸 것이다. 한 사람의 믿음이 한 나라와 역사의 장래를 책임진 것이다. 하나님은 전체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때도 있지만 한 의인의 믿음을 통해 전체를 구원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것은 여호수아의 신앙과 그의 순종과 그의 온전한 하나님 신뢰의 결과였다. 인간적으로 볼 때 여호수아는 외롭고 고독했지만 하나님 한 분이 천만명의 지원자보다 더 큰 용기와 힘이 되어 주셨다. 그러므로 넉넉히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물론 많은 부장들이나 족장들의 협력으로 함께 이루어낸 일이지만 여호수아의 신앙과 지도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여호수아가 갖고 있던 특수한 신앙의 지도력을 우리도 배워야 하겠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돕는 열심이 얼마나 컸었는가 하는 것은 태양이 머물렀던 사건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심겠다(출 15:17)고 하신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초자연적인 방법을 동원하기까지 하셨던 것이다. 여호수아때 태양이 머물렀고 히스기야때 일영표가 뒤로 물러났던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컴퓨터를 통해 과학적으로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 두 사건의 시간은 24시간으로 인류 역사 속에서 사라진 하루인 것을 찾아내므로 성경을 증명하고 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이 이 날에 가졌던 감격을 상상해 보라! 미처 백성은 깨닫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양아 너는 기브온에 머무르라” 이렇게 명령했던 여호수아는 말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전쟁에서 큰 승리를 경험한 여호수아의 심경은 어떠했겠는가? 하나님과 동역하고 동사할 때 우리는 뜻밖에 큰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여호수아처럼 큰 체험은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많은 표적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살자. 하나님 사역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 우리는 믿고 순종하고 사역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자. 이것이 바로 신앙이다. ◇여호수아를 통해 얻는 교훈 여호수아가 이렇게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고 큰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청년때부터 성막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기도의 결과였다. 이와같이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소중한 일꾼이 되게도 하고 어떠한 하나님 사역도 감당할 수 있는 자질을 끌어내기도 한다. 이같은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안다. 그러나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아는 사람인가? 행하는 사람인가? 자신을 돌아보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 같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이 일을 맡길 때 우리는 걷는 것 같이 일을 진행하지만 하나님은 뛰면서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이 맡기셨고 원하는 일로 확인되었다면 주저하지도 낙심하지도 말자.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업고 마음껏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이병돈(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21 사탄, 마귀, 귀신
인물
jesus
10447 55 2006-12-29
복음서에 나타난 귀신들림과 축사(逐邪) 김지철(장신대:신약학 교수) - (막05,1-20 거라사 귀신들린 자의 치유: (마08,28-34; (눅08,26-39)을 중심으로 - 복음서기자들은 인간에게 귀신이 들리게 하는 힘, 또는 인격으로서 귀신의 존재를 보도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귀신을 축출하는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사역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강조한다. 곧 귀신축출 사건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기적사건들 가운데 결정적인 사건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예수에게서 귀신축출 사건은 병치유와 더불어 예수의 치유 기적사건 가운데 한가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로 양자는 종종 서로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별개의 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귀신축출이란 성경에서 보면 사탄의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예수의 몸을 통해 드러났다고 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시는 구체적인 모습이 예수의 행위를 통해 드러남을 비유적으로 나타내 주는 징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마가복음에 나타난 한 이야기(거라사 귀신들린 자: 막 5,1-20)를 통해서 예수의 귀신축출 사건을 살펴보려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축사자로서의 예수의 모습과 귀신들린 자, 그리고 귀신들과의 관계성을 검토해 보려 하는 것이다. 먼저 용어풀이와 복음서 전체에 나타난 흐름을 살펴보고 우리의 본문을 중심으로 석의적 분석을 기초로 하여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에 관련된 몇가지 신학적/목회적인 결론을 맺고자 한다. I. 관련 용어 이해: 사탄(마귀)과 귀신들 Satan 1. 마귀/사탄 히브리어어의 사탄(욥1,6-8.12.2,1-7; (슥3,1.2 등)은 LXX 역에서 마귀로 번역된다. 신약에서 보면 사탄은 36 번, 마귀는 34 번 등장하고 있다. 두 어휘 모두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 사도행전 계시록등에 나타난다. 많은 경위 이 두 어휘는 서로 동의어로 혼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수의 광야 시험 장면인 (막 1,13)에서는 사탄으로 나타나나, 그 병행구인 (마 4,1) (눅 4,2)에서는 마귀로 언급되고 있다. 계시록에서는 둘 다 혼용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실제로 용어사용에 있어서 마귀와 사탄은 의미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마 4,1 병행; (눅 4,2; 참조 (막 1,13; (요 13,2.27; (눅 22,3). 마귀(눅 8,12)/사탄(막 4,5)은 우선 '악한 자'로 이해된다(마 5,37, 13,19.38; (요 17,15(참조 (엡 6,11.16; (살후 3,3; (요1 2,13-14; 3,8.12; 5,18-19). 그리고 유혹자(마 4,3), 원수(마 13,39; (눅 10,19),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 이 세상의 통치자(요 12,31; 14,30; 16,11), 벨리알(고후 6,15), 바알세불(막 3,22 병행)로 불리우기도 한다. 사탄이 하는 일은 주로 사람들을 고소하고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유혹자로 등장한다(대하 21,1; (욥 1,6-2,7; (시 108,6(LXX); (슥 3,1-2; (마 4,3; (눅 22,31: 사단이 밀까브르듯 한다; (막 4,15; 8,33: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이에서 더 나아가 예수의 적대자(마 4,1-11; 병행 (눅 4,1-13), 그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마 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 귀신들의 우두머리로(마 9,34; 12, 24.26; 25,41: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가는 마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나, 요한의 경우는 6,70; 8,44; 13,2에서 마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마귀와 사탄이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용어로 나타나고 있다( 참조 (마 4,1.5.8.11과 4,10; (막 4,15; (눅 8,12; 13,16). 2. 귀신들 마귀/사탄과는 달리 귀신은 자주 복수형태로 등장한다. 신약의 경우 63번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 53번이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다. 곧 마태복음(11 번), 마가복음(13 번), 누가복음(23 번), 요한복음(6 번)에 나타난다. 귀신들은 종종 '더러운 영들'(막 1,23.26.27; 3,11), 또는 '악한 영들'(눅 7,21), '벙어리 영'(막 9,17), '벙어리되고 귀머거리된 영'(막 9,25), '병약함의 영들'(눅 13,11), '귀신들의 영들'(계 16,13.14)로 불리운다. (눅 8,2에서는 '악하고 병약한 영들'과 '일곱 귀신들'이 함께 언급된다. 그러나 단지 '영들'만으로 귀신들을 표현하기도 한다(마 8,16; (눅 10,20; (행 23,8.9). 때로는 레기온(막 5,9; (눅 8,30: 군대/많다)이라는 말을 통해서 귀신들의 숫자가 많음을 표시하기도 한다. 귀신은 주로 사람 안에 거주하면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그들을 아프게 하며 병들게 한다. 이에 예수는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신다( ). 예수의 제자들 또한 예수처럼 귀신들보다 더 강한 영의 능력을 받아 축사를 행한다. 3. '귀신들리다' 이 동사는 신약 복음서에서 13 번 등장한다. 마태복음에 7번, 마가복음에 4번, 그리고 누가와 요한복음에 각각 한번씩 나타난다. 이것은 사람이 그 안에 머무는 귀신에 의해 질병상태에 놓이는 것을 가리킨다. (요 10,21.22에 의하면 이'귀신들리다'라는 말은 '귀신을 지니고 있다'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 15,22에서는 단순히 귀신들림이 아니라, '귀신들려 고통 당하다'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곧 인간의 몸과 마음에 지니고 있는 질병의 근거가 귀신들에게 온 것을 말해 준다. 4. 귀신들의 장소와 시간 귀신들이 머무는 곳은 광야(눅 8,29: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마 12,43 병행; (눅 11,24 참조 (막 1,12.13 병행), 파괴된 곳(계 18,2), 무덤(마 8,28 병행; (막 5,2; (막 5,3 병행; (눅 8,27; (막 5,5)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에 대한 적대자 곧 귀신들이 갇힐 곳은 무저갱(눅 8,31; (계 9,1; 20,1-3 참조 롬 10,7)으로 나타난다. 귀신들이 또한 머무는 곳으로 불과 물, 공중이 나타나기도 한다(9,22; 참조: (마 17,15. 불: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하는 수단(계 20,9; 참조 (눅 9,54); 물: 귀신들의 요소다(계 12,15.16; 13,1; 참조 (막 5,1-13 병행, 공중권세를 잡은 자(엡 2,2)). 귀신이 활동하는 시간은 주로 밤이다. 밤이란 신적인 계시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악한 영들, 죽음의 영이 일하는 시간으로 나타난다(눅 12,20; 참조 (행 20,7-9). 예를 들어, 베드로가 고기낚기를 실패하는 때도 밤으로 나타나며(눅 5,5-7; (요 21,3-6), 예수가 배반을 당하는 때도 밤이다(요 13,30; (고전 11,23), 밤에 체포당한다(참조 (눅 22,53; 예수의 예언: "밤에 너희가 나를 다 버리리라"(마 26,31; 26,34 병행 (막 14,30). 귀신들은 곧 어두움을 가져오는 존재이다(계 16,10). 따라서 예수가 다시 오시는 종말의 때란 더 이상 밤이 없는 빛의 자리이다(계 21,25; 22,5). II. 사탄과 귀신들의 역할 사탄은 첫 장조에서 인간을 유혹했던 뱀과 동일시되고 있으며(계 12,9; 20,2; 참조 (창 3,1-15), 하나님과 적대하는 능력으로 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로 등장한다(막 3,23-26; (마 12,26/(눅 11,18). 사탄의 영역은 어둠의 세계이다(행 26,18; (고후 11,14). 질병과 파괴의 영들이 그에게 복종한다(눅 13,16; (고후 12,7; (살전 2,18; (딤전 1,20). 사탄/마귀는 곧 인간을 적대하는 자로서(삼상 29,4; (왕상 5,18 등), 초월적인 존재로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고소하는 자로 나타난다(욥 1,6-12; 2,1-7; (슥 3,1.2; (대하 21,1(LXX ). 또한 사탄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원수로 나타나므로 마귀의 세계는 하늘의 세계와 대립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로 귀신들 중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자다. 귀신들은 말하자면 그의 졸개들이라고 할 수 있다(마 25,41; 계 12,7.9).마귀는 곧 질병과 죽음을 가져오는 귀신들의 우두머리이다(행 10,38; 참조 (고후 12,7-9; (히 2,14; 참조 (레 20,10.13.14). 마귀는 인간을 죽음과 질병에로 몰고 갈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을 유혹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교하게 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불순종하게 하기도 한다(마 4,1.5.11 병행; (눅 4,2.3.6.13; (계 2,10; 12,9; 20,10). 예를 들면, 마귀는 예수의 비유 말씀 가운데서 곧 잡초를 밭 가운데 뿌릴 뿐 아니라(마 13,39), 하나님의 말씀의 선한 씨앗을 도둑질하기도 한다(눅 8,12). 또한 인간에게 올무를 놓고(딤전 3,7; (딤후 2,26), 인간을 죄에 빠뜨릴 뿐 아니라(요 8,44; (요1 3,8), 처음부터 살인자이고, 거짓말쟁이고, 죄인이다. 유다에게 반역하게 만들 뿐아니라(요 13,2), 인간을 교만하게하고(딤전 3,6), 형제를 미워하게 한다(요1 3,8). 따라서 모든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는 마귀의 자녀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다(요 8,44; (행 13,10; (요1 3,8.10). 사탄은 죄와 사악함의 시조인 것이다(막 4,15; (눅 22,3 병행; (요 13,27; (행 5,3; (딤전 5,15). 그러나 이러한 마귀의 사역은 일정한 시간에 제한되어 있다(계 12,12).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마귀는 천년동안 갇히울 것이다(계 20,2). 그리고 결정적인 마지막 전투 후에(계 20,10), 또는 마지막 심판 후에(마 25,41), 마귀는 영원한 불에 던지워 멸망당할 것이다(마 25,41; (계 20,10). 그러나 사실은 마귀의 다스림의 세계는 이미 무너졌다(참조 (요 12,31; 14,30; 16,11). 예수께서 이미 마귀의 일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나타나셨기 때문이다(요1 3,8). 예수께서 귀신을 내 쫓음은 곧 마귀의 세계가 종말을 고했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도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마 12,28 병행; (눅 11,20). III. 귀신들림과 예수의 귀신축출 1. 귀신들림이란 인간 안에 들어온 귀신들이 그 인간을 육적으로 영적으로 괴롭히며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예: (삼상 16,14-23: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사울)를 번뇌케 한다). 성경은 귀신들린 사람을 '귀신을 지녔다'고도 말한다(눅 4,33; (마 11,18 병행; (눅 7,33: 세례요한; 예수에 대해서 (요 7,20; 8,48.49.52; 10,20). 그러나 귀신들은 사람에게 '들어가기도' 하며(눅 8,30; (막 5,12.13; (눅 8,32.33). 능력있는 말씀에 의해 그에게서 '떠나기도' 한다(막 1,26 병행; (눅 4,35; 4,41; 8,2; (마 8,32 병행; (막 5,13/(눅 8,33; 8,35.38; (막 7,29.30; (마 17,18; (눅 11,14). 예수를 만난 귀신들이 떠나기 전에 귀신들린 자에게 소동을 일으키기도 한다(마 1,21-28; 5,1-20; 7,24-30; 9,14-29 등). 이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곧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지니고 있음으로(막 1,24; 3,11; 참조 (행 16,17) 그들이 영적 존재임을 알려준다(귀신들림의 구체적인 현상은 III. 3. 또는 IV. 3. 을 참조할 것) 2. 마가복음에는 네 개의 중심적인 귀신축출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막 1,21-28; 5,1-20; 7,24-30; 9,14-29). 그러나 그 외에도 짧은 보고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마 9,32-34; 12,22(눅 11,14); (막 1,32-34.39; 3,7-12등). 귀신축출 이야기에 나타난 귀신들린 사람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근거없는 자들로, 사회의 변두리에 쫓겨난 사람들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행동이나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열악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반드시 모든 사람이 다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귀신축출 사건(막 1,21-28)을 보면, 그 사람은 유대 사회의 중심흐름에 놓여 있는 사람이며, 그의 공동체에서 종교적인 생활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귀신들린 아이의 경우도 그 아이는 그의 가족과 함께 있었고 그 아버지와 함께 예수의 제자들을 보기 위하여 동행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막 9,14-29). 경제적으로도 그 당시 사람들의 평균수준보다 오히려 낳은 상태에 있었던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경우도 가정에 머물고 있었으며(막 7,24-30), 그녀는 딸을 집밖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딸이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고, 집을 떠나기에는 너무 그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 가정에서 그와 같은 딸을 돌보았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녀의 가정이 부유한 가정이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막 5,1-20)는 버려진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무덤 동굴에서 살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의 변두리마져도 그를 용납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그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간주되어, 성전에 들어가거나 예배에 참여하거나 종교적 식사에 참석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이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 귀신이 매우 폭력적이어서 이웃과 공동체의 자리가 그를 유리시킬 수밖에 없는 파괴적인 존재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위에 언급된 대로 귀신들림이 혼돈된,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은 때때로 그가 자신의 상황에 전혀 반대되는 성향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든지, 아니면 귀신들은 영적인 적대자를 직면했을 때 그 자신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쨋든 귀신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인간에 대한 적대적인 사역이 예수에 의해 거부됨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예수의 귀신축출 사역 1) 축사자로서의 예수: 예수는 당시 유대적인 세계관과 같이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곧 마지막 시대에 마귀와 그 세력들은 다 제거되어질 것이라는 유대 종말론의 한 단면을 가지고 계셨다(1 QS 3,24.25; 4,20-22; 1 QH 3,18; 1 QM 1,10.11 등).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귀신축출과 병치유는 말하자면 바로 이러한 유대 종말론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 또한 그것을 보여준다(마 11,4-6 병행; (눅 7,22.23). 다시 말하면 예수의 병치유와 그에 따른 귀신 축출은 구약 예언적 말씀에 대한 성취라 할 수 있다(참조 (사 29,18.19; 35,5.6; 61,1). 이를 통해 예수는 자신의 종말론적인 자기 인식과 그의 축사행위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 특히 귀신축출에 대한 종합보고인 (마 12,43-45(병행; (눅 11,24-26)을 보면 예수는 귀신을 쫓아내는 분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적대자들에 의해서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고소를 당한다(막 3,22; (마 9,34; 12,24; (눅 11,20). 이것은 말하자면 예수가 축사자로 나타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적대자들의 그러한 비난을 예수는 거절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축사자였다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고 있다. 예수는 자기 스스로 성령/하나님의 손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마 12,28; (눅 11,20)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가 헤롯을 향해 자기의 사명과 운명을 언급한 구절인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눅 13,32) 는 말씀은 바로 예수가 축사자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뿐 아니라, 축사자 예수의 이름을 빌어 축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막 9,38 병행 (눅 9,49) 그러한 명성에 걸맞는 현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축사능력은 그의 제자들(70인)에게도 전수되고 있다. 그들은 예수 앞에 나아와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라고 기뻐하며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축사자의 권위는 이미 제자들을 선택할 때 부여된 것으로 마가는 보도하고 있다. 마가에 의하면(3,14)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는 예수와 더불어 함께 있음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을 파송하는 것이다. 특히 제자 파송에서 그들의 역할은 첫째는 말씀 선포였고, 둘째는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었다. 즉 예수는 제자들에게 축사의 권위를 부여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축사를 행하는 권위의 전승은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제자들의 사 역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이에 힘입어 바울도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 16,18)고 축사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2) 귀신축출의 과정: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 귀신들린 자에 대한 예수의 치유는 대체적으로 귀신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는 축사행위로 이루어진다(마 15,21-28 병행; (막 7,24-30; 막 1,23-28 병행; (눅 4,33-37; (막 5,1-20 병행; 9,14-29 병행). 예수는 축사행위를 통해서 육체적인 질병도 치유했다. 예를 들면 맹인의 고침(마 12,22-24; (막 10,46-52 병행; 2,1-12 병행), 벙어리(마 9,32.33 병행; (눅 11,14; 참조 (막 9,14-29 병행), 중풍병(막 2,1-12 병행; (눅 13,10-17), 문둥병(막 1,40-45 병행; (눅 17,11-19), 열병(막 1,29-31 병행)의 치유등이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축사의 특징은 귀신에 대한 꾸중과 위협이다(막 1,25 병행; (눅 4,35; (막 3,12 병(행; 9,25 병행; (눅 4,39 등). 그 외에도 침을 바르는 것(막 7,31-37; 8,22-26; (요 9,6.7). 안수하는 것(마 8,15 병행; (막 1,31; 마 9,29 병행; 20,34; 막 7,32.33; 8,22-26; 참조 막 5,41 병행)도 병행된다. 여기서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축사자로서의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귀신축출의 과정을 살펴보면, a.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막 1,23: 귀신들린 사람의 소리지름) b. 귀신(들린 자)의 응답: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막 1,24)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막 5,7) c. 예수의 침묵명령: "잠잠하라"(막 1,25)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 1,25; 5,8; 9,25). 이는 축사행위에 있어서 하나의 도식이라 할 수 있다. 그 중간에 귀신을 향한 예수의 물음이 나타난다. "네 이름이 무엇인가?"(막 5,9). 이름을 질문함으로 귀신을 무장해제 시킨다. 막 9,21-22에서는 예수가 귀신들린 아이의 질병 과정을 묻는다("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d. 예수가 귀신으로 하여금 다시 귀신들렸던 자에게 되돌아오지 못하도록 명령함(참조 (마 12,43-45; 병행; (눅 11,24-26). e. 귀신들이 예수에게 관용을 요청함(막 5,10-12: 돼지에게로 들어가기 원함). f. 예수가 귀신들로 돼지에게로 들어가도록 허락(막 5,13). g. 귀신들린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다(막 5,15). h. 목격자들의 두려움과 놀라움(막 1,27: "다 노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이 과정에서 귀신의 폭력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소리지르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함/ 돼지를 물에 빠뜨림(막 5,4-5/11-13),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경련을 일으키게 함(막 1,26; 9,26).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병치유의 기적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예수와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닌 멀리있는 사람이 귀신들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귀신을 쫓아낸 경우도 있다(막 7,24-30: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는 사실이다. 3) 귀신축출의 수단: 예수의 말씀으로 귀신을 내 쫓기도 하시며(막 1,25; 9,25), 하나님의 영/손가락으로 내쫓기도 하시고(마 12,28; (눅 11,20), 자기 권위로 내쫓기도 하신다(막 9,25: 내가 네게 명령한다). 특히 성령을 통해 나타난 귀신축출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오심을 의미한다(막 3,22-27 (마 9,32-34; 12,22-30; (눅 11,14-23). 따라서 축사행위는 단지 하나님 나라의 준비나 도래의 표지라기 보다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현실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을 뜻한다. 강한 자의 비유는 그것을 말해준다(마 12,29; (막 3,27; (눅 11,21-22). 예수는 그의 축사행위에서 사탄의 능력을 박탈하고 구속한 것을 의미한다. 귀신축출 자체가 바로 메시야적 행위라는 것이다. 귀신축출은 사탄을 가두는 첫 단계이고, 마지막 심판에서 궁극적 승리가 나타날 것이라(마 13,30: 추수 때)는 말씀이다. IV. 복음서와 원시기독교회에 나타난 귀신축출 보고의 특성 1. 마태복음(마 ): 사탄과 마귀의 이름이 서로 호환되고 있지만(4,10; 12,26; 16,23), 마귀라는 이름을 보다 선호(4,1.5.8.11; 13,39; 25,41)한다. 마태는 사탄의 유혹자로서의 성격을 부각시킨다(4,13). 마태는 예수의 축사의 역할을 마가복음보다는 축소시킨다. 예를 들면 막 1,21-28의 가버나움에서의 귀신축출의 이야기를 생략한다. 마 8,24-34에 이르기까지 축사의 이야기를 담지 않고 있다(요약보고에서만 취급: 마 4,24). 그러나 마태에게서도 귀신축출의 행위는 예수의 중요한 계시행위였다(마 12,22-30). 마 9,32-34(벙어리 귀신의 축사: 눅 11,14)에서 축사는 소경과 벙어리를 고치는 메시야적 행위로 이해된다(사 42,7.16; 29,18; 35,5; 42,18-20; 43,8; 61,1(LXX)). 예수의 축사행위를 통해서 종말에 나타날 귀신들의 고통이 이미 시작됐음을 알고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는가?"라고 예수에게 묻고 있다(마 8,29). 이에 예수는 다만 귀신들을 향해 "나가라"(마 8,32)고 명령하신다. 마태에서는 예수가 기름이나 침이 아니라, 말씀으로 축사를 행하신다(마 8,16). 2. 마가복음(막 ): 마가는 곧 예수의 공적인 첫 번째 행위가 귀신축출임을 명백히 한다. 마가복음의 13 개의 치유이야기에서 가장 큰 범주는 축사(1,21-28; 5,1-20; 7,24-30; 9,14-29)인 것이다. 마가는 곧 예수의 사역의 요약보고에서 그의 귀신축출의 모습을 언급하므로 예수의 귀신축출이 그의 사역에서 지닌 의미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1,32-34; 3,11-12).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사탄의 중요한 역할은 예수를 그의 선교적 사명에서 빗나가게 하는 일이었다(막 1,13: 광야시험; 8,33: 베드로의 간청을 사탄의 요구로 이해). 만약 마가가 씨뿌리는 자를(4,3.14) 예수로 이해했다면, 사탄은 예수의 사역을 파괴하는 자로 이해한 것이다(4,15). 마가는 귀신이라는 단어를 13 번, 더러운 영이라는 단어를 11 번 사용한다. 때로는 둘을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한다(참조 3,22.30; 7,25-26). 귀신들이라는 용어는 축사의 문맥에서만 사용된다(1,34.39; 3,15). 귀신들은 사람들에게 하는 일은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소리지르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1,26). 귀신들은 곧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자로서, 자해하는 자로 묘사(5,3-5; 9,22)되고 있다. 곧 사람을 땅에 넘어지게 하며 입에 거품을 물게 하고 이를 갈게 한다(9,18). 그러나 귀신은 동물에게도 들어갈 수 있는 존재(5,11-13)로 묘사되기도 한다. 예수가 귀신을 내쫓을 때에 예수가 사용한 동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즉 '꾸짖다'( : 막 1,25; 3,12; 9,25), '입막음하다'( : 1,25-26), '명령하다'( : 9,25: 귀신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명령하다)는 동사를 통해 귀신의 사역을 제어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1,27; 2,7; 4,41; 6,1-6.14-16.49-50.54; 8,27-28)에 대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사람들 중에 귀신들도 중요 역할을 담당한다(1,24-25.34; 3,11-12; 5,7)고 말한다. 이러한 고백은 마가복음서의 시작에서부터(막 1,1), 예수의 세례받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1,11), 그리고 적대자들(대제사장)과(14,61) 이방 백부장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지속됨을 보여준다(15,39). 이러한 사실을 통해 마가는 그의 예수상을 제시하려 한다. 3. 누가복음(눅 ): 광야유혹 이야기에서 누가는 마귀가 '잠시동안 그를 떠났다'(4,13)라고 보고함으로 독자로 하여금 예수의 적대자가 다시 등장할 것을 기다리게 한다. 그렇다고 귀신들의 역사가 가롯유다에게 마귀가 들어갈 때까지 마귀가 침묵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그의 사역을 통해 귀신들과 투쟁하고 있다(4,33-37; 6,18; 7,21; 8,2.26-39; 9,37-43; 눅 10,17-18; 11,14; 13,11.32). 누가는 마가보다 더 분명하게 마귀가 원시기독교회에서도 적대자임을 말해준다(눅 8,11-12; 행 6,7; 13,5). 가장 결정적인 예수에 대한 적대는 가롯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서 예수를 배반하게 하는 것이다(눅 22,3-4). 그의 제자들도 항복하도록 만든다(눅 22,31-32: "사탄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사탄의 파괴적인 능력을 예수는 기도로서 승리한다. 또한 사탄은 제자들을 완전히 파괴시키지는 못한다. 예수의 공생애 사역중에 70인 제자의 보고가 우리에게 흥미를 끈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계속해서 예수의 말씀 곧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는 말씀을 통해 사탄의 종말론적인 멸망이 예수의 사역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모습은 사도행전에서 보다 명백하게 보여진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께서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예수는 성령을 통해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자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축사는 곧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4. 요한복음(요 ): 놀랍게도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자신이 행하는 축사의 모습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요한복음 기자가 귀신이라는 용어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가 귀신들렸다(7,20: 8,48.49.52)고 비난받고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7,20: 이는 그가 미쳤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10,21-22).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마귀로 불리우고(6,70), 사탄이 곧 유다에게 들어갔다(13,2.27)고 말한다. 8,44에서는 마귀가 예수와 대조되고 있다(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거짖말쟁이/거짓의 아비). 예수는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마귀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심판받고 무너질 것이다(12,23-36)고 말씀하신다. 한가지 눈여겨 볼 것은 공관복음서에서 사탄의 패배는 예수의 축사행위와 연관되어 있으나, 요한복음에서는 사탄의 패배는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다(요 14,30; 16,11)는 점이다. 5.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축사: 예수는 제자들에게 축사를 가르치셨으나(마 10,8 병행, 눅 9,2; 막 3,15 병행; 6,13; 눅 10,17 등), 제자들이 행한 축사는 성공(눅 10,17)과 실패(막 9,18)가 엇갈리면서 나타나기도 한다. 원시기독교회에서 축사와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마 7,22; 막 16,17; 눅 10,17; 행 3,6.16; 4,7.10.30; 16,18). 치유하는 기도(참조 행 9,40; 28,8)와 제의적인 기름부음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기도 했다(약 5,14). 또 안수를 행하거나(행 9,12.17; 28,8), 손을 붙잡거나(행 3,7; 참조 9,14). 전체 몸을 만지는 행위도 나타난다(행 20,10: 유두고; 참조 왕상 17,21; 왕하 4,34). 베드로의 구원하는 그림자에 씌우는 경우(행 5,15), 바울의 수건(행 19,12)을 놓은 경우도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치유에는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의 모든 세력을 지배하시는 주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마 28,18; (빌 2,9.10; (골 2,10.15 등). 우리는 또한 바울의 축사적인 기도를 알고 있다(고후 12,7-9). 그러나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로 바뀌고 있음을 보게된다. V. 거라사 귀신들린 자의 치유이야기(막 5,1-20 병행; 마 8,28-34; 눅 8,26-39). 1. 짜임새: 막 1,23-28이 유대 회당에서 행한 축사행위이라면, 막 5,1-20은 이방 거라사 지방 무덤가에서 행한 축사행위이다. 이 본문은 그 짜임새가 아주 명확하게 구성되어 있다. 서론과 질병의 상태에 대한 언급(1-5 절), 예수님의 귀신과의 논쟁(6-13 절), 증거자들의 태도(14-17 절), 고침받은 자의 모습(18-20)이 차례로 나타난다. 여기서 몇가지의 주제들이 반복, 또는 중복되고 있다.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2. 6 절), 귀신들린 자가 무덤에 머무는 것에 대한 묘사(3. 5 절), 귀신들의 요청(10. 12 절), 갑자기 일어난 사건에 대한 목자들의 보고(14, 16 절)가 그러하다. 또한 이미 있은 일을 나중에 기록하는 방식의 언급도 있다. 예를 들면, 귀신들린 자가 예수를 멀리서 바라보다(6), 예수가 추방명령을 내렸다(8), 귀신들린 자가 군대귀신 집혔던 자로 확인된다(15c), 도시로부터 온 증거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다시 보고한다(16 절: 돼지떼들의 일). '예수가 배에서 내려온 후 곧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2 절)는 묘사와 '귀신들린 자가 그를 멀리서 보고 달려왔다'(6 절)는 언급이 서로 긴장 관계를 이루는 것 같기도 하나 양자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바다 건너편'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옴으로(4,35; 5,21; 6,45; 8,13) 여기서도(막 5,1) 그 동안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의 한 부분임을 암시한다. 그 표현 뒤에는 각각 기적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 풍랑이 잠잠해지는 사건(4,35-41), 귀신들린 자의 귀신쫓아냄(5,1-20), 물위를 거니신 기적(6,45-52), 바리새인들의 표적 요청에 대한 대답을 하시면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막 8,13)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를 중심으로 한 모습을 살펴본다면, 바다 건너편(1 절)으로 가서, 그곳에 도착하여(2 절: 배에서 내리다),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다시 배에 타는 것으로 되어 있다(18 절). 특히 18-20 절은 선교 신학적인 동기가 들어 있다. 귀신축출의 양식/동기를 중심으로 본문을 분석해 본다면, 1)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1-2 절) 2) 귀신의 방어시도(6-7 절) 3) 예수의 축출명령(8 절) 4) 귀신의 내쫓김(종종 시위적으로 묘사된다: 13 절) 5). 목격자들의 두려움(15.20 절)과 귀신축출에 대한 소식이 퍼짐(14a.18,20). a. 질병의 특수성과 그 중증에 대한 묘사(지금까지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됨을 강조: 3-5 절) b. 치유된 자에게 행한 치유에 대한 실증(15 절: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c. 목격자들의 두려움의 반응(14.16-17.20 절: "보고 두려워하더라."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와 귀신과의 만남에서 드러난 대화와 그 결과를 보면, 예수는 a. 귀신의 이름을 묻는다(9 절). b. 귀신들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드러내며 방어적인 요청을 한다(10-12 절). c. 이제 귀신들은 새로운 자리로 내쫓김(12-13 절)을 당한다. 2. 귀신축출과정의 구체적인 설명 1)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1-2 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1-2 절). 예수가 거라사 지방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리자 마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아와 예수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람은 더러운 영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더럽다'( )는 말은 유대 종교적인 용어이다. 즉 부정한 장소인 무덤에서 그가 나왔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무덤이란 바로 귀신들이 머무는 장소이기도 하다. 거라사라는 이방지역과 더불어 무덤이라는 장소에 대한 설명은 따라서 부정함의 극대화를 드러낸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인격의 대면이다. 곧 이라는 말로서 어떤 긴장관계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즉 귀신들린 자의 부정한 영이 자기보다 강한 적대자를 만난 것 같은 낌새를 알아 이제 구체적인 도전적인 만남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2) 귀신의 방어적인 시도: 6 절의 도입부/7 절의 구체적인 시도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6-7 절). 귀신들린 자는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간청한다. 절하는 것은 예배하는 형태이다. 전적으로 복종적인 자세를 보인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방어한다. 그렇다면 6 절은 만남의 두 번째 단계인가? 여기에서 명백한 것은 예수의 우월성이 드러나고 귀신의 방어가 실패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러운 영이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있다. 이러한 귀신들의 큰 소리와 귀신들린 자의 큰 소리가 귀신축출의 설명가운데서 항상 반복되는 특성이다( : 소리지르다. 귀신들이 부르짖음: 막 5,5; 9,26; 눅 9,39). 소리지름 자체가 그가 영적인 인격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귀신들린 자는 예수에게 방어양식을 들이댄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있는가?'(단수로 되어 있다). 이는 상대방을 거절하며 그 한계를 긋는 언어인 것이다.(막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위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왕상 17,8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거라사인은 이방인으로서 높으신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그 아들로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방지역에서 더러운 귀신들에 의한 고백이라 할 수 있다. "나를 괴롭게하지 말라"는 간구에서 이미 예수의 힘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의 힘이란 귀신의 역할과는 다른 것임도 보여준다. 즉 귀신을 멸할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이시다(1,24: 나를 멸하러 왔나이까?). 3) 예수의 축출명령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8 절). 즉 귀신의 방어적인 간구 이전에 이미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는 명령을 하셨다는 것이다('나오라': ). 이는 꾸중이 담긴 전형적인 추방명령이다. 어디로 가라는 가에 대한 것은 불분명하다. 4) 귀신의 내쫓김의 진술 "허락하신 대로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13) 추방명령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즉 귀신들의 순종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에 복종했다. 여기에 축사자의 능력이 있다. 그 추방명령에 의해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간 것이다. 귀신들의 움직이는 모습, 즉 들어감과 나감은 성서에 구체적으로 진술되고 있다(참조 눅 22,3: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다). 5) 목격자의 반응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 하더라." 거주자들이 일어난 사건을 보기 위하여 왔다. 그들은 예수에게 나와서 치유받은 자가 어떻게 변모되었는지를 보았다. 그 치유의 모습은 명확하게 제시된다. 이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붙잡힌다. 이 두려움은 신현현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이해된다. 모든 보고를 들은 그들은 예수에게 그 지역을 떠날 것을 간청한다. 이 떠날 것에 대한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것이다(아니면, 소유자들이 계속적인 손해볼 것에 대한 반응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18-20: 치유받은 자, 그리고 그의 선포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 이에 목격자의 두려움과 기적적인 행위의 소식이 널리 퍼졌다(목격자들의 반응: 15.17 절) 3. 귀신들림의 특성 1)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막 1,21-28)은 예측 불가능한 무질서함을 보여준다. 그가 회당에 참여한 것을 보면 보통 때는 유대 종교사회의 주요흐름에 동참했던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 것으로 보이다. 어쩌면 영적인 적대자를 만났을 때에만 자기 고유한 모습을 보여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거라사 귀신들린 자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막 5,1-20). 그는 무덤, 곧 부정함의 장소에 그 거처를 두고 있다(3a). 그 질병은 광포함으로 나타난다(3-4). 사람들은 그를 쇠사슬로 묶어둘 수도 맬 수도 없었다. 그는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다. 이는 귀신의 광포함을 가리킨다. 그뿐만 아니라 밤과 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지르는 것이다(5). 통제할 수 없는 슬픔과 한 맺힘이 그를 붙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덤이라는 장소와 그의 행동 모습이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돌로 상하게 하는 것이다(5). 이러한 자학은 자기 파괴적인 충동에 의한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이러한 전체적인 진술은 귀신들의 이름이 레기온으로 주어지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즉 막대한 힘을 가지고 모든 묶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만약 한 사람 안에 2000 귀신이 거주한다면, 그는 무한한 힘을 사용할 것이다(이사야 65 장(LXX)은 귀신들림의 질병을 묘사하는 기본본문으로 이해됐다. 사 65 장에서 이방인들은 산에서 우상/귀신들에게 제사드리며(3 절), 무덤에서 사는 자들이고(4 절), 돼지고기를 먹는 자들이다). 산 사람과의 교제는 끊어지고 소외되고 상실된 인간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2) 귀신들은 인격적인 존재로 설명된다. 그들은 계시적인 비밀, 예를 들면 예수의 정체성을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자기의 운명을 알기에 예수로부터 침묵하도록 요청 받기도 한다(막 1,24.34 병행; 눅 4,34.41; 막 3,11; 5,7 병행). 귀신들린 자의 소리침은 곧 귀신들의 소리침으로 이해된다(참조 막 1,23 병행; 눅 4,33; 막 3,11; 5,5; 5,7 병행; 막 9,26 병행; 눅 9,39; 눅 4,41). 귀신은 귀신들린 자에게 경련을 일으킴으로 자기의 광포함을 드러내며, 귀신들린 자가 자기에게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막 1,26 병행; 눅 4,35; 8,29; 막 9,18.20 병행; 눅 9,39.42). 3) 축사의 과정 a. 이름을 물음: 9 절: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많은 귀신에 붙잡힌 것에 대한 표현이다. 9-12 절에서 단수와 복수가 계속적으로 뒤바뀐다. 내 이름은...우리가 많음이다. 우리를 돼지에게로... 막 1,24 에서는 단수와 복수가 혼용되어서 등장한다. 이는 인격적인 분열 때문인가? 아니면 속임수의 변명인가? 명백한 것은 예수가 오신 것은 사탄의 세력들을 멸하기 위함이다. 예수의 질문은 귀신에 대한 강압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b. 허용요구: 귀신들의 복종의 고백과 예수에 대한 요구가 함께 나타난다. 돼지떼가 바다로 빠진다(구약에서 바다란 종종 파멸의 자리이다). 결국은 귀신들이 그 파멸의 구덩이에 빠진 것을 의미한다. c. 추방명령: 예수의 우월성과 귀신들의 종속성이 뚜렷하게 대비되어 있다. 예수의 추방명령은 다른 때의 예수의 부드러운 온유함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여기서 귀신에 대한 예수의 분노가 들어있다고 해도 옳을 것이다. 13 절에서 귀신들의 나옴과 들어감이 묘사된다. 귀신들의 상하고 파괴하는 활동성을 드러난다. 광포와 자기 파괴적인 분노가 드러난다. 돼지떼에게 돌진하는 모습( )은 인간적인 판단에 의해서 조절되지 않는 격렬한 움직임을 뜻한다. 귀신들린 자의 광포가 돼지에게 전가되었고 곧 자기파괴가 명백히 드러났다. 귀신들린 자는 스스로 돌로 상해했으나, 돼지 떼는 언덕길로 내달아 물에 빠져 죽었다. 생명을 상하고 파괴하는 더러운 영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4) 귀신들림에서 치유 5,15b에서 3-5 절에서 보였던 광포한 모습이 전적으로 변화되어 있다. 그는 예수 곁에 앉아있다. 소리지르고 스스로 상하게 하는 대신에 정신이 들어 있다. 광포대신에 이성으로 되돌아왔다( 은 의 반대개념이다). 그는 전에는 벌거벗고 돌아다녔으나, 이제는 옷을 입고 있다. 예수의 귀신축출은 귀신들린 자를 조용한, 그리고 이성적인 정신상태로 되돌려 보냈다. 예수는 그를 귀신들로부터 자유하게 했다. VI.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반성 1. 예수가 축사자로서 활동하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도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의 질병을 귀신에게로 돌렸다(더러운 영/ 더 악한 영: 마 12,43-45 병행; 눅 11,24-26; 벙어리 귀신: 눅 11,14; 벙어리의 영: 막 9,17.25; 연약함의 영: 눅 13,11; 참조 눅 8,2). 따라서 치유란 귀신을 쫓아내는 데 있었다(마 9,33; 10,8; 12,24.27.28; 막 1,34.39; 3,15.22; 6,13; 9,38; 16,9.17; 눅 9,49; 11,15.18-20; 13,32). 예수는 육체적인 연약함, 예를 들면 소경(눅 7,21; 마 12,22-24; 막 10,46-52 병행), 벙어리(막 9,14-29 병행; 마 9,32.33 병행; 눅 11,14), 중풍병(막 2,1-12 병행; 눅 13,10-17), 문둥병(막 1,40-45 병행; 눅 17,11-19), 열병(막 1,29-31 병행), 게다가 마음과 정신의 질병까지도 귀신을 내 쫓음으로 치유했던 것이다(막 1,23-28 병행; 눅 4,33-37; 막 5,1-20 병행; 7,24-30 병행; 9,14-29 병행). 말하자면 예수시대에 귀신을 축출하는 것과 질병을 고치는 것은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되었다(막 1,32-34 병행; 눅 6,18.19).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이 양자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귀신들림과 정신질병, 또는 귀신과 육체적인 질병과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귀신들림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광포함/자기상해 등의 귀신들림의 전형적인 모습과 정신질병과를 구분할 수 있는가? 2.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마 11,4-6 병행; 눅 7,22.23) 있어서 예수는 그의 치유를 구약의 성취로서 해석했다(참조 사 29,18.19; 35,5.6; 61,1). 유대주의의 종말론적인 기대가 귀신들에 대한 예수의 승리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막 3,27 병행; 참조 눅 13,32). 만약 예수가 하나님의 성령/손가락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이라면(마 12,28a/눅 11,20a),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한 것이라(마 12,28b 병행; 눅 11,20b)는 말씀이다. 따라서 바알세불에 의해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에 대해서 단호히 거절하신다(막 3,22 병행). 예수의 영을 잘못 이해하는 자는 곧 거룩한 성령에 대한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짓는 것과 같다(막 3,28-30 병행)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축사는 마귀의 힘을 종말론적으로 제거했다는 표징이며, 동시에 마귀와 싸워 승리함으로 예수가 마지막 승리자가 됐다는 증거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이 쫓겨나가는 자리에는 항상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가장 구체적으로 세워지고 있는 자리를 어디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이 시대에도 인간을 개인적, 집단적으로 억압하며 파괴시키는 세력들을 향해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축사적 행위를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3. 예수는 귀신적인 인간/음식의 불결함에 대해 결코 두려워하거나 기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본질을 바꾸어 버렸다. 그는 친히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었고 질병들린 사람의 동무가 되심으로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함을 몸으로 보여주었다(마 9,10 병행; 막 2,16; 눅 5,30; 15,2; 행 10,1-11,18; 갈 2,11-14). 또한 귀신들린 자와 귀신과를 구별함으로써 귀신들린 자와 귀신을 동일시하며 귀신들린 자를 사회와 종교에서 영원히 제거하는 당시의 관습을 타파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종교사회의 판단에 의해 억압되어 있는 인간 본연의 가치를 드러내고, 한 인격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다시 가정과 종교적 사회로 되돌려 보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정결/부정결에 대한 판단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그 판단으로 사람들이 자유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억압받게 되는 것인가? 우리의 가정과 사회, 그리고 종교는 오히려 이러한 갈등과 억압을 증폭시키고 한 맺힘이나, 억압에 대한 저항적 세력화된 귀신들림을 만들고 있는 주범은 아닌가? 4. 예수는 축사행위를 할 때에 어떤 고정된 축사양식을 도입하지 않았다. 어떤 특별한 도구도 사용하지 않고(예를 들면, 의약품/기구/향료등), 또한 어떤 권위에도 호소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한 권위를 갖고 축사를 행한다(마 12,28; 눅 11,20). 그렇다면 오늘의 축사 행위는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가? 우리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는 않는가? 5. 예수의 축사행위 자체에만 관심가진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마 7,22-23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행위 없이 축사가 행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님을 분명히 선언한다. 그것은 마치 사랑이 없으면 그 성령의 은사가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고전 13,1-14,1). 따라서 예수의 축사사역에는 인간을 파괴하는 귀신들에 대한 분노와 동시에 인간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들어가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귀신축출의 목표는 귀신들린 자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가정과 종교에로의 회복, 그리고 또한 평화를 누리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긍휼 때문에, 그리고 인간을 파괴하는 사탄과 그의 세력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이 길을 가고 있는가?
20 노아(Noah)
인물
jesus
6953 27 2006-12-26
▶ 노아(Noah) 뜻 : 위로 1) 아담의 8세손 2) 레멕이 182세에 낳고 노아라 이름하니 뜻은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우리가 수고 하는 것을 이 아들이 위로한다 하는 뜻인데 그것은그리스도의 오실 표적이다 (창05:28). 3) 시대가 악하여(눅17:27) 홍수로 진멸하시고자 하실 때 오직 노아만이의로운 고로 방주를 만들고 피하라고 미리 지시하셨다. 120년간 방주를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간 후 40일동안 비가 내려 창수가 나서 지상의모든 산을 넘쳐 방주밖에 있는 생물은 다 죽어 버렸다. 5개월 후부터물이 줄기 시작하여 7개월만에 완전히 물이 빠지니 꼭 1년 10일을 방주에서 살았다. 방주가 머문 산은 5,185미터의 아라랏 산이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물로 멸하지 않기로 약속하시고 그 표로 무지개를 주셨다. 노아는 홍수 뒤에 350년을 더 살아있어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950 세에 세상을 떠났다. 홍수 때에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 부부, 아들 셋, 며느리 셋 도합 8명이었다 (창09:). 노아는 ( 의인 )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06장) * 지금 영국의 박물관에는 옛날 니느웨 성터에서 발굴한 비가 있는데 그비문에 노아 홍수 때 엇나비스듬이 서적을 가지고 방주로 들어갔다고기록 되어 있다. 엇나비스듬이란 노아를 가르친 말이다. 이때에도 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Noah Noah, a righteous man of ancient Israel, had three sons Shem, Ham, and Japheth. God, outraged with immoral behavior of humans, made a decision to get rid of them. But among the sinners there was "a righteous man, blameless in his generation" (Gen. 6:9). So He ordered Noah to build an ark and take on it the family and seven pairs of ritually cleaned animals, a pair of each unclean animal, and seven pairs of each type of bird. After that the great Flood started, which went on for 150 days and annihilated the sinful progeny of Adam and Eve. Then He stopped the rains. It took another 150 days for the water level to drop low enough to let the ark to rest on the mountain of Ararat. Another 40 days Noah 's family did not leave the ark, testing the situation: first they sent out a dove, which returned because it did not find a dry place to land; a week later the dove returned with a fresh olive leaf in its beak, which indicated that land started to dry; another week passed and that time the dove did not return, because "the face of the ground was dry" (Genesis 8-13). The survivors left the ark and Noah built an altar and prayed, and offered sacrifices of clean animals to God. Another episode with Noah, which is also used in fine art, takes place after the Flood. Noah discovered the process of making wine, and once got drunk and fell fast asleep. He lay naked in his tent when his son Ham saw him and invited other brothers to laugh. More respectful Shem and Japheth walked backward into their father's tent and covered him with a cloth. In punishment for the insult to himself Noah cursed his son Ham with the words: "A slave of slaves shall he be to his brothers" (Genesis 9:25). ========Paintings Noah Bosch Noah's Ark on Mount Ararat. Feodor Bruni Flood. Michelangelo The Sacrifice of Noah. Michelangelo The Flood. Millais The Return of the Dove to the Ark. Nicolas Poussin Winter. The Deluge. Paolo Uccello. The Deluge. Giovanni Bellini. Drunken Noah. Michelangelo The Drunkenness of Noah. ------------------------------------------------------------------ ▶ 죄악의 심판 경고하는 순종의 「의인」/노아 노아는 위로라는 뜻입니다.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으로 라멕의 아들이었습니다(창05:28∼29). 노아는 의인이었고 당세의 완전한 사람이며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창06:9∼10). 하나님께서 죄가 관영한 세상을 심판하실때 노아를 선지자로 삼아 1백20년 동안 회개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노아시대의 홍수 심판과 소돔, 고모라의 불 심판은 세상 끝에 있을 마지막 심판의 시범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한 사회와 국가를 심판하실 때 끝까지 권고하고 최종적으로 심판하십니다. 회개의 기회를 선용해야 합니다. ▷교훈과 적용◁ 첫째,노아는 당세의 의인이었습니다.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윤리적인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완전했고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할 수 있는 종교적인 의인이라는 뜻입니다.우리는 자신에 대해 부끄럽지 않고 하나님께 대해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둘째,노아는 특수한 순종의 시범자였습니다.1백20년을 하루같이 순종하여 방주를 예비하고 하나님의 예언을 믿었습니다.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노아는 신앙의 시범자입니다.일시적으로 믿는 믿음의 고백은 누구나 가능합니다.그러나 노아와 같이 온 세상이 타락할때 자기 가족만 믿었다는 것은 놀라운 믿음입니다.주변 사람이나 당시의 상황이나 여건이 노아의 신앙을 흔들 수 없는 하나님과의 친교의 신앙이었습니다.더우기 1백20년동안 의를 전파했습니다(벧후02:5). ----------------------------------------------------------------- ▶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方舟)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을 칠하라 (창 6:14) 칠월 곧 그 달 십 칠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감하여 시월 곧 그달 일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창08:4 - 5) -------------------------------------------------------------------------------- 지구의 신비 / 대홍수 입증 기독학자들은 지구상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각종 화석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입증한다. 다지층나무화석이 그 한 예다. 다지층나무화석은 커다란 나무가 몇개의 지층에 걸쳐 화석상태로 발견된 것으로 미국 테네스주에서 발견된 래피도덴드리드나무도 그중 하나다. 이 나무는 6m의 길이로 여러 퇴적암층을 관통해 뻗어있다. 진화론에 의하면 몇개의 지층이 형성되려면 엄청난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나무 화석은 그 세월을 무시한채 세로로 세워져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일시적인 지각의 변동으로 나무가 지층을 뚫고 화석화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변동이란 홍수를 뜻한다고 한다. 북부 시베리아 해안을 따라 알래스카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에는 약 5백 만마리의 맘모스 시체가 매장돼 있다고 한다. 이들 맘모스가 짧은 순간에 파묻혔다는 증거가 많이 있으나 특히 위와 입속에서 채 소화가 안된 녹색식물, 야생콩등이 발견된 점이 이를 증명 한다고 한다. 일부 진화론자들은 이를 두고 먹이를 취하려다 강이나 절벽으로 떨어져 죽은 것이라고도 하지만 5백만마리가 한꺼번에 추락해싸는 가정은 현실성이 없다. 결국 맘모스의 떼가 대홍수에 의해 순식간에 멸망됐다고 생각하면 의문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다. 미국 남다코라주 블랙힐즈에 있는 불가사리와 똑같다는 점에서 창조론을 뒷받침한다고 이야기 되어진다. 즉 전혀 진화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홍수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창조가 입증되면 홍수도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학자들은 이를 자료로 사용한다. 네브래스카의 화석지층에서 발견된 코뿔소 낙타 멧돼지등 9천여마리 동물들의 뼈 화석은 석회암 언덕에 길게 뻗쳐있어 분명히 물로 인해 묻히게 됐음을 입증한다고 한다. 텍사스의 파룩시강에선 껍질을 닫은 상태인 조개와 보통의 경우 화석이 되기 힘든 벌게들의 화석이 발견됐다. 어떻게 이런 생물들이 화석으로 됐을까. 이것도 대홍수사건을 인정해야만 의문은 풀리게 될 것이란 주장을 기독학자들은 펼친다. 대규모 홍수에 휩쓸린 침전물들이 덮쳐 급격히 화석화 됐다는 것이다. -------------------------------------------------------------------------------- 노아… 하나님의 눈에서 사랑을 보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길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재림할 때의 상황이 어떠할 것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눅17:26∼27) 모든 사람들이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고 있을 때 노아는 그 식구와 함께 묵묵히 거대한 방주를 만들고 있었다.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여 하나님은 지면의 모든 사람과 생물을 다 없애버리기로 작정하셨으나 노아와 그의 식구만은 살려두시기로 하고 거대한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셨던 것이다.노아는 그 무서운 심판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가족과 함께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이 말씀을 본래의 원문대로 해석하면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사랑을 보았더라” 사람들은 평소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다가 잘못을 범하여 그분이 진노하실 때에 비로소 떨면서 용서를 구한다.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분을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더 섭섭하게 한다.하나님은 그 자녀를 사랑하셔서 매를 드시는 것이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그러나 노아는 달랐다.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를 다 쓸어버리겠다고 무서운 작정을 하실 때에조차 하나님의 눈에서 사람을 향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을 발견했던 것이다.성경은 노아가 구원받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아담과 하와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고 완전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노아가 그 비밀을 일러주고 있다.하나님의 본심,즉 그분의 마음을 아는 자가 의인이고 그분을 이해하는 사람이 완전한 자로 인정받는 것이다.노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 방주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창 6:14) 하나님께서 설계해 주신 방주의 규모는 길이 150m,너비 25m,그리고 높이가 15m이며 구조는 3 층으로 되어 있었다.노아는 세 아들과 함께 그 거대한 방주를 어떻게 건조할 수 있었던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대형 선박을 건조하려면 건축·기계·항해기술을 아우르는 종합기술이 필요하다.그러나 당시 이 세 가지 기술은 모두 가인의 자손들이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창04:17∼22) 노아는 방주를 만들기 위해 세 아들을 가인의 성에 보내어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게 했을 것이다.홍수 이후의 문명 전개로 보아 셈은 건축기술,함은 기계기술 그리고 야벳은 항해기술을 습득했던 것으로 보인다.홍수 이후에 셈의 자손은 메소포타미아에 큰 성들을 건축했고 함의 손자 니므롯은 무기를 제작했으며 야벳의 자손들은 바닷가로 나가서 어업에 종사하며 살았기 때문이다(창10:5∼12). 기술 문제는 해결했어도 인력을 동원하는 문제가 또 있었다.노아는 방주 건조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비싼 임금을 지불하고 그들을 고용해야 했을 것이다.그들에게 지불할 재화를 준비하기 위해서 노아와 그의 식구는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그리하여 방주는 완성되고 노아의 식구는 방주로 들어갔으나 방주 건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노임만 챙기고 다 가버렸다. “7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창07:10) 홍수가 덮이기 7일 전에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이 이미 방주로 들어가서 기다렸다는 기사는 우리에게 위안이 된다.하나님께서 환난이 있기 전에 그 택하신 자들을 미리 단속하여 방주에 들어가게 하셨기 때문이다.그러나 장차 닥쳐올 마지막 환난이 언제 시작될지 모르므로 우리는 7일전의 시점도 계산할 수 없다.그래도 성경은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 택하신 자들을 구하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창 7:16) 사람의 씨를 홍수 이전의 세상에서 홍수 이후로 건너오게 하는 임무에 최선을 다 한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첫 농사를 지어 넉넉한 소출을 거두자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의 장막에서 벌거벗은 채로 잠이 들었다.둘째아들 함이 부친의 장막에 들어갔다가 그것을 보고 나와서 말하니 셈과 야벳이 옷을 들고 뒷걸음질쳐 들어가 아비를 덮어주었다.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노아가 세 아들의 장래를 예언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 9:26-27) 함의 넷째아들 가나안의 자손들은 장사에 재능이 있어 후에 지중해 연안의 무역을 장악하는 큰 장사꾼이 되었는데 그 장사에는 ‘정보활동’이 필수적이었다.함의 결정적 실수는 자신이 획득한 정보로 부친의 프라이버시를 공개한 것이었다.이후로 함의 아들 가나안의 자손은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슥14:21) 김성일<한세대 교수>
19 요시아(Jos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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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6 21 2006-12-27
▶ 요시아(Joslah) 뜻:여호와는 구원이시다. 고치시다 [1] 남국 유다의 왕. 부왕이 살해 당한 후 8세에 왕위에 올라 30여년을 통치 했 다(B.C.640-609). 그의 치세중 특기할 것은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율법책(신명기)에 의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이었다(왕하22:3,8 (대하34:8). 이 개혁은 유다 뿐 아니라 북국 이스라엘에 까지 미쳤는데 이는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를 압제하고 있는 앗수르의 세력을 배제하는 운동이기도 하였다. B.C.612년 앗수르는 멸망했으나 그는 바벨론과 애굽과 의 싸움 에 휩쓸려 므긱도에서 전사했다. [2] 스가랴 시대 사람으로 스바냐의 아들(슥06:10). [3] 예수의 선조중의 한 사람(마01:10).
18 베냐민(Benj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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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2763 14 2006-12-27
▶ 베냐민(Benjamin) 뜻:오른손의 아들 [1] 라헬에게서 낳은 야곱(Jacob)의 막내 아들. 요셉의 친동생. 라헬이 그를 난산하고 죽을 때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라 불렀으나 야곱은 그 이름이 불길하닿 하여 베냐민 이라고 했다. 유대인으로 오른 손을 중요시했다(창46:21). 이스라엘 첫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다(삼하02:9,15). 사도 바울도 베냐민 지파였다(빌03:5). 이스라엘 12지파 -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스불론, 잇사갈, 단, 갓, 아셀, 납달리, 요셉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2] 빌한의 아들. 베냐민의 자손중 한 사람(대상07:10). [3] 하림의 아들. 외국 여인과 결혼한 사람(스10:32). [4] 예루살렘 한 성문의 이름(렘20:2, (렘37:13, (렘38:7), (슥14:10).
17 학개(Hagg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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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3 11 2006-12-28
▶ 학개(Haggai) 뜻:쾌락,즐거운 축제일 (1) 12소선지중의 한 사람으로 학개서의 저작자(학01:12,13, (학02:1). (2) 그는 혹 어떤 축제일에 출생한듯하다. 스가랴와 동시대 사람(슥05:1, (스06:14). (3) 바사왕 다리오 1세 제2년 주전 520년 6월에서 9월까지 예언하였다. 그의 예언 내용은 이스라엘 잭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후 의식주 생활 에만 치 중하고 재건을 위해서는 괸심이 없엇기 때문에 이 사실 을 책망하 고 격려한 것이다. (4) 2:3의 말이 파괴이전의 솔로몬의 성전을 직접 본 학개의 말이라면 그가 활동을 했던 시기는 노년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 구약성경 학개서의 필자 성경:에스라 5장1절, 6장14절 (에05: (에06:) 학개는 「축제」 혹은 「즐겁다」는 뜻이다. 학개는 스룹바벨 총독과 여호수아 제사장 시대의 사람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선지자로서 귀환 사역과 귀환 이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훌륭하게 지도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선지자 학개는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확신이 분명했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 재건을 집중적으로 권면한 선지자였다.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 자기 백성의 태만과 불충성을 책망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곧바로 성전 건축을 시공하였으나 주변 사람들의 모략과 상소로 인해 공사는 15년 동안 중단됐었다. 그후 다리오왕 2년에 왕의 금지령이 풀려 다시 공사가 시작됐다. 학개 선지자는 정치적인 압력 때문에 공사가 중단된 점을 시인하면서도 백성의 무관심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말해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집을 세우는데 열중하여 성전 건축에 대해 불충성했다는 것이다. 학개는 많이 뿌려도 소득이 적고 너희 수입은 구멍뚫린 전대와 같다고 책망했다. 여호와께서는 내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 건축에 빨랐다고 학개 선지자를 통해 지적했다. 여호와는 『너희는 먼저 산에 올라가 나무를 찍어다가 내 전을 건축하라. 그때 내가 재앙을 금하고 곡물과 땅의 소산과 육축까지 축복하리라』고 약속하셨다. 학개는 성전 재건을 위해 영적으로 크게 공헌한 사람이다. (교훈과 적용)
16 다리오(Darius)
인물
jesus
6645 10 2006-12-26
▶ 다리오(Darius) 뜻:강박하는 사람 [1] 메대의 다리오는 벨사살이 변사한 뒤를 이어 바벨론을 통치한 자(단05:31). 120방백을 감독하는 3인중 다니엘을 그 한 사람으로 삼았고다니엘이 사자굴에서 이적으로 구출된 후 전국에 선포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였다. [2] B.C. 521년에 대 바사 왕으로 선언한 히스다페스의 아들로 역사상 대전략가중의 한 사람이 다. 헬라를 정복하려던 계략이 마라돈 전쟁의패전으로 실패하였으니 세계사에 크게 기록 된 장면이다. 다리오가통치하는 동안에 유대 백성은 자유 스러운 생활을 하였으며 성전 중수공사를 계속하였다(스06:15). [3] 바사의 다리오는 바사의 마지막 임금 고노마노인듯 하다. B.C. 330년에 알렉산더 대왕 에게 패망하였다. ▶ 다리오 Darius Dari'us. 1. DARIUS THE MEDE, son of Ahasuerus. He was probably the Astyages of the historians. Some supposed 'Darius' to be a title and not a name, but the name has been found on the monuments. On the death of Belshazzar he possessed Babylon, being about 62 years of age: B.C. 538-6. Dan. 5:31; Dan. 6:9-28; Dan. 9:1; Dan. 11:1. See BABYLON and DANIEL. (단05: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때에 다리오는 육십 이세였더라 (단06:9-28; 사자굴 속의 다니엘 (단09: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단11:1 내가 또 메대 사람 다리오 원년에 일어나 그를 돕고 강하게 한 일이 있었느니라 2. DARIUS HYSTASPIS, king of Persia: B.C. 521-485. He confirmed the decree of Cyrus in favour of the Jews, and the building of the temple. Ezra 4:5, 24; Ezra 5:5-7; Ezra 6:1-15; Hag. 1:1, 15; Hag. 2:10; Zech. 1:1, 7; Zech. 7:1. To this king is ascribed the consolidating of the empire of Persia. (스04:5, 24; 5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의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경영을 저희하였으며 24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전 역사가 그쳐서 바사 왕 다리오 제 이년까지 이르니라 (스05:5-7; 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아 보셨으므로 저희가 능히 역사를 폐하게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고하고 그 답조가 오기를 기다렸더라 6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동료 강 서편 아바삭 사람이 다리오 왕에게 올린 글의 초본이 이러하니라 7 그 글에 일렀으되 다리오 왕은 만안하옵소서 (스06:1-15; 총리가 된 다니엘을 모함하다 (학01:1, 15; 1 다리오 왕 이년 유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5 때는 다리오 왕 이년 유월 이십 사일이었더라 (학02:10 다리오 왕 이년 구월 이십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슥01:1, 7; 1 다리오 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7 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 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슥07:1 다리오 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3. DARIUS THE PERSIAN. Darius Ochus (Nothus) of the historians, B.C. 424-405. Only mentioned in Neh. 12:22. For a list of the Persian kings see PERSIA. (느12:22 엘리아십과 요야다와 요하난과 얏두아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이 모두 책에 기록되었고 바사 왕 다리오 때에 제사장도 책에 기록되었고 --- Morrish Bible Dictionary ▶ 페르시아왕/다리오 ◎개종한뒤 하나님 믿도록 포고령 성경:에스라 6장1절∼15절 다리오는 「선한 것을 지지하는 자」라는 뜻이다. 바사왕인 다리오는 아카이메네스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은 비슈타슈파의 아들이었다. 다리오는 조로아스터 교도였으나 사자굴에서 살아남는 다니엘의 기적을 보고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다. 다리오 왕은 지혜와 능력을 갖추어 그 시대에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을 만큼 뛰어난 제왕이었다. 그가 통치한 지역은 소아시아, 애굽, 동쪽으로는 인도의 국경에 이를 만큼 넓었다. 1백20명의 방백을 세우고 전국을 1백20개 지역으로 구분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또한 세 사람의 총리를 두어 방백들을 다스림으로써 중앙 집권적인 정치가 가능케 하였다. 다리오왕은 국토를 확장했고 화폐와 우편등 많은 제도를 개혁했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특기할 사실은 그가 전국 각도에 조서를 내려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모든 백성에게 명령한 사실이다. 다리오는 하나님을 사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으며 그의 권세는 무궁하며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땅과 하늘에 이적을 베푸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다니엘6:24∼27). 다리오의 또 다른 공로는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을 그의 통치 2년에 재개하여 4년만에 완공시킨 사건이다. 그는 이 성전 재건에 대한 명령에 있어 아주 엄격했고 어떠한 반대의 이론도 있을 수 없게끔 강력히 지원했다. 다리오는 개인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축복받은 사람이다. ▷교훈과 적용◁ 첫째 다리오 왕은 유능하고 성공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었다.영적인 지혜가 있어야 한다. 둘째 지도자는 통치력,행정력이 구비되어야 하지만 먼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이병돈·은평교회목사〉
15 헬대(Heldai)
인물
jesus
1545 9 2006-12-28
▶ 헬대(Heldai) 뜻: 인내 [1] 느도바인 바아나의 아들인데 다윗의 용사중 한 사람으로 12월을 차지한 제12장관이 다(대상27:15). [2]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에 귀환한 유대인다다(슥06:10). ▶ 헬대 Heldai. [Hel'dai] 1. A Netophathite, a descendant of Othniel, and one of David's captains. 1 Chr. 27:15. (대상27:15 십이월 열 둘째 장관은 옷니엘 자손에 속한 느도바 사람 헬대니 그 반열에 이만 사천명이었더라 2. One who returned from exile, Zech. 6:10 (probably the same as HELEM in Zech. 6:14), who apparently had gold and silver of which crowns were made, to be 'for a memorial in the temple of the Lord.' (슥06:10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었나니 너는 이 날에 그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취하되 --- Morrish Bible Dictionary
14 스룹바벨(Zerubbabel, Zorobabel)
인물
jesus
5374 7 2006-12-27
▶ 스룹바벨(Zerubbabl) 뜻 : 바벨론에서 낳았다 다윗의 후예 스알디엘의 아들로서 바사인들은 세스바알이라고 부른다. 바벨론 포로시에 생장하여 그곳에서 양을 치다가 바사왕 고레스가 유대인을 석방하여 고국으로 귀환시킬 때 인솔자가 되어 느부갓네살이 약탈하여 갔던 성전 기명을 찾아 가지고 5만명의 동족을 인솔하여 고국에 돌아와 성전과 성곽을 재건 하였다 (스01: ~ 5:), (눅03:27). ======== Zerubbabel. [Zerub'babel] Zorobabel. [Zorob'abel] Probably son of Pedaiah, and nephew and heir of Salathiel, or Shealtiel, though called his son. Be was a 'prince of Judah,' and he apparently held some office in Persia as he is called SHESHBAZZAR. Ezra 1:8-11. He was head of the Jews who volunteered to return from exile, under the decree of Cyrus. To Zerubbabel was also committed the charge of 5,400 vessels of gold and silver that had been carried away from Jerusalem. (스01:8-11 An altar was erected, and sacrifices offered; but the foundation of the temple was not laid till the second year. Then the adversaries of Judah and Benjamin came and wanted to assist in the building of the temple; but Zerubbabel and those with him declined their help. This act of faithfulness drew upon them the open opposition of their enemies, who also obtained authority from Persia to stop the work, though apparently they had ceased to build before this took place. It was not resumed for about fifteen years, till Zerubbabel's faith was roused to renewed energy by the rebukes and appeals of the prophet Haggai, and by the glorious promises addressed to him by Zechariah. Zerubbabel was aided by Jeshua the high priest, and at once began to build. When questioned by the Persian governors as to their authority for so doing they nobly replied, "We are the servants of the God of heaven and earth." Cyrus had made a decree that the temple should be built; but God's word to Zerubbabel was "not by might, nor by power, but by my Spirit, saith Jehovah of hosts." Darius was now on the throne, and on the rulers writing to Persia, he ordered them to let the work alone, and directed that the expenses of the Jews should be paid out of the royal revenue. The house was finished in the sixth year of Darius, and dedicated with joy. Jehovah had said, "The hands of Zerubbabel have laid the foundation of this house; his hands shall also finish it." Zech. 4:6-10. (슥04:6-10 We do not read of Zerubbabel after this. In Zechariah 4 this son of David is taken as a type of Christ, the promised Son of David, who will be the cause in a yet future day of the temple being built with shoutings, of "Grace, grace unto it." The name Zerubbabel has been interpreted both 'dispersed in Babylon,' and 'blessed in Babylon.' 1 Chr. 3:19; Ezra 2:2 to Ezra 5:2; Neh. 7:7; Neh. 12:1, 47; Hag. 1:1, 14; Hag. 2:2-23. He is called ZOROBABEL in Matt. 1:12, 13; Luke 3:27. (대상03:19; (스02:2 ~ (스5:2; (느07:7; (느12:1, 47; (학01:1, 14; (학02:2-23. (마01:12, 13; (눅03:27. --- Morrish Bible Dictionary
13 멜기세댁(Melchisedec)
인물
jesus
5036 6 2006-12-26
▶ 멜기세댁(Melchisedec) 뜻:의의 왕 아브함 시대의 예루살렘 제사장(창14:18). 후대에 이상적인 왕의 전형이 되어 이러한 왕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 사장"이라고 칭하게 되었다(시110:4). 히브리서에서 그의 특이한 지위를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논하고 있다(히5:6-10, (히7:). -------------------------------------------------------------------------------- 멜기세덱…떡과 포도주의 아브라함 축복 구약성경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히브리’ 민족과 ‘가나안’ 민족의 전쟁사이다.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을 명하시고 그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BC 2091년이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저주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엘 신이라는 우상으로 만들고 다시 아세라 여신을 만들어 엘 신과 결혼을 시키는가 하면 그 사이에서 태어난 바알 신을 일으켜 엘 신을 몰아내고 자신의 어머니격인 아세라 여신을 차지하게 하는 등 가증한 짓을 일삼았기 때문이었다.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 징계의 일정을 400년이나 연기하신다고 아브라함에게 통고하셨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 가나안에게는 장자 시돈과 차남 헷,그리고 셋째 여부스와 넷째 아모리 등 11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아모리 족속의 두령 중 하나인 마므레의 호의로 그의 땅에서 살았다.또 그의 조카 롯이 북방 연합군에 잡혀갔을 때에도 아모리의 세 두령과 함께 적을 습격하여 롯 식구들과 약탈당한 재물을 되찾아왔다.하나님의 계획이 연기된 것은 그 아모리 족속 때문이었다.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15:16) 히브리 민족과 가나안 민족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엘’로 사용한다는 사실이다.이것으로 보아 그들 두 민족이 처음에 모두 같은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가나안의 장자 시돈은 두로를 포함하는 페니키아 지역의 족속이었는데 그들은 본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겔28:14)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은 장사하여 부자가 되면서 마음이 교만해져서 다른 신들을 만들어내고 풍요와 번영을 기원했던 것이다. “네 큰 지혜와 장사함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인하여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겔28:5) 그러나 가나안 족속이 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길 때 넷째인 아모리 족속은 아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뿐만 아니라 살렘 즉 예루살렘 지역에 있던 여부스 족속도 마찬가지였다.아브라함이 롯의 식구들을 되찾고 개선하여 살렘을 지날 때 살렘 왕이며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그를 축복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창14:20)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가 되찾아온 것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내놓았다.신약 성경의 히브리서는 이 멜기세덱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해석했다.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06:20) ‘살렘’이란 곧 평화라는 뜻이다.지구상에서 전쟁을 없애고 평화를 이룩할 평화의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이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07:1∼3) 그 후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애굽에 내려가 400년간 고초를 겪으며 약 200만의 민족을 이루었다.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한 그들은 40년의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진입했다. 다윗이 그 땅을 거의 다 점령하고 12 지파의 왕이 된 것은 BC 1004년이었으니 하나님이 가나안 박멸의 프로젝트를 시작하신지 1087년만이었다.그러나 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가나안 문화에 미혹되어 그 신들을 섬기다가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양쪽이 모두 멸망하게 된다.무력으로는 가나안을 이겼으나 문화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다.그들이 다 멸망한 때가 BC 586년이었으니 하나님께서 1000년을 고심하여 이루신 프로젝트는 400년을 겨우 넘기고 수포로 돌아갔다.그러나 그들의 멸망 후에 선지자 스가랴는 다시 진정한 평강의 왕이 오시리라고 예언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전쟁하는 영웅은 말을 타지만 평강의 왕은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선지자 스가랴가 이 말씀을 전한지 500여년이 지나서 나사렛의 예수는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그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그의 제자들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받았다.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김성일<한세대 교수> (교훈과 적용)
12 나단(Nathan)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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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4 4 2006-12-26
▶ 나단(Nathan) 뜻 : 주는 자 [1]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한 아들 (삼하05:14), (눅03:31). [2] 다윗 왕 때의 선지자. 1) 다윗이 성전 건축할 것을 설계할 때 여호와께서 이 사람을 통하여 금지 시켰다 (삼하07:4-17). 2) 우리아의 아내를 간통 하였을 때 다윗을 꾸짖었다(삼하12:1-12). [3]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돌아올 때 무리중에 있던 우수한 느디님 사람(스08:16). *그 외에 이 이름을 가진 6인이 있다 (삼하23:36), (왕상04:5), (대상02:36, (대상11:38), (스10:39, (스12:12) ▶ 나단 Nathan. [Na'than] 1. Son of David and Bathsheba. 2 Sam. 5:14; 1 Chr. 3:5; 1 Chr. 14:4; Luke 3:31. (삼하05:14 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대상03:5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은 이러하니 시므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의 소생이요 (대상14:4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눅03:31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2. The prophet, who held an influential position during the reigns of David and Solomon. He is first mentioned when David had in his heart to build a house to Jehovah. Nathan at first encouraged the proposition, but afterwards had a special message from God to direct David otherwise. It was Nathan who had to condemn David's conduct with respect to Bathsheba and her husband; he delicately brought the sin home to his conscience by means of a suited parable. He also took a prominent part in securing the throne for Solomon, 2 Sam. 7:2-17; 2 Sam. 12:1-25; 1 Kings 1:8-45; 1 Chr. 17:1-15; 2 Chr. 29:25; Ps. 51: title. He wrote a 'book' containing the Acts of David the king and of Solomon, which does not form a part of scripture. 1 Chr. 29:29; 2 Chr. 9:29. (삼하07:2-17 성전을 위한 하나님의 뜻 (삼하12:1-25 밧세바의 일로 나단의 다윗책망 (왕상01:8-45 다윗의 후계자를 위한 다툼. 솔로몬이 왕되다 (대상17:1-15 하나님의 성전 건축 계획과 약속 (대하09:29 29 이 외에 솔로몬의 시종 행적은 선지자 나단의 글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과 선견자 잇도의 묵시 책 곧 잇도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대하여 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대상29:29 다윗 왕의 시종 행적이 선견자 사무엘의 글과 선지자 나단의 글과 선견자 갓의 글에 다 기록되고 (대하29:25 왕이 레위 사람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서 다윗과 왕의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의 명한 대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게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선지자들로 이렇게 명하셨음이라 (시051: 회개의 시 3. Man of Zobah, father of Igal. 2 Sam. 23:36. (삼하23:36 소바 나단의 아들 이갈과 갓 사람 바니와 4. Father of Azariah and Zabud. 1 Kings 4:5. (왕상04:5 나단의 아들 아사리아는 관리장이요 나단의 아들 사붓은 대신이니 왕의 벗이요 5. Son of Attai, and father of Zabad. 1 Chr. 2:36. (대상02:36 앗대는 나단을 낳았고 나단은 사밧을 낳았고 6. Brother of Joel, one of David's mighty men. 1 Chr. 11:38. (대상11:38 나단의 아우 요엘과 하그리의 아들 밉할과 7. One who returned from exile. Ezra 8:16. (스08:16 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8. One who had married a strange wife. Ezra 10:39. (스10:39 셀레먀와 나단과 아다야와 9. A chief man in Israel, whose family will mourn apart. Zech. 12:12. Perhaps a reference to the family of No. 2. (슥12: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 Morrish Bible Dictionary ----------------------------------------------------- 나단/바른말로 시대에 경종 “성전건축에 앞서 나라의 번영” 예언/다윗 밧세바 범하자 「양떼」비유 책망 나단은 "양심" 혹은 "주는 자"라는 뜻이다. 나단은 다윗시대의 선지자였다. 다윗이 주변국가를 점령하고 국권을 강력하게 다진 뒤에 나라가 안정되자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다. 자기는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장막에 있으므로 이를 심히 송구하게 생각하였다. 이때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성전건축보다 나라의 번영을 허락 하셨고 성전건축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건축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는 다윗이 그 손으로 「피를 심히 많이 흘려 내 집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대상 22:8)고 나단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말씀이다. 그 예언대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다. 또한 나단선지자의 선지사역중 유명한 사건은 다윗왕이 밧세바를 범하여 범죄했을 때 비유를 들어 다윗을 책망한 일이었다. 한 부락에 많은 양떼를 가지고 있는 부자와 양 한마리를 딸같이 기르는 가난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부잣집에 손님이 왔을때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다가 손님을 대접했다는 비유로서 다윗의 범죄를 통렬히 지적하며 권고한 내용으로 나단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지자로 알려져 있다. 나단선지자는 자기 사명에 충성된 자였다. 분명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고도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현실의 분위기에 눌려 참말을 못하는 선지자와 하나님의 종이 얼마나 많은가? 사명에 충실하자. ▷교훈과 적용◁ 첫째, 나단과 같이 시대적인 예언자가 필요한 때이다. 참말을 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 둘째, 나단이 다윗왕을 회개시킨 것은 다윗 한 사람에 관한 일이 아니라 나라를 구한 일이었다. <이병돈 목사·은평교회> -------------------------------------------------------------------------------- ◇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 일깨운 궁중 선지자 나단이라는 이름의 뜻은 [양심] 혹은 [주는 자] 이다. 어떤날 다윗왕은 궁중 고문격인 나단에게 다음과 같이 고했다.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삼하07:2) 이것은 성전 건축에 대한 제안이었다. 이에 대하여 나단은 [하나님의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 는 바를 행하소서](삼하07:3, 대상17:2) 하면서 호의를 표했 으나 하나님께선 나단에게 성전건축이 그렇게 다급하지 않으며 그리고 아들중 하나를 택해서 대업을 완수할 것을 왕께 전하도록 하셨다. 이처럼 나단은 궁중선지자로서 왕의 주장에 앞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랐으며 때로는 왕의 실책과 실수에 대하여도 서슴없이 정의의 비판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다윗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하여 충직한 용사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어 죽게 했을 때 다음과 같은 비유로 그의 죄목을 지적했다.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니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삼하12:1-4) 이 보고를 들은 다윗왕은 나단에게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하였다. 이때 나단은 다윗왕을 향하여 [당신이 그 사람이라]대답한 후 [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했다(삼하 12:1-15). 나단을 통하여 우리는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 나단… ‘서릿발 교훈’에 다윗왕도 회개의 눈물 나단은 다윗시대의 선지자였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다면 나단은 그 시대의 영적인 책임자로 함께 일했다. 다윗의 훌륭한 통치력이 빛을 본 것은 다윗의 신앙과 경건심을 붙들어주고 지원해준 나단의 사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와 전쟁과 나라의 번영을 이끌어 가는 다윗은 영적으로 피곤하고 나약해지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을 지원해준 영적인 동반자가 바로 나단이었다. 그 나라의 성패나 역사의 방향은 지도자에 의해 좌우된다. 다윗을 영적으로 보살필 수 있는 훌륭한 선지자가 곁에 있었다는 것은 다윗 개인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 더없이 귀한 일이었다. 나단과 다윗은 그들의 친분이나 그들이 가졌던 교제 이상으로 한 시대에 묶여 있던 좋은 동역자였다. 그러므로 다윗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나단과 의논하고 자문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서로 의지할 수 있고 서로 붙들어줄 수 있는 신앙의 동반자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계가 같은 영적 깊이를 가진 부부라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가. 그렇지 못 하다면 담임목사나 구역장이나 친구라도 좋을 것이다. 마음을 터놓고 마음의 말을 나눌 수 있는 영적인 친구가 있어야 하겠다.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함께 사람과의 영적 사귐도 원하신다. 누구와 영적 교제를 갖느냐에 따라 그 개인의 영적 수준이 정해진다. 다윗왕은 신앙도 좋았고 인간의 시련도 크게 경험했고 잘 거친 사람이었다. 다윗은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가히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다윗이 나단을 존경하고 가까이 했으며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의논했던 것을 보면 나단 선지자를 다윗이 얼마나 의지했는지를 알 수 있다. 신앙의 사람은 믿음도 좋아야 하고 하나님과의 친교도 정상적이어야 하며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는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를 따른 것 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따를 수 있어야 한다. 영적인 권위는 사회적인 위치나 직분이나 성적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대인관계나 사생활이 결정한다. 나단과 같이 영적인 매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나단 선지자의 또 다른 훌륭한 면은 예언자로서의 정직성과 하나님을 대변하는 강한 의지였다. 당시 다윗왕이 다스린 나라는 제국을 이루는 큰 나라였으며 그의 권위는 천하를 호령할 만큼 대단했다. 그 앞에 나아가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을 죽인 일에 대해 비유를 들어 지적한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는 다윗왕을 대면하여 권고하였다. 나단은 목숨을 걸고 왕을 사랑하는 충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이다. 이때 다윗왕이 그 권고를 받아들여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써 다윗과 나라를 구한 큰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히 나단 선지자의 용기와 다윗의 회개로 끝나버릴 일이 아니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과 마주 대한 분위기나 상황을 연상해보자. 나단 선지자가 지녔던 신앙 인격이나 하나님의 사신으로 보여준 경건성이나 나단이 직접 대화를 통해 다윗을 점잖게 책망하는 그 영적 분위기에 흡수되어 다윗의 큰 회개가 이루어진 것이다. 다윗은 나단이 가지고 있던 영성이나 신앙심에 압도된 것이다. 지도력은 감화력이라는 말이 정말 어울리는 것 같다. 자녀들도 지도한 대로는 안 살아도 보여준 대로는 산다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이성을 깨우치기보다 그 사람의 정서를 변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다윗은 법궤를 옮겨놓고 나라가 크게 번영하자 성전을 건축할 것을 나단 선지자에게 제언하였다. 자기는 백향목궁에 거하고 하나님의 법궤는 장막에 있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막으셨다. 이는 그가 피를 심히 많이 흘린 사람이므로 그 아들을 통해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려는 뜻이었다(삼하 7장,대상 22장). 국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이었지만 많은 사람을 죽인 다윗에게 성전 건축을 피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대표하는 거룩한 성전은 ‘평강의 사람’에 의해 건축되도록 지시하신 것이다. 이는 성전의 신성미나 하나님의 집에 대한 성스러움을 더하려는데 있었다. 성전을 건축하고 싶어 하는 다윗의 의욕이나 소망을 꺾고 그 아들에게 양보할 것을 권고한 일도 나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단 선지자는 즐거운 일이나 기쁜 일이나 영광스러운 일을 예언하기보다 다윗을 깨우치고 다윗에게 제동을 거는,또한 권면하는 사역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나단 선지자는 어려운 일을 도맡은 선지자 같이 힘든 사역들을 잘 감당한,그러면서도 존경받는 선지자였다. 평생 어렵고 힘든 일을 잘 감당한 나단은 예언자의 사명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윗과 나단 사이의 친분이나 교제에 금이 가지 않고 상처를 입지 않았던 결과에 주목해야 하겠다. 훌륭한 권면이나 꼭 필요한 충고라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다. 이는 상대방을 돌이키고 바로잡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권위있는 상담자가 되도록 우리 자신을 가꾸어 나가자. 나단 선지자의 또 하나의 큰 사역은 다윗왕에 이어 솔로몬을 왕이 되게 하는 일이었다. 나단 선지자는 밧세바를 권하여 다윗왕을 깨우치도록 재촉하였다. 다윗왕은 말년에 정신이 혼미하고 사리가 분명하지 못했었다. 이때에 밧세바와 협력하고 밧세바를 앞세워 솔로몬을 즉위하게 한 것은 나단의 큰 공로였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이 허약해진 틈을 타 아도니야가 다윗왕을 이어 왕위를 물려받을 준비를 하자 밧세바를 찾아갔던 것이다. 이것은 자기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자기의 사람으로 솔로몬을 택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예언과 하나님의 뜻이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때에 나단이 염려스러운 마음과 의분에 이끌려 허겁지겁 일을 서둘러 어린 솔로몬을 왕위에 앉힌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계획속에 이미 왕으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단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섭리가 밝혀졌다면 과감하게 추진해나가야 한다. 머뭇거리다가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매사에는 기회가 있다. 때를 놓치지 말자. 더 중요한 것은 군중의 여론이나 대세나 분위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협력하면 죄를 짓는 거나 같다. 힘을 다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세워야 하고 일을 바로잡는 것이 영적인 사람들의 마땅한 본분이다. 그 일을 위해 우리를 세우셨고 그 사명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 언제나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최선을 다하자. 사람이 사욕을 버리면 정말 영적으로 자유스러운 사람이 된다. ◇나단을 통해 얻는 교훈 나단 선지자가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의 계획을 막았던 일은 밧세바 사건을 회개시킨 일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나단 선지자는 마음으로부터 다윗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의 훌륭한 의욕을 막을 때 두 손을 잡고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진지하게 권고했을 나단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이는 나단이나 다윗이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된 마음 또한 같았기 때문이다. 다윗의 권력이나 영화에 조금도 때묻지 않고 끝까지 선지자로 자기 자리를 지켰던 나단이 존경스럽다. 나단 선지자의 말이라면 다윗이 무엇이든 허락하고 협력할 수 있는 처지였지만 순수한 선지자로 깨끗한 생을 살았다. 사사로운 욕심이나 제안으로 다윗왕의 마음을 조금도 흐리게 하는 일이 없었다. 이것은 나단이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나단을 본받아야 하겠다. 이병돈 <서울 은평성결교회 담임목사>
11 스가랴(Zecharah/Zechar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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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10594 4 2006-12-27
▶ 스가랴(Zecharah) Zacharias - (Douay Bible에서의) Zechariah의 라틴어식 어형 [1] 유다왕 요아스를 보필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그는 선지자로서 여 호와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 백성들의 죄를 경책할 때 요아스 왕은 그의 부친 여호야다 의 은공을 생각지 않고 스가랴를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다(대하24:20-21). [2]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의 아들로서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6개월 동 안 통치하다가 살룸에게 맞아 죽었다(왕하15:8-10). [3] 12소선지 중의 일 인으로 베뢰갸의 아들이다. 다리오 왕 2년에 여호와의 계시를 받아 얘언하는 중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올라 가실 것을 예언 하였다(슥09:9). [4]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다가 돌아와서 에스라가 모세 율 법을 낭독할 때 강단 저편에 섰던 선지자중의 한 사람(느08:1). [5] 바벨론에서 유다에 돌아온 자중 이방 여자를 취한 사람(스10:26). [6] 웃시아 왕을 보필하던 자(대하26:5). [7] 이 외에 2인이 있다(대상26:2,11). ▶ 스가랴(Zechariah, 선지자 겸 제사장) cf. Zachariahs ◎스가랴서의 기록자,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공헌 성경:스가랴 1장1∼6절 (슥01: 스가랴는 「여호와는 기억하신다」는 뜻이다. 스가랴는 선지자와 제사장직을 겸임했던 하나님의 종이었다. 스가랴의 조부는 제사장의 족장이었으며 스룹바벨과 함께 예루살렘에 귀국한 영적인 지도자였다. 스가랴가 그 할아버지 잇도를 이어 제사장 족속의 족장을 계승한 것을 보면 제사장 혈통에서 신앙과 영적인 훈련을 잘 받은 견고한 신앙의 후예였다. 스가랴의 아버지 베레갸가 소개되지 않는 것을 보아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난 것 같다. 스가랴는 바벨론에서 출생하여 성장했지만 제사장이나 선지자들과 자연스럽게 사역을 한 것을 보면 그가 바벨론에서 쌓은 경건 훈련을 짐작할 수 있다. 스가랴는 학개와 동시대의 선지자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었다. 스가랴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요야김을 도와 성전을 재건하도록 선민을 격려하고 지도자들의 사역을 적극 지원하였다. 스가랴는 유대인의 영적 각성과 신앙 부흥을 위해 대단한 열성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했고 성전을 다시 준공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스가랴는 약 50년 동안 예언하는 사명을 감당하며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준 선지자였다. 그가 기록한 스가랴서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구속주와 재림주로서 「영원한 구원자」임을 대변했다. (교훈과 적용) ▶ 스가랴 Zechariah. [Zechari'ah] 1. A chief man among the Reubenites. 1 Chr. 5:7. (대상05:07 저의 형제가 종족과 보계대로 족장 된 자는 여이엘과 스가랴와 2. Son of Meshelemiah, a Korhite. 1 Chr. 9:21; 1 Chr. 26:2, 14. (대상09:21 므셀레먀의 아들 스가랴는 회막 문지기가 되었더라 (대상26:2,14 므셀레먀의 아들들 맏아들 스가랴와 둘째 여디야엘과 세째 스바댜와 네째 야드니엘과, 셀레먀는 동방에 당첨되었고 그 아들 스가랴는 명철한 의사라 저를 위하여 제비 뽑으니 북방에 당첨되었고 3. Son of Jehiel, a Benjamite. 1 Chr. 9:37. Called ZACHER in 1 Chr. 8:31. (대상09:37 그돌과 아히오와 스가랴와 미글롯이며 (대상08:31 그돌과 아히오와 세겔이며 4. Levite engaged in the service of song. 1 Chr. 15:18, 20; 1 Chr. 16:5. (대상15:18,20 그 다음으로 형제 스가랴와 벤과 야아시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운니와 엘리압과 브나야와 마아세야와 맛디디야와 엘리블레후와 믹네야와 문지기 오벧에돔과 여이엘을 세우니, 스가랴와 아시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운니와 엘리압과 마아세야와 브나야는 비파를 타서 여청에 맞추는 자요 (대상16:5 그 두목은 아삽이요 다음은 스가랴와 여이엘과 스미라못과 여히엘과 맛디디아와 엘리압과 브나야와 오벧에돔과 여이엘이라 비파와 수금을 타고 아삽은 제금을 힘있게 치고 5. One of the priests in the time of David. 1 Chr. 15:24. (대상15:24 제사장 스바냐와 요사밧과 느다넬과 아미새와 스가랴와 브나야와 엘리에셀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나팔을 부는 자요 오벧에돔과 여히야는 궤 앞에서 문을 지키는 자더라 6. Son of Isshiah, a Levite. 1 Chr. 24:25. (대상24:25 미가의 아우는 잇시야라 잇시야의 아들 중에는 스가랴며 7. Son of Hosah, a Merarite. 1 Chr. 26:11. (대상26:11 둘째는 힐기야요 세째는 드발리야요 네째는 스가랴니 호사의 아들과 형제가 십 삼인이더라 8. Father of Iddo of the tribe of Manasseh. 1 Chr. 27:21. (대상27:21 길르앗에 있는 므낫세 반 지파의 관장은 스가랴의 아들 잇도요 베냐민의 관장은 아브넬의 아들 야아시엘이요 9. One of the princes of Judah whom Jehoshaphat sent with priests and Levites to teach the people. 2 Chr. 17:7. (대하17:7 저가 위에 있은지 삼년에 그 방백 벤하일과 오바댜와 스가랴와 느다넬과 미가야를 보내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 10. Levite, father of Jehaziel. 2 Chr. 20:14. (대하20:14 여호와의 신이 회중 가운데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셨으니 저는 아삽 자손 맛다냐의 현손이요 여이엘의 증손이요 브나야의 손자요 스가랴의 아들이더라 11. Son of Jehoshaphat king of Judah. 2 Chr. 21:2. (대하21:2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아우 아사랴와 여히엘과 스가랴와 아사랴와 미가엘과 스바댜는 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12. Son of Jehoiada the priest: he rebuked the people for their idolatry, and by commandment of the king he was stoned by the people in the court of the temple. 2 Chr. 24:20. He is probably the ZACHARIAS spoken of in Matt. 23:35. (대하24:20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마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13. One who 'had understanding in the visions of God.' 2 Chr. 26:5. (대하26:5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 14. Father of Abijah, wife of Ahaz king of Judah. 2 Chr. 29:1. Called ZACHARIAH in 2 Kings 18:2. (대하29:1 히스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구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비야라 스가랴의 딸이더라 (왕하18:2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구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비라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15. Levite, descendant of Asaph. 2 Chr. 29:13. (대하29:13 엘리사반의 자손 중 시므리와 여우엘과 아삽의 자손 중 스가랴와 맛다냐와 16. Kohathite, one of the overseers at the repairing of the temple. 2 Chr. 34:12. (대하34:12 그 사람들이 진실히 그 일을 하니라 그 감독은 레위 사람 곧 므라리 자손 중 야핫과 오바댜요 그핫 자손 중 스가랴와 무술람이라 다 그 일을 주장하고 또 음악에 익숙한 레위 사람이 함께 하였으며 17. Prince of Judah, and one of the rulers of the house of God. 2 Chr. 35:8. (대하35:8 방백들도 즐거이 희생을 드려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주었고 하나님의 전을 주장하는 자 힐기야와 스가랴와 여히엘은 제사장들에게 양 이천 육백과 수소 삼백을 유월절 제물로 주었고 18. Son of Berechiah, and one of the 'minor prophets.' Ezra 5:1; Ezra 6:14; Zech. 1:1, 7; Zech. 7:1, 8. (스05: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스06: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할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 (슥01:1, 7; 다리오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다리오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 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슥07:1, 8. 다리오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19-21. Three who returned from exile. Ezra 8:3, 11, 16; Neh. 8:4. (스08:3, 11, 1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전일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느08:4.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 그 우편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 좌편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22. One who had married a strange wife. Ezra 10:26. (스10:26 엘람 자손 중 맛다냐와 스가랴와 여히엘과 압디와 여레못과 엘리야요 23, 24. Two ancestors of some who dwelt at Jerusalem on the return from exile. Neh. 11:4, 5. (느11:4,5 예루살렘에 거한 자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몇명이라 유다 자손 중에는 베레스 자손 아다야니 저는 웃시야의 아들이요 스가랴의 손자요 아마랴의 증손이요 스바댜의 현손이요 마할랄렐의 오대손이며 또 마아세야니 저는 바룩의 아들이요 골호세의 손자요 하사야의 증손이요 아다야의 현손이요 요야립의 오대손이요 스가랴의 육대손이요 실로 사람의 칠대손이라 25. Priest, the son of Pashur. Neh. 11:12. (느11:12 또 전에서 일하는 그 형제니 도합이 팔백 이십 이명이요 또 아다야니 저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블라야의 손자요 암시의 증손이요 스가랴의 현손이요 바스훌의 오대손이요 말기야의 육대손이며 26. Priest, 'of Iddo.' Neh. 12:16. (느12:16 잇도 족속에는 스가랴요 긴느돈 족속에는 므술람이요 27. Son of Jonathan, a priest: he assisted in the dedication of the wall of Jerusalem. Neh. 12:35, 41. (느12:35,41 또 제사장의 자손 몇이 나팔을 잡았으니 요나단의 아들 스마야의 손자 맛다냐의 증손 미가야의 현손 삭굴의 오대손 아삽의 육대손 스가랴와 제사장 엘리아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내와 스가랴와 하나냐는 다 나팔을 잡았고 28. Son of Jeberechiah, taken by Isaiah as a witness. Isa. 8:2. (사08:2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거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 Morrish Bible Dictionary
10 이스라엘(Isr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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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2076 4 2006-12-28
▶ 이스라엘(Israel) 뜻:하나님이 투쟁하심 야곱 이 처가에서 고향에 돌아 오다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기고 축복으로 받은 이름(창32:22-28). 그 후부터 그 이름을 족명,국명을 삼아 이스라엘 족속 이스라엘 자손이라 불렀다(출16:31, (행01:6, (출01:7, (출05:1). ▶ 이스라엘/유다 Israel. [Is'rael] Name given to Jacob after 'a man' had wrestled with him, to whom he clung when he was by him crippled. It signifies 'a prince of God:' and it was said, "as a prince hast thou power with God and with men, and hast prevailed." It thus indicated the way of blessing with regard to the nation in which God's government in the earth was to be established. The twelve sons of Jacob became the heads of the twelve tribes, and they and their descendants were called the children of Israel, or simply Israel. At the division of the kingdom, the ten tribes were called 'Israel,' and the two tribes 'Judah,' though this distinction is not at all times rigidly adhered to: thus the princes and kings of Judah are called princes of Israel, and kings of Israel. 2 Chr. 12:5, 6; 2 Chr. 21:2; 2 Chr. 28:19. So those who returned from exile, though they were in the main of the two tribes, are called people of Israel, or Israel. In the prophets also, though the ten tribes are not called Judah, the two tribes are at times called Israel. The ten tribes in the prophets are often spoken of as EPHRAIM, which was the chief of the ten. Though Israel was reckoned as ten tribes, it is most probable that the portion of Simeon, being situated on the extreme south, was united to Judah, as well as the territory of Dan in the S.W., though the people of Simeon may have scattered themselves among the other tribes, and those of Dan have gone north and joined their tribe there. (대하12:5-6; 5 때에 유다 방백들이 시삭을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라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나아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붙였노라 하셨다 한지라 6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가로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 (대하21:2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아우 아사랴와 여히엘과 스가랴와 아사랴와 미가엘과 스바댜는 다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이라 (대하28:19 이는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 THE KINGDOM OF ISRAEL commenced when Jeroboam was made king, to whom it was promised that his house should be established if he followed the Lord. He, on the contrary, to prevent the people going to Jerusalem, immediately set up the golden calves at Dan and at Bethel. The kingdom was given up to idolatry, and a series of judgements followed. Baasha murdered Jeroboam's son and successor; and his own son and successor was slain by Zimri; Zimri was killed by Omri, and after a civil war of four years with Tibni, Omri became king and reigned with his successors forty-five years, ending with Jehoram the son of Ahab. He and the survivors of the house of Ahab were slain by Jehu directly or indirectly, and Jehu began the 5th dynasty, B.C. 884. He and his successors reigned, with varying judgements upon them, for a hundred and twelve years. Zachariah was the last, being the fourth successor of Jehu, as God had said, 2 Kings 15:12: he reigned only six months and was murdered by Shallum. During another fifty years the kingdom was spared: but there was no repentance. About B.C. 740 the two and a half tribes east of the Jordan were carried into captivity, and Israel became tributary to Assyria. Hoshea murdered Pekah, and after nine years of anarchy succeeded to the throne. He revolted against Assyria, trusting to Egypt; but Samaria was taken, and Israel carried into captivity. Thus ended the kingdom of Israel, B.C. 721. From about B.C. 784 to 725 Hosea was God's prophet in Israel. He solemnly pleaded with them, protesting against their evil ways, and was ever ready to help them to turn to God, though his efforts were, alas, in vain. 2 Kings 17:13-18; Hosea 13:16; Hosea 14:1-9. (왕하15:12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자손이 이스라엘 위를 이어 사대까지 이르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니라 (왕하17:13-18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 (호13:16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호14:1-9 이스라엘의 회복 약속 Israel when carried away were placed in Halah and in Habor by the river of Gozan (in the neighbourhood of the river Khabour, an affluent of the river Euphrates), and in the cities of the Medes. As far as is known they never returned, though doubtless individuals found their way back in the days of Ezra and Nehemiah, and in the four hundred years that followed before the Lord appeared. Jews from those districts were present on the day of Pentecost; but as a body they are still commonly regarded as 'the Lost Tribes.' God knows where to find them when His set time of blessing arrives. The twelve tribes surely exist, and remnants of them will again come into the land. Ezek. 48:1-29; Matt. 19:28; Acts 26:7; James 1:1; Rev. 7:5-8. (겔48:1-29 새 땅의 분배약속 (마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행26:7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약0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계07:5-8. 5 유다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6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7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8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 맞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The ten tribes will be dealt with differently from the two, who were in the land when the Lord was presented to them, and who rejected Him, and demanded His crucifixion. The ten tribes will, by a mighty hand and with fury poured out, be brought into the wilderness, and there God will plead with them, cause them to pass under the rod, and bring them into the bond of the covenant; but the rebels will be purged out. Ezek. 20:31-38. The question as to the wounds in the hands of the Lord, which He received in the house of His 'friends' is connected with Judah, who will be judged when in the land, and only one third of them after being refined, will be owned as God's people. Zech. 13:6-9. When God thus purges and restores a remnant of all the tribes, and brings them into full blessing in the land, the name of ISRAEL will embrace them all as it did at the first, and God will be their God for evermore. Ezek. 37:1-28. (겔20:31-35 31 너희가 또 너희 아들로 화제를 삼아 예물로 드려 오늘날까지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라 32 너희가 스스로 이르기를 우리가 이방인 곧 열국 족속 같이 되어서 목석을 숭배하리라 하거니와 너희 마음에 품은 것을 결코 이루지 못하리라 3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단정코 다스릴지라 34 능한 손과 편 팔로 분노를 쏟아 너희를 열국 중에서 나오게 하며 너희의 흩어진 열방 중에서 모아내고 35 너희를 인도하여 열국 광야에 이르러 거기서 너희를 대면하여 국문하되 (슥13:6-9 6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9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겔37:1-28 마른 뼈들의 골짜기 비유와 화평의 언약 --- Morrish Bible Dictionary
9 잇도(Iddo/Jadau)
인물
jesus
3547 4 2006-12-28
▶ 잇도(Iddo) 뜻:사랑스러운 자 [1] 솔로몬,르호보암,아비야의 치세의 역사를 쓴 예언자 (대하09:29, (대하12:15, (대하13:22). [2] 스가랴의 조부(슥01:6,7, (겔05:1, (겔06:14). [3] 가시뱌에 있던 느디님 사람의 수령(스08:17). [4] 그 밖에 3인이 있다(왕상04:14, (대상27:21, (스10:43). ▶ 잇도 Iddo. [Id'do] 1. Father of Ahinadab one of Solomon's commissariat officers. 1 Kings 4:14. (왕상04:14 마하나임에는 잇도의 아들 아히나답이요 2. Son of Joah, a descendant of Gershom. 1 Chr. 6:21. (대상06:21 그 아들은 요아요 그 아들은 잇도요 그 아들은 세라요 그 아들은 여아드래며 3. Son of Zechariah and a ruler of Manasseh in Gilead. 1 Chr. 27:21. (대상27:21 길르앗에 있는 므낫세 반 지파의 관장은 스가랴의 아들 잇도요 베냐민의 관장은 아브넬의 아들 야아시엘이요 4. A seer who had 'visions' against Jeroboam. He wrote of Rehoboam in a book 'concerning genealogies;' and also of Abijah in his 'story' or 'commentary.' 2 Chr. 9:29; 2 Chr. 12:15; 2 Chr. 13:22. (대하09:29 이 외에 솔로몬의 시종 행적은 선지자 나단의 글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과 선견자 잇도의 묵시 책 곧 잇도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대하여 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대하12:15 르호보암의 시종 행적은 선지자 스마야와 선견자 잇도의 족보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대하13:22 아비야의 남은 사적과 그 행위와 그 말은 선지자 잇도의 주석 책에 기록되니라 5. Grandfather of Zechariah the prophet. Ezra 5:1; Ezra 6:14; Zech. 1:1, 7. (스05: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스06: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할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 (슥01:1, 7. 1 다리오 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7 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 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6. Chief at Casiphia, to whom Ezra sent for Levites. Ezra 8:17. (스08:17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거한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주고 우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수종들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7. Priest who returned from exile. Neh. 12:4, 16. (느12:4, 16 4 잇도와 긴느도이와 아비야와 16 잇도 족속에는 스가랴요 긴느돈 족속에는 므술람이요 --- Morrish Bible Dictionary ▶ 잇도 Jadau. [Ja'dau] One who had married a strange wife. Ezra 10:43. (스10:43 느보 자손 중 여이엘과 맛디디야와 사밧과 스비내와 잇도와 요엘과 브나야더라 --- Morrish Bible Dictionary .
8 헨(Hen)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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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2 4 2006-12-28
▶ 헨(Hen) 뜻: "은혜" 스바냐의 아들로 포로기 이후의 인물(슥06:14). ▶ 헨 Hen. Son of Zephaniah. Zech. 6:14. By comparing verse 14 with verse 10 Hen (really Chen) appears to be another name of Josiah. Some treat the word Hen not as a proper name, and translate 'for the favour of the son of Zephaniah.' (슥06:14 그 면류관은 헬렘과 도비야와 여다야와 스바냐의 아들 헨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 안에 두라 하시니라 --- Morrish Bible Dictionary
7 도비야(Tobiah)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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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3 2006-12-26
▶ 도비야(Tobiah) 뜻:여호와는 선하시다 [1] 여호사밧 왕이 유대 각지에 율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파견한 레위인중 한 사람(대하17:8). [2] 유대인과 혼혈한 암몬인으로 산발랏에게 붙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성을 증수할 때 방문한 사람(느02:10, 19). [3] 바벨론에서 귀환한 족속의 한 족장(스 2:60), (느07:62). [4] 바벨론에 남아있는 포로의 예물과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돌아온사람(슥06:10).
6 스바냐(Zephaniah)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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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8 3 2006-12-27
▶ 스바냐(Zephaniah) 뜻:하나님이 숨기시다 [1] 주전 7세기경 스바냐서를 저술 했다(습01:1). 왕족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상당한 명문가정 출신이다. 그리고 그의 예언자로서의 활동은 유다 요시아왕 때의 예레미 야보다 먼저 있었다. 그는 스구디아인의 침입을 예 언하였다(렘01:13-14). [2]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부제사장 직을 가졌다(왕하25:18). 예루살렘 멸망때에 바벨론으로 잡혀갔다가 느부각네살에 의하여 살해 되었다(렘52:24-27). [3] 스가랴시대 요시야의 아버지(슥06:10). ======== Zephaniah. [Zephani'ah] 1. Son of Maaseiah and 'second' priest in the reign of Zedekiah; he was carried captive to Nebuchadnezzar and slain at Riblah. 2 Kings 25:18; Jer. 21:1; Jer. 29:25, 29; Jer. 37:3; Jer. 52:24. (렘21: (렘29: (렘37: 2. Son of Tahath, a Kohathite. 1 Chr. 6:36, 37. (대상06: 3. Son of Cushi, and one of the 'minor prophets.' Zeph. 1:1. 4. Father of Josiah and of Hen. Zech. 6:10, 14. --- Morrish Bible Dictionary
5 레겜멜렉(Legemmelech)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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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2 2006-12-26
▶ 레겜멜렉(Legemmelech) 뜻:왕의 친구 한 이스라엘 사람의 이름(슥07:2).
4 시돈(Sidon, Zidon)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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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2 2006-12-27
▶ 시돈(Sidon) 뜻:어장, 노략물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장남(창10:15) ======== Zidon, [Zi'don] Sidon. [Si'don] Eldest son of Canaan, son of Ham, and the city in Phoenicia founded by his descendants. Gen. 10:15, 19. In scripture Tyre is nearly always mentioned first, though it is probable that in early days Zidon had the supremacy, which led to the district of Phoenicia being called Sidon, and the people thereof Zidonians. In Joshua 11:8; Joshua 19:28, it is called 'great Zidon.' It fell to the lot of Asher, but they did not drive out the inhabitants, which led to the Israelites serving the gods of the place. Judges 1:31; Judges 10:6. Solomon also loved some of their women, and imitated their form of idolatry. 1 Kings 11:1, 33. (수11:8 (수19:28 (삿01:31 (삿10:6 (왕상11:1,33 Zidon is denounced by the prophets for destruction. It is charged with being a 'pricking brier' to the house of Israel, and a 'grieving thorn' around them. Ezek. 28:21-24. Jehovah says of Zidon, in conjunction with Tyre, that they had taken His gold and silver and pleasant things, and carried them into their heathen temples, and had also sold the children of Judah unto the Grecians, to remove them far from their border. Joel 3:4-8. A warning message from Jeremiah was sent to the king of Zidon and neighbouring kings, exhorting them to submit to Nebuchadnezzar, who was Jehovah's servant. Jer. 27:3. We do not read that Nebuchadnezzar took Zidon, indeed his lengthy siege of Tyre probably enriched Zidon. The city is mentioned in Gen. 49:13; Isa. 23:2-12; Jer. 25:22; Jer. 47:4; Ezek. 27:8; Zech. 9:2, etc. (겔28:21-24 (욜03:4-8 (렘27:3 (창49:13 (사23:2-12 (렘25:22 (렘47:4 (겔27:8 (슥09:2, etc. The Lord Jesus visited its coasts, and said that it should be more tolerable in the day of judgement for Tyre and Sidon than for the cities in which He had done his mighty works. Matt. 11:21, 22; Matt. 15:21; Acts 12:28; Acts 27:3. (마11:21, 22 (마15:21 (행12:28 (행27:3 The destruction of Zidon was remarkable. They revolted from the Persians, but Tennes their king turned traitor and betrayed them. When the place was besieged, many of the citizens went out in submission, but were cruelly butchered. They had burnt their ships that none might escape, and seeing no effectual means of defence, in despair they shut themselves up in their houses, set them on fire, and perished in the flames. This was in B.C. 351. It gradually recovered from this destruction and became again a flourishing town. It is now called Saida, 33 34' N, 35 22' E there are many ruins. In the Hebrew the name is Tzidon, as in the margin of Gen. 10:15. Sidon is the Greek form of the name. --- Morrish Bible Dictionary
3 길르앗(Gilead)
인물
jesus
3255   2006-12-26
▶ 길르앗(Gilead) 뜻:강하다 [1] 므낫세의 손자, 길르앗인의 조상 (민26:29), (민27: (민36: (수17:1) (대상02: (대상07: [2] 사사 에훗의 부친 (삿11:1). [3] 갓의 자손 (대상05:14). (창31:21, (창37:25, (민32:1, (신02:36, (신03:10, (신04:43, (신34:1, (수12:2, (수13:11, (수17:1, (수20:8, (수21:38, (수22:9, (삿05:17, (삿10:4, (삿11:5, (삿12:4, (삿20:1, (삼상13:7, (삼하02:9, (삼하17:26, (삼하24:6, (왕상04:13, (왕상17:1, (왕하10:33, (왕하15:25, (대상02:22, (대상05:9, (대상06:80, (대상26:31, (대상27:21, (시060:7, (시108:8, (아04:1, (아06:5, (렘08:22, (렘22:6, (렘46:11, (렘50:19, (겔47:18, (호6:8, (호12:11, (암01:3, (미07:14, (슥10:10 ======== Gilead. [Gil'ead] 1. Son of Machir and grandson of Manasseh. Num. 26:29, 30; Num. 27:1; Num. 36:1; Joshua 17:1, 3; 1 Chr. 2:21, 23; 1 Chr. 7:14, 17. 2. Father of Jephthah. Judges 11:1, 2. 3. Son of Michael of the family of Gad. 1 Chr. 5:14. --- Morrish Bible Dictionary lt=32.042523&ln=35.724241
2 참소하던 자(Accuser, The,)
인물
jesus
931   2015-05-01
▶ 참소하던 자 Accuser, The, ὁ κατήγορος A title given to Satan when he is cast down to the earth, because he had accused the brethren before God day and night. Rev. 12:10: cf. Zech. 3:1. (계12:10 참소하던 자 (슥03:1 --- Morrish Bible Dictionary
1 적그리스도(Antichrist.)
인물
jesus
1423   2016-03-12
▶ 적그리스도 Antichrist. The name ἀντίχριστος signifies an opposer of Christ. It is used only by John in his first and second epistles, though those opposed to Christ are referred to by others under different names. It is important to distinguish between an antichrist and the antichrist. John says, "as ye have heard that antichrist shall come, even now are there many antichrists;" whereas "he is the antichrist that denieth the Father and the Son." 1 John 2:18, 22. He is the consummation of the many antichrists. To deny Jesus Christ come in the flesh is the spirit or power of the antichrist, but it eventuates in a departure from the special revelation of Christianity: 'they went out from us.' 1 John 2:19; 1 John 4:3; 2 John 7. Now this clears the ground at once of much that has obscured the subject. For instance, many have concluded that Popery is the antichrist, and have searched no farther into the question, whereas the above passage refutes this conclusion, for Popery does not deny the Father and the Son; and, in Revelation 17, 18, Popery is pointed out as quite distinct from 'the false prophet,' which is another name for the antichrist. It is fully granted that Popery is anti-christian, and a Christ-dishonouring and soul-deceiving system; but where God has made a distinction we must also do so. Besides Popery there were and there are many antichrists, which, whatever their pretensions, are the enemies of Christ, opposers of the truth, and deceivers of man. (요일02:18, 22. 18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22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요일02: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일04: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이01: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계17: , (계18: As to the Antichrist, it should be noticed that John makes another distinction between this one and the many. He speaks of the many as being already there, whereas the one was to come; and if we turn to 2 Thess. 2:3-12 we read of something or some one that hinders that wicked or lawless one being revealed, although the mystery of iniquity was already at work. Now there has been no change of dispensation since this epistle was written, and John wrote much later, from which we learn that the revelation of the antichrist is still future, though doubtless the mystery of iniquity is getting ripe for his appearing; that which hindered and still hinders the manifestation of the antichrist is doubtless the presence of the Holy Spirit on earth. He will leave the earth at the rapture of the saints. (살후02:3-12 멸망의 아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This passage in Thessalonians gives us further particulars as to this MAN OF SIN. His coming is after the working of Satan, that is, he will be a confederate of Satan, and be able to work signs and lying wonders with all deceit of unrighteousness in them that perish. Those that have refused the truth will then receive the lie of this wicked one. We get further particulars in Rev. 13:11-18, where the anti-christian power or kingdom is described as a beast rising out of the earth, having two horns as a lamb, but speaking as a dragon. Here again we read that he will do great wonders, making fire come down from heaven, with other signs or miracles. (계13:11-18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In the description in Thessalonians he opposeth himself against all that is called God or that is worshipped, and sits down in the temple of God, and sets forth himself as God. The Jews will receive him as their Messiah, as we read in John 5:43. In the above passage in the Revelation this counterfeit of Christ's kingdom is openly idolatrous. He directs the dwellers on the earth to make an image of the beast (named in ver. 1, the future head of the resuscitated Roman empire) to which image he gives breath, that it should speak, and persecutes those who will not worship the image. He also causes all to receive a mark on their hand or their forehead that they may be known to be his followers; and that none else should be able to buy or sell. We thus see that in the Revelation the anti-christian power called also 'the false prophet' will work with the political head, and with Satan — a trinity of evil — not only in deceiving mankind, but also, in Rev. 16:13-16, gathering together by their influence the kings of the earth to the battle of that great day of God Almighty. The three are cast into the lake of fire Rev. 19:20; Rev. 20:10. (요0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계16:13-16 진노의 일곱 대접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계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계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In the O.T. we get still another character of this wicked one. In Dan. 11:36-39 he is called 'king.' Here he exalts himself and speaks marvellous things against the God of gods. He will not regard the God of his fathers (pointing out that he will be a descendant of Israel, probably from the tribe of Dan, cf. Gen. 49:17), nor "the desire of women" (i.e. the Messiah, of whom every Jewess hoped to be the mother): he exalts himself above all. Here again he is an idolater, honouring a god that his fathers knew not. In Zech. 11:15-17 he is referred to as the foolish and idol shepherd, who cares not for the flock, in opposition to the Lord Jesus the good Shepherd. (단11:36-39 이 왕이 자기 뜻대로 행하며 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 하며 비상한 말로 신들의 신을 대적하며 형통하기를 분노하심이 쉴 때까지 하리니 이는 그 작정된 일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그가 모든 것보다 스스로 크다 하고 그 열조의 신들과 여자의 사모하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아무 신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할 것이나 그 대신에 세력의 신을 공경할 것이요 또 그 열조가 알지 못하던 신에게 금 은 보석과 보물을 드려 공경할 것이며 (창49:17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슥11:15-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찌니라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화 있을찐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This man of sin will 'do according to his own will' — just what the natural man ever seeks to do. In contrast to this the blessed Lord was obedient, and came not to do His own will. May His saints be ever on the watch against the many false prophets in the world, 1 John 4:1, and be loyal to their absent Lord, behold His beauty in the sanctuary, and reproduce Him more down here in their earthen vessels. (요일04:1 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 Morrish Bible Dic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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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대표 1.창조 2.족장 3.출애굽 4.광야 5.정복 6.사사 7.통일왕국 8.분열왕국 9.포로 10.포로귀환 11.중간 12.예수 13.초대교회 14.세계선교 관련그림.지도 1.창조 2.족장 3.출애굽 4.광야 5.정복 6.사사 7.통일왕국 8.분열왕국 9.포로 10.포로귀환 11.중간 12.예수 13.초대교회 Ani
1창세기[Genesis] 2출애굽기[Exodus] 3레위기[Leviticus] 4민수기[Numbers] 5신명기[Deuteronomy] 6여호수아[Joshua] 7사사기[Judges] 8룻기[Ruth] 9사무엘상[I Samuel] 10사무엘하[II Samuel] 11열왕기상[I Kings] 12열왕기하[II Kings] 13역대상[I Chronicles] 14역대하[II Chronicles] 15에스라[Ezra] 16느헤미아[Nehemiah] 17에스더[Esther] 18욥기[Job] 19시편[Psalms] 20잠언[Proverbs] 21전도서[Ecclesiastes] 22아가[Song of Solomon] 23이사야[Isaiah] 24예레미야[Jeremiah] 5예레미아애가[Lamentations] 26에스겔[Ezekiel] 27다니엘[Daniel] 28호세아[Hosea] 29요엘[Joel] 30아모스[Amos] 31오바댜[Obadiah] 32요나[Jonah] 33미가[Micah] 34나훔[Nahum] 35하박국[Habakkuk] 36스바냐[Zephaniah] 37학개[Haggai] 38스가랴[Zechariah] 39말라기[Malachi] 40마태복음[Matthew] 41마가복음[Mark] 42누가복음[Luke] 43요한복음[John] 44사도행전[Acts] 45로마서[Romans] 46고린도전서[I Corinthians] 47고린도후서[II Corinthians] 48갈라디아서[Galatians] 49에베소서[Ephesians] 50빌립보서[Philippians] 51골로새서[Colossians] 52데살로니가전서[I Thessalonian] 53데살로니가후서[2 Thessalonian] 54디모데전서[I Timothy] 55디모데후서[II Timothy] 56디도서[Titus] 57빌레몬서[Philemon] 58히브리서[Hebrews] 59야고보서[James] 60베드로전서[I Peter] 61베드로후서[II Peter] 62요한일서[I John] 63요한이서[II John] 64요한삼서[III John] 65유다서[Jude] 66요한계시록[Reve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