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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관련 백과사전 & Morrish Bible Diction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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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ber
36479 2 2019-03-05
Notice 공지 TIDWELL BIBLE 21 연대표
jesus
69935 1 2016-12-14
Notice 공지 Dictionary for NT 신약성경 백과사전 연구 파일
jesus
85858 1 2016-02-21
Notice 공지 Dictionary for OT 구약성경 백과사전 연구 파일
jesus
86226 1 2016-02-21
Notice 공지 성경백과사전 권별.장별[Chapter] 관련내용보기 파일
jesus
84079 1 2015-05-04
7 투구(Helmet.)
인물
jesus
855   2016-03-05
▶ 투구 Helmet. For the protection of the head, as worn by warriors. See ARMOUR. In the Christian's armour the helmet is 'salvation,' or 'the hope of salvation.' Eph. 6:17; 1 Thess. 5:8. It is those who know their salvation that can take part against the wicked spirits in the heavenlies. It is to be remarked that Jehovah (Christ) in a future day will Himself put on righteousness as a breastplate, and a helmet of salvation, to avenge His people by punishing their enemies. Isa. 59:17. (엡0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살전05:8.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 (사59:17.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 Morrish Bible Dictionary
6 그리스도(Christ)
인물
jesus
1990 31 2006-12-26
▶ 그리스도(Christ) -> 예수(Jesus) 희랍말로 크리오 (기름부음)란 동사에서 나온 "기름 부은 자"란 뜻이다. 신약에는 이것을 히브리 말로 메시야 "기름 부은 자"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다. 기름 붓 는 것은 히브리 사람에게 있어서 국왕, 제사장, 예언자의 직분을 성별하는 표였다 (출29:7), (삼상10:1, (삼상16:13), (왕상19:16).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가장 중요한 것은 나사렛 예수에게 이 말이 적용하였고 (마16:16) 예수 자신이 이 이름을 요구하셨다 (요04:26). ▶ 그리스도 Christ, The Christ, ὁ χριστός. An official title of the Lord Jesus, which became used as a name. In John 1:41; John 4:25 this title is linked with the Messiah of the O.T. The Jews and Samaritans were expecting THE MESSIAH, "which is called Christ." We find the title 'Messiah' in Dan. 9:25, 26 in the prophecy of the Seventy Weeks. The Hebrew word is mashiach and signifies 'anointed.' This term is employed as to the Lord Jesus in Ps. 2:2: the rulers set themselves against Jehovah and His 'Anointed.' (요0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요04: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단09:25-26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5 Know therefore and understand, [that] from the going forth of the commandment to restore and to build Jerusalem unto the Messiah the Prince [shall be] seven weeks, and threescore and two weeks: the street shall be built again, and the wall, even in troublous times. 26 And after threescore and two weeks shall Messiah be cut off, but not for himself: and the people of the prince that shall come shall destroy the city and the sanctuary; and the end thereof [shall be] with a flood, and unto the end of the war desolations are determined. (시00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The same word is used in reference to the high priest and the king as God's anointed; but the Lord Jesus is emphatically 'the Anointed,' this being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the Christ' which should be read in many places in the N.T. where the A.V. simply has 'Christ.' In the Gospels it is nearly always 'the Christ,' and often in the Epistles, except where it is Jesus Christ, or Christ Jesus which has more the character of a name. It refers to the Lord as Man, being anointed with the Holy Ghost. In Daniel we read that Messiah the Prince would be cut off and have nothing (margin), which was fulfilled when, instead of being hailed as Messiah by the Jews, He was rejected, cut off, and had, at the time, nothing of His Messianic honours, though, in His death, He laid the foundation of His future glory on earth, as well as effecting eternal redemption for the saved. We read in 1 Cor. 12:12 that as the body is one, and hath many members, "so also is the Christ:" the Head and the members in the power and the anointing of the Spirit form but one body. (고전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Being rejected as Messiah on earth, He is made as risen from the dead both Lord and Christ, Acts 2:36, and thus the counsels of God with regard to Him, and man in Him, are effectuated. Saints now are spoken of as having been chosen in Christ from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All things in heaven and on earth are to be headed up in the Christ, Eph. 1:10. As the Christ, He is the Head of the body the church. Eph. 4:15. But the subject can be merely touched on in a short article. (행0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엡0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0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 Morrish Bible Dictionary
5 두기고(Tychicus)
인물
jesus
3741 13 2006-12-26
▶ 두기고(Tychicus) 뜻:행운 로마에 거주하는 아시아 사람으로 바울과 친한 사이였다. (1) 바울이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동행하였다(행20:4). (2) 아시아로 보내는 편지 곧 에베소, 골로새, 디모데전서를 가지고 갔다(엡06:21), (골04:7), (딤후04:12). (3) 바울은 그를 그레데로 보내어 디도를 동반하여 니고볼리로 오게 하였다(딛03:12).
4 리브가(Rebecca)
인물
jesus
5632 18 2006-12-26
▶ 리브가(Rebecca) /「섭리」에 순종하여 결혼… 자애로운 여인 리브가는 "그물 끈"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밧단아람 사람 브두엘의 딸이요,라반의 누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신복과 같은 그의 종에게 손을 환도뼈 밑에 넣게 하여 맹세케 함으로 자기 친족 중에서 구한 아들 이삭(Isaac)의 아내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아브라함과 약속하고 밧단아람에 올라가 리브가를 아브라함의 자부로 데려온 창세기 24장(창24:) 전체의 기사는 아주 극적인 사건 이었습니다. 엘리에셀이 여행 중에 노상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첫째 순전히 신부감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목이 말라 물을 구할 때에 자기와 약대까지도 함께 물을 주면 하나님이 택한 사람으로 지정하여 기도하였는데 리브가가 기도대로 물을 주어 하나님의 응답으로 확정하였습니다. 또한 리브가를 동행시키도록 허락을 받아내는 일이 있기 전에는 음식을 거절하며 그일까지 성공시켰습니다. 엘리에셀은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리브가는 부지런하고 순결하고 건강하고 판단력이 있는 지혜로운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편애하여 남편을 속이고 축복을 강제로 빼앗게 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렸어야 했습니다. ▷교훈과 적용◁ 첫째, 리브가와 같이 처녀들이 결혼 대상을 구할 때에 자기 주장이나 판단 보다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결혼 대상이라는 것이 확실할 때에는 신랑을 보지 못했어도 순종했습니다. 둘째,리브가는 사람과 약대에게까지 물을 주었던 자비심이 그의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우리의 동정심은 어떠합니까. <이병돈목사·서울 은평교회> -------------------------------------------------------------------------------- 본 문 : 창24:1-67 요 절 : (창24:67) 1. 크리스찬 의 모범적인 결혼조건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과 순종이다. 1).아브라함은 늙은 종을 불러서 아들 이삭의 결혼을 치루는 일에 있어서 몇가지 절대적인 기준을 세워 맹세하게 하였다. (1).이방 여인을 선택하지 말라는 구절을 적어보자(창 24:3하) (2).아브라함의 고향에 가서 같은 종족 중에서 아내를 택하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이겠나?(창 24:4-7상) (3).결혼 성사에 대한 아브라함의 확신은?(창 24:7하) 2).중매일을 수행하는 늙은 종의 자세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영향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성실과 믿음과 순종으로 그에게 주어진 업무를 완수하고 있다. (1).아브라함의 종은 어떤 경우에 하나님께 기도하였나?(창 24:10-14) (2).리브가의 결혼문제에 대하여 그녀의 가정에서는 어떻게 대처하였나?(창 24:50-51). *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결혼에 있어서도 신앙일변도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2. 기도와 사랑으로 가정을 이루는 리브가와 이삭의 결혼생활 1).리브가는 결혼에 임하기까지 믿음의 결단과 정절을 잘 지켰다. (1).리브가의 결단(창 24:55-59) (2).리브가는 이제 곧 남편이 될 사람인 이삭과의 관계에서 결혼 전까지는 여자로서의 몸가짐을 단정히 하였다. 이렇게 정절을 지키는 태도로서 리브가는 어떻게 하였나?(창 24:65) 2).결혼식을 앞두고 신부를 맞이하기 위한 이삭의 준비는 한 마디로 은혜로운 자세였다. (1).이삭이 들에 나가 묵상을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보자(창 24:63), (시 19:14). (2).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생활(창 24:67), (엡 5:33) * 이삭이 리브가를 사랑하였다는 말씀은 단순히 육체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이해하고 서로가 존경하며 성실한 관계를 유지하였음을 말한다. 이삭의 가정의 행복한 비결은 믿음과 사랑 그리고 기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조카인 브두엘의 딸이며 이삭의 아내이다. 그의 이름의 뜻은 [연결하다]로서 이름 그대로 그는 이스라엘 족장과 그 후손들 사이에서 가교역할을 한 인물이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창24:60). 이 축복을 따라 그녀는 시 어머니 사라의 뒤를 이어 열국의 어머니가 되었는가 하면 이스라엘 왕가의 조상이 되었다. 리브가는 히브리 지혜문학의 모델로 등장되는 [지혜롭고 현숙한 여인상]을 지닌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그런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그런자는 살아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 하느니라](잠31:10 -12). 메소보다미아의 나홀 성밖 우물가에서 주인 아브라함의 명령을 따라 그의 아들 이삭의 배필을 구하기 위하여 멀리서 사막길을 걸어온 늙은 종에게 그녀는 공손하게 한 그릇의 물을 대접한 후에 목이 말라 헐덕이는 열필의 낙타에도 물을 주었다. 이것은 리브가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기 위한 지혜로운 행동이며 낙타에까지 물을 준것은 그녀의 근면과 성실을 나타낸 것이다. 옛 이야기에 한 지혜로운 처녀가 물을 좀 달라는 한 청년에게 물에 체하지 않도록 물그릇에 버들 잎을 띄워서 천천히 마시도록한 갸륵한 행위, 그것이 계기가 되어 훗날 그녀는 왕후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맥을 같이하는 사건이다. 이처럼 리브가는 지혜롭고 성실한 여성이었는가 하면 선택과 결단에 있어서도 남다른 선별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주위의 가족들이 아브라함 의 종을 따라 그의 아들 이삭이 있는 가나안 땅으로 가겠느냐 하고 물었을 때 그녀는 서슴없이 [가겠나이다]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먼 훗날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이 장자권문제로 신경전을 벌리고 있을 때 리브가는 야곱편을 택함으로 하나님의 섭리가 순순히 실현 되도록 중보역을 서슴없이 감당해 나갔다. 이렇게 볼때 그녀는 믿음으로 섭리에 순종한 이상적 신자상이라 할 수 있다. ▶ 리브가 Rebecca, [Rebec'ca] Rebekah. [Rebek'ah] Daughter of Bethuel the nephew of Abraham, and wife of Isaac. Abraham's servant conducted her to one, whom she had not before seen — to Isaac, who had in a figure been received back from the dead after having been offered to God on the altar: beautiful type of the saints who form the bride of Christ being led by the Holy Spirit on their journey to be the 'wife' of the Risen One "whom having not seen they love," and to whom they can now be companions in spirit, being of His 'kindred,' whom He is not ashamed to own as brethren. Rebekah, when among the Philistines, denied her true relationship with Isaac, and in like manner the professing church has been unfaithful to her Lord. Twenty years after her marriage Rebecca became the mother of twin-sons, Esau and Jacob. The latter whom God said should be the first, was her favourite son; but she lacked faith, and did not wait for the promised blessing to fall upon Jacob in God's time, but sought it in her own cunning way. Her death is not recorded, but she was buried with her husband in the cave of Machpelah. Gen. 22:23; Gen. 24 — Gen. 29; Gen. 49:31; Rom. 9:10. (창22:23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처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창24: (창25: (창26: (창27: (창28: (창29: 이삭과 리브가 (창49:31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롬09: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 Morrish Bible Dictionary =======Paintings Rebecca Nicolas Poussin. Eliezer Meets Rebecca. 1659-1661. Oil on canvas. Fitzwilliam Museum, Cambridge, UK More...More... Gallery -------------------------------------------------------------------------------- 리브가…믿음의 종가 이은 ‘현숙한 여인’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인물 중의 하나가 바로 이삭의 아내 리브가이다.자신의 몸을 불태울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간 이삭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한다면 이삭의 신부인 리브가는 곧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와 성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에게 과연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격이 있는가? 리브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그 해답이 리브가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의 마지막 사업은 ‘좋은 며느리’를 데려오는 일이었다.아들을 잘 양육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책임이었으나 손자를 기르는 것은 아들이 할 일이었다.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이 손자를 제대로 기르려면 그 아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을 위하여 ‘좋은 며느리’ 구하는 것을 자신이 수행해야 할 마지막 프로젝트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타락한 문화가 판치고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곳의 처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판단했다.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고 있는 늙은 종을 불러서 아들의 신부감을 찾아내는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임명했다.아브라함의 종은 주인의 약대 열 필에 신부감을 찾았을 경우 그녀와 그 집에 줄 선물을 싣고 주인이 살던 밧단아람 지방을 향해 떠났다.나홀의 성에 도착한 그는 성 밖의 우물가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성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섰다가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컨대 너는 물 항아리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약대에게도 마시우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인하여 주께서 나의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창 24:13-14) 밧단아람 지역의 사정을 이해하면 이 조건이 거의 불가능한 것임을 곧 알 수 있다.물이 귀한 이 지역에서는 물 근원을 찾아도 지하로 거의 30m를 파 들어가야 물을 얻을 수 있다.그래서 사람들이 공동으로 성 밖에 우물 하나를 파 놓고 성의 처녀들이 그 우물에 나가서 물을 길었던 것이다.물 항아리를 지고 30m의 계단을 내려가 길어올린 물을 좀 달라고 하는 것조차 미안한 일이었으나 나그네를 선대하는 것이 밧단아람 지역의 관습이어서 그 정도는 거의 의무 사항이었다. 그러나 약대에게까지 물을 마시우는 것은 문제가 달랐다.보통 목이 마른 약대 한 마리가 마시는 물은 약 100L 정도이므로 아브라함의 종이 이끌고 간 열 마리의 약대에게 물을 마시우려면 1000L의 물을 길어야 했다.물이나 기름의 수송에 사용하는 드럼통 하나의 용량이 200L이니 열 마리의 약대에게 물을 마시우려면 물 항아리를 지고 30m의 계단을 내려가 다섯 드럼 통의 물을 길어 올려야 하는 것이었다.아브라함의 종이 기도를 하자마자 한 처녀가 우물가로 나왔다. “청컨대 네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 아브라함의 종이 처녀가 우물에 내려가 항아리에 물을 채워가지고 올라오는 것을 기다려서 그녀에게 부탁하자 처녀는 선선히 대답했다. “주여,마시소서” 그녀는 급히 등에 지고 있던 물 항아리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또 말했다. “당신의 약대도 위하여 물을 길어 그것들로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그 처녀는 얼른 물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우물 아래로 내려갔다.처녀는 그 깊은 우물을 오르내리면서 열 마리의 약대가 배부르게 마시도록 무려 다섯 드럼 통에 해당하는 물을 길어올렸던 것이다.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격이다.우리가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하고 십일조를 내고 배당된 봉사 활동을 하는 것은 의무 사항이다.그러나 리브가는 나그네에게 물을 마시우는 관습적인 의무만 다 한 것이 아니라 그 1천배 이상에 해당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창 24:21) 무서운 일이었다.아브라함의 종은 그녀가 물을 길어올리는 동안 감사의 말도 칭찬의 말도 없이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우리는 흔히 작은 봉사를 하고도 넘치는 칭찬을 기대하고 있다.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은 열 마리의 약대가 물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비로소 금고리 한 개와 팔찌 한쌍을 그녀에게 선물로 주면서 네가 누구의 딸이냐고 물었던 것이다.그녀는 자기가 브두엘의 딸 리브가임을 밝히고 나그네를 아비의 집으로 안내했다.아브라함의 종이 그녀의 부친을 만나 모든 사연을 말하고 주인을 대신하여 청혼하자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된 리브가의 부친과 가족은 그 청혼을 받아들였다.아브라함의 종이 이튿날 일어나 리브가를 데리고 가려 하자 그녀의 가족들은 딸을 갑자기 보내기가 서운하여 며칠을 더 머물다 가라고 권했다.그러나 그가 즉시 떠날 것을 고집하므로 가족들이 리브가를 불러 지금 가겠느냐고 물었다.그녀의 대답은 부름을 받을 때에 교회가 할 응답을 생각하게 한다. “가겠나이다.” 이렇게 해서 리브가는 가족들의 전송을 받으며 신랑이 있는 곳을 향해 떠났다.리브가의 가족들이 아쉽게 그녀를 떠나보내며 축복했다.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창 24:60) 김성일(작가·한세대 교수)
3 아브라함(Abraham)
인물
jesus
7948 31 2006-12-27
▶ 아브라함(Abraham) 뜻 : 열국의 아버지 부친은 데라, 아우는 나홀과 하란이다.(창11:26). 구명 아브람을 여호와가 아브라함이라 고쳐 주었다(창17:5). 노아의 12대 손으로 갈대아 우르에서 출생하였다. 얼마후 메소보다미아 하란에 이거하는 중에 부친상을 당하고 여호와가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크게 창대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 말씀을 순종하여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갔다(창 12:). 흉년으로 인하여 잠시 애굽에 가 있는 중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일이 있다(창12:13). (창13: 가나안에 다시 돌아왔을 때 노복과 우양이 많으므로 롯이 거주하는 지방에 전쟁이 일어나 롯이 포로 되었다 하는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쫓아가 롯과 재물을 찾아 가지고 오는 중에 살렘왕이오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고 그에게 소득의 10분의 1을 바치니 이것이 십일조의 규례가 되었다(창14:9-20). 그 후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티끌같이 번창할 것과 애굽에서 4백년간 고난 당할 것을 예언하셨다(창13:16, (창15:5, (창22:17, 15:13). 사라가 생산치 못하여 그의 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으니 이 사람이 아라비아인의 시조요 회교의 교조 모하멧의 시조이다. (창16: 사라의 생산할 것과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할 것 그리고 할례법을 창설하였다(창17:8-10,19).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여 소돔 멸망에서부터 롯을 구하였다(창18:1-8, (창20:32). 백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다(창21:1,14). (창19: 여호와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하여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셨다(창22:1-19). 사라가 죽은 후 며느리 리브가를 얻고 175세에 별세하니 이삭과 이스 라엘이 그 모친 사라를 장사한 막벨라 굴에 합장하였다(창24:67, (창25:7-10). ======== Gallery Abraham is the first great patriarch of Israel. Christians and Muslims respect him as the personification of human faith in the will of God. Abraham was probably born some 4,000 years ago in the big Babylonian city of Ur. He was a wealthy man, married to Sarah. His story is described in Genesis. For some reason he left his native city with all his household and big herds of animals and traveled through the Middle East in search of a place to settle. During his migrations at one moment Abraham and Lot, his cousin, separated; Lot stayed in Sodom and Abraham decided to return to Canaan. There was an attack on Sodom, and Lot was captured and his possessions seized. Abraham, on learning about what had happened, armed his men and set off in pursuit. He attacked the looters, released his cousin and captured many goods. On return to Salem (Jerusalem) he was received by Melchizedek, the king and high priest, who blessed Abraham. Abraham in return paid one-tenth of his spoils of victory (Gen. 14:18-24). Abraham was an old man and had no heir, when his slave woman Hagar gave birth to his first son, Ishmael. Later his wife Sarah gave birth to Isaac. Trying to get rid of Hagar and Ishmael Sarah made Abraham send them off into the desert. But God saved them and Ishmael became the patriarch of the Arab people (Gen. 21:9-21). The sacrifice of Isaac is an episode from Abraham's life. To prove his faith, Abraham, on God's will, prepared to sacrifice his son Isaac. At the last moment the angel of God appeared, seized the faithful Abraham's sword, and saved his son (Gen. 22:1-19). Rembrandt The Angel Stopping Abraham from Sacrificing Isaac to God 1635. Oil on canvas.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Abraham Paintings More...More...More... ======== Abraham. [A'braham] Son of Terah and grandson of Nahor, the seventh descendant from Shem. His name was at first ABRAM, 'father of elevation;' but was altered by God into ABRAHAM, 'father of a multitude.' In this name (Abraham) the blessing of the Gentiles is secured by God. The family dwelt in Ur of the Chaldees, and were idolaters. Joshua 24:2. Abraham was the first to receive a definite call from God to leave not only the idolatrous nation to which his ancestors belonged, but to leave his kindred and his father's house and to go into a land that God would show him. God would bless him and make him a blessing, and bless all who blessed him and would curse all who cursed him. Gen. 12:1-3. He thus became the depositary of God's promise and blessing. Abraham at first only partially obeyed the call: he left Ur and went to dwell at Haran, in Mesopotamia (Charran in Acts 7:4), but with his father and kindred; and did not enter Canaan until the death of his father. When in the land God promised that unto his seed He would give the land. Abraham built an altar, and called upon the name of Jehovah. A famine occurring in the land Abraham went to sojourn in Egypt, and for want of faith he called Sarai his sister and she was taken into the house of Pharaoh, but the Lord protected her, and Abraham with his wife was sent away with a rebuke. When near Bethel he could again call on the name of the Lord. He had now become so rich in cattle that disputes arose between his herdsmen and those of Lot, and Abraham asked Lot to choose where he would sojourn, if he went to the right Abraham would go to the left; and they separated. Again Jehovah declared that as far as Abraham's eye could reach in all directions the land should belong to his seed. The next recorded event is that Lot was taken prisoner and carried to the north. Abraham pursued the enemy and recovered all. He refused to take even a thread of the spoil from the king of Sodom: he would not be made rich from such a source; but he was blessed by Melchisedec, king of Salem, the priest of the most high God, who brought forth bread and wine: to whom Abraham gave tenths of all. See MELCHISEDEC. God now revealed Himself to Abraham as His shield and exceeding great reward. When Abraham lamented to God that he had no son, God declared that he should have a son, and that his seed should be as the stars of the heaven for multitude.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counted to him for righteousness. This is the first time that faith is spoken of. Still he asked whereby should he know that his seed should possess the land, and was told to take a heifer, a she goat, and a ram, all of three years old, a turtle dove and a young pigeon. These he divided in the midst, except the birds, and laid them one against another. When the sun went down a smoking furnace and a burning lamp passed between the pieces: type of the fire that consumes the dross, and a light for the path. The same day God made a covenant with Abraham that to his seed should the land be given from the river of Egypt to the great river Euphrates : cf. Jer. 34:18, 19: it had been ratified in death, a type of Christ. When Abraham had fallen into a deep sleep, he was informed that his seed should be in a strange land, and be afflicted 400 years. Gen. 15 See ISRAEL IN EGYPT. Abraham had believed that God would give him a son, but now he waits not God's time, and at Sarai's suggestion he associates with Hagar, a bondmaid, and Ishmael is born, Gen. 16. — a figure of the law, that is, man's attempt to possess the blessing by his own effort. God now reveals Himself to Abraham as 'the almighty God,' a name which signifies that all resource is in God Himself. 'God talked with him,' and made a covenant with him according to that name. It is now that his name is changed from Abram, because he was to be a father of many nations. Abraham was to walk before the Almighty God and be perfect, and was to keep the covenant by having all the males circumcised (a figure of no confidence in the flesh), which he at once put into practice. Sarai's s name was altered to Sarah, for she was to be a princess and should have a son. Abraham entertained three visitors: on two leaving him the third is spoken of as the Lord who asks, "shall I hide from Abraham the thing which I do?" According to John 15:14, 15, this gives the key to Abraham being called "the friend of God." 2 Chr. 20:7; Isa. 41:8; James 2:23. God opened His mind to him, and Abraham was emboldened to plead for the righteous in Sodom. Abraham's faith again fails him and at Gerar he once more calls Sarah his sister, which might have led to sin had not God protected her, and Abraham is again rebuked. Isaac is born, and conflict ensues between that which is a type of the flesh and the Spirit: Hagar and her son Ishmael are cast out. Gen. 21: cf. Gal. 4:22-31. God then tried the faith of Abraham by telling him to offer up his son Isaac for a burnt offering. Abraham obeyed, and, but for the intervention of the angel of the Lord, would have killed his son, believing "that God was able to raise him up even from the dead." After the death and resurrection in figure of Isaac, the unconditional promise is confirmed to Abraham that in his seed — which is Christ — should all the nations of the earth be blessed. Gen. 22:18; Gal. 3:14-18. If any are Christ's, they are Abraham's seed, and heirs according to promise. Gal. 3:29. The promise is sure to all the seed, "not only to that which is of the law, but to that also which is of the faith of Abraham, who is the father of us all." Rom. 4:16. Abraham was by faith so much a stranger (Heb. 11:9) that, on the death of Sarah, he had to buy a piece of ground of the children of Heth, to secure a sepulchre in the land. Gen. 23. He was so careful that Isaac should not marry one of the daughters of the Canaanites that he sent his servant (Eliezer perhaps) to his own kindred to seek a bride for Isaac, being convinced that God would send His angel and prosper the mission, which resulted in Rebecca being the wife of Isaac. Gen. 24. Abraham had another wife, Keturah, and concubines by whom he had sons; but to these he gave gifts and sent them eastward, so that Isaac and his seed might peacefully dwell in the promised land. Abraham died at the age of 175, and was buried with Sarah. The history of Abraham in Genesis divides itself into three parts. a. Gen. 12 - 14., his public walk and testimony as called of God. b. Gen. 15 - 21., his private and domestic history with God, illustrating the growth of soul, etc. c. Gen. 22 - 25. give in type a prophetical outline of events: namely, the sacrifice of Christ; the setting aside of Israel for a time; the call of the bride; and the final settlement of the nations in blessing in the end of the days. The nation of Israel was descended from Abraham, and we know how zealously they contended for the relationship, though alas, they had not and have not the same faith. Still the land was given to them, and when God's set time comes they will surely be brought back to their 'fatherland' and after trial and discipline will be blessed therein. Abraham being the father of Ishmael and the other sons sent into the East it is not to be wondered at that he is a personage of universal fame in that immense quarter of the world, and that there are numerous traditions concerning him. It can hardly be doubted that their relationship to Abraham will yet be found in their favour during the millennium when the promise that his seed should be 'as the sand of the sea shore' will have its fulfilment. To the Christian the life of this patriarch is worthy of the deepest attention, in view of the varied manifestations whereby God revealed Himself to him, whether in the formation of his character under those manifestations, or in the Christian's connections with him in the way of faith, or with respect to the unconditional promises made to him as to the possession of the land of Palestine both in the past and in the future. --- Morrish Bible Dictionary -------------------------------------------------------------------------------- 외아들도 기꺼이 바친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의 고향은 갈대아우르였고 그의 아내는 사라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 것은 일반 사람들이 따를 수 없는 신앙의 증인이요 신앙의 모범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 하였고 선민의 조상을 삼으셨으며(창 12:2) 메시아의 혈통으로 선택받았습니다(창12:3,22:18). 특별한 내용으로는 전쟁을 이기고 돌아오는 도중 살렘왕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고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바친 일이 있었으며(창 14:9-20) 인간의 생산능력이 다 끊어진 때인 1백세에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선민의 표증으로 할례의식을 창설하였으며(창 17:8,10)손 대접하기를 힘쓰다가 세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고 천사들의 예언을 들은뒤 여섯차례나 의인의 수를 밝히면서 중보기도를 드린 것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신앙의 표현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독자 아들을 하나님께 드린 사건입니다. ▷교훈과 적용◁ 첫째, 아브라함의 특수한 신앙과 전적인 순종을 우리 각자가 신앙에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갈바는 몰랐어도 인도자는 알았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의존하십니까. 셋째, 율법과 복음,선민과 이방인까지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 복의 근원 창세기를 보면 1자에서 11장까지는 천지창조와 만국민의 역사가 기록되어있고 12장에서 50장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국 가운데서 선민을 택하실 때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 말씀에서부터 선민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만민 중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고 선민과 제사장 나라를 삼으려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말씀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첫째로, 분리의 작업입니다 중세기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창세기 1장에 있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처음 3일은 하나님의 분리의 역사요 나중 3일은 장식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즉 처음 3일은 빛과 어두움, 하늘과 땅, 육지와 바다를 서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실 때 먼저 내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키워준 부모와 정든 친척들을 버리라는 말이요 인정과 정실을 버리고 과감히 옛 습관을 내던지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04:22).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실 때 먼저 세상에서 분리하시고 난 다음 하나님의 자녀 장식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불리우는 전제 조건이 됩니다. 기독신자는 과거 불신 시대 곧 세상에 처하여 살던 생활에서 완전히 부리되어야 합니다."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더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벧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오라"(고후06:14-17).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된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아무 이유없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우상도시 갈대아 우르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다신교의 습성에서 유일신 하나님 신앙으로 돌입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과거생활과 현재 생활을 확실하게 분리하여야 합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 땅을 떠날 때 그의 나이 75세로서 아내 사래와 조카 롯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신앙 행위입니다. 하나니의 백성은 어디를 가든지 먼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이는 신앙의 행위요 곧 예배의 정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디를 가든지 먼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노아도 홍수가 지난 후 육지에 내려와서 제일 먼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창08:20).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택함받은 신령한 선민이니 선민 새활의 중심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요4:23). 천사도 흠모하는 우리들의 예배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최고의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사56:2), 하였습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새 이름을 받았습니다 (창17:5). 아브람이 아브라함이라는 이르으로 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사래도 사라라는 새 이름을 받았으니 열국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이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니 이는 곧 복의 근원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사명과 부합되는 고귀한 이름입니다. 성서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야곱에게 하나님께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주신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명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사람에게 새 이름을 주신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오늘 우리도 참다운 주의 사명자 참다운 그리스도인일진데 새 이름을 받다 과거의 구습 과거의 악행을 버리고 새 생활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새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네번째로, 독자를 바치는 헌신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지금까지 수 많은 어려움이 많았으나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 같았습니다. 이시험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고비였습니다.이것이 바로 복의 근원이 되는 자격을 테스트하는 시험대였습니다. 차라리 그가 가진 우양 수 천마리를 바치게 하였으면 쾌히 순종할 수 있는 일이겠으나 독자를 바치라 함은 父情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익서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아들을 사랑하는 것의 경중을 헤아려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가장 귀한 것을 바쳤습니다. 수만의 우양과도 바꿀 수없는 외아들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여준느 것입 니다.그는 아무런 원망이나 불평도 없이 무조건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는 신앙을 보여준 것입니다. 진실로 그것은 아브라함의 전부를 바치는 제사였습니다.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가 가진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아들은 고사하고 물질 바치는 일에 조차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너는 내것이라"(사 43:1).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왔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부가 주의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는 하나님께 우리를 청지기로 삼으시고 위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을 맡았으면 하나님 나라에 필요할 때 아낌없이 "예"하고 바쳐야 할 것자비니다. 오늘의 신자들은 바치다는 데 너무 인색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정성을 보시고 더 귀한 것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서 축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신앙의 아버지요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전 생애는 신앙이요 복종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아브라함의 신앙 생활을 본받아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아무 미련없이 고향을 떠났으며 그는 어디로 가든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는 언제나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새 출발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아브라함의 믿음과 절대 순종의 신앙 생활을 본받을 때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람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여 만복의 근원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 아브라함…창조주 명령에 ‘절대 순종’ 모범 아브라함이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땅에 있는 성읍이었다.그가 우르에 살았던 시기가 역사적으로는 수메르의 지도자 우투헤갈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우르남무 왕의 시대에 해당한다.당시 수메르에는 일곱 성읍의 수호신들을 비롯한 3600명의 신들이 있었다.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의하면 과학자였던 아브라함은 이렇게 어지러운 다신 숭배에 대하여 강력히 반발하고 있었다. “천체가 인간의 유익에 기여하는 것은 그들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의 명령에 순종하기 때문이다”(유대고대사 1-7) 쿰란 문서의 하나인 ‘요벨’서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는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데라의 본래 고향이 하란에서 가까운 에블라 지역이었다고 한다.에블라의 지명이 데라의 6대조인 에벨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추정되고 아브라함의 친척들이 계속해서 그 부근 지역에 살았기 때문이다.지금도 하란의 서쪽에는 아브라함의 탄생기념 사원이 있다. 결국 데라는 그들의 고향 에블라가 이교도들에게 점령되자 아브라함을 데리고 유브라데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우르에 살게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던 집안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수메르의 다신 숭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결국 데라는 우르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 내외와 함께 하란으로 복귀했다.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의 명대로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간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하나님의 그 지시에는 보너스가 붙어 있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2-3) 그는 우르 땅에 살 때에 사람들이 거짓 신들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그들이 다 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고생쯤은 감수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보니 그곳에도 역시 많은 신들이 있었다.뿐만 아니라 가나안의 장사꾼들은 하나님을 ‘엘’이라는 우상으로 만들고 땅의 여신 아세라와 음란의 여신 아스다롯을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사람들의 땅에 나그네로 살면서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했으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 땅에 기근이 있어 애굽으로 가라는 뜻인 줄로 알고 내려갔다가 아내를 빼앗길 뻔하기도 했다.뿐만 아니라 조카 롯이 북방 왕들에게 잡혀갔을 때에는 그를 구하기 위해 가나안에 속하는 아모리 족속의 신세를 져야 했으니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매사에 주관이 없어보였다.아내 사라가 여종 하갈과 동침하라면 그렇게 했고 하갈과 그녀 소생의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하면 그대로 했다.그는 아마도 아내의 말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렇게 매사를 아내가 시키는 대로 살던 공처가 아브라함은 어느날 갑자기 독자적인 행동을 한다.아내와는 의논도 없이 아들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데리고 떠난 것이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의 행동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아내와는 아무 의논도 없이 아침 일찍이 일어나 아들 이삭을 데리고 사흘 길을 떠난 것이다.이치대로 한다면 아브라함은 그 명령의 진의를 타진해야 했다. “자식을 번제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에게나 하는 짓인데 어찌하여 하나님이 그들과 같은 명령을 하십니까?” 비록 하나님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당연히 그 내용을 재확인해야 했다.그가 혹시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런 질문도 없이 아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도대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교감이 오갔던 것일까? 모르고 따르는 것은 순종이 아니다.아브라함은 그 이유를 알았음에 틀림없다.아마도 그는 처음 하나님의 명령을 받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시005:12) 그러나 아브라함의 시대에 의인은 없었다.소돔 성은 의인 열명이 없어서 멸망했던 것이다.그런데 하나님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자 아브라함은 자신이 아들을 속죄의 제물로 바침으로서 아픔을 당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하나님 쪽에서 볼 때 그것은 아브라함의 독자와 그분의 독자를 맞바꾸자는 제의였을 수도 있다. 아브라함이 시키는 대로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산으로 올라간 이삭은 부친의 결박을 조용히 받았다.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았던 것이다.그러나 아브라함이 칼로 아들을 잡으려 할 때 하나님은 그를 제지하고 예비하셨던 수양으로 번제의 제물을 대신하게 했다.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제의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분은 너무 기쁘셔서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며 말씀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8) 김성일<한세대 교수>
2 사탄, 마귀, 귀신
인물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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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 나타난 귀신들림과 축사(逐邪) 김지철(장신대:신약학 교수) - (막05,1-20 거라사 귀신들린 자의 치유: (마08,28-34; (눅08,26-39)을 중심으로 - 복음서기자들은 인간에게 귀신이 들리게 하는 힘, 또는 인격으로서 귀신의 존재를 보도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귀신을 축출하는 사역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사역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강조한다. 곧 귀신축출 사건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기적사건들 가운데 결정적인 사건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예수에게서 귀신축출 사건은 병치유와 더불어 예수의 치유 기적사건 가운데 한가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로 양자는 종종 서로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별개의 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귀신축출이란 성경에서 보면 사탄의 세계가 종말을 고하고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적으로 예수의 몸을 통해 드러났다고 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시는 구체적인 모습이 예수의 행위를 통해 드러남을 비유적으로 나타내 주는 징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특별히 마가복음에 나타난 한 이야기(거라사 귀신들린 자: 막 5,1-20)를 통해서 예수의 귀신축출 사건을 살펴보려 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축사자로서의 예수의 모습과 귀신들린 자, 그리고 귀신들과의 관계성을 검토해 보려 하는 것이다. 먼저 용어풀이와 복음서 전체에 나타난 흐름을 살펴보고 우리의 본문을 중심으로 석의적 분석을 기초로 하여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에 관련된 몇가지 신학적/목회적인 결론을 맺고자 한다. I. 관련 용어 이해: 사탄(마귀)과 귀신들 Satan 1. 마귀/사탄 히브리어어의 사탄(욥1,6-8.12.2,1-7; (슥3,1.2 등)은 LXX 역에서 마귀로 번역된다. 신약에서 보면 사탄은 36 번, 마귀는 34 번 등장하고 있다. 두 어휘 모두 공관복음서와 바울서신 사도행전 계시록등에 나타난다. 많은 경위 이 두 어휘는 서로 동의어로 혼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예수의 광야 시험 장면인 (막 1,13)에서는 사탄으로 나타나나, 그 병행구인 (마 4,1) (눅 4,2)에서는 마귀로 언급되고 있다. 계시록에서는 둘 다 혼용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실제로 용어사용에 있어서 마귀와 사탄은 의미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마 4,1 병행; (눅 4,2; 참조 (막 1,13; (요 13,2.27; (눅 22,3). 마귀(눅 8,12)/사탄(막 4,5)은 우선 '악한 자'로 이해된다(마 5,37, 13,19.38; (요 17,15(참조 (엡 6,11.16; (살후 3,3; (요1 2,13-14; 3,8.12; 5,18-19). 그리고 유혹자(마 4,3), 원수(마 13,39; (눅 10,19), 공중의 권세잡은 자(엡 2,2), 이 세상의 통치자(요 12,31; 14,30; 16,11), 벨리알(고후 6,15), 바알세불(막 3,22 병행)로 불리우기도 한다. 사탄이 하는 일은 주로 사람들을 고소하고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유혹자로 등장한다(대하 21,1; (욥 1,6-2,7; (시 108,6(LXX); (슥 3,1-2; (마 4,3; (눅 22,31: 사단이 밀까브르듯 한다; (막 4,15; 8,33: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이에서 더 나아가 예수의 적대자(마 4,1-11; 병행 (눅 4,1-13), 그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마 13,39: 가라지를 심은 원수), 귀신들의 우두머리로(마 9,34; 12, 24.26; 25,41: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가는 마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나, 요한의 경우는 6,70; 8,44; 13,2에서 마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마귀와 사탄이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용어로 나타나고 있다( 참조 (마 4,1.5.8.11과 4,10; (막 4,15; (눅 8,12; 13,16). 2. 귀신들 마귀/사탄과는 달리 귀신은 자주 복수형태로 등장한다. 신약의 경우 63번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 53번이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다. 곧 마태복음(11 번), 마가복음(13 번), 누가복음(23 번), 요한복음(6 번)에 나타난다. 귀신들은 종종 '더러운 영들'(막 1,23.26.27; 3,11), 또는 '악한 영들'(눅 7,21), '벙어리 영'(막 9,17), '벙어리되고 귀머거리된 영'(막 9,25), '병약함의 영들'(눅 13,11), '귀신들의 영들'(계 16,13.14)로 불리운다. (눅 8,2에서는 '악하고 병약한 영들'과 '일곱 귀신들'이 함께 언급된다. 그러나 단지 '영들'만으로 귀신들을 표현하기도 한다(마 8,16; (눅 10,20; (행 23,8.9). 때로는 레기온(막 5,9; (눅 8,30: 군대/많다)이라는 말을 통해서 귀신들의 숫자가 많음을 표시하기도 한다. 귀신은 주로 사람 안에 거주하면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그들을 아프게 하며 병들게 한다. 이에 예수는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신다( ). 예수의 제자들 또한 예수처럼 귀신들보다 더 강한 영의 능력을 받아 축사를 행한다. 3. '귀신들리다' 이 동사는 신약 복음서에서 13 번 등장한다. 마태복음에 7번, 마가복음에 4번, 그리고 누가와 요한복음에 각각 한번씩 나타난다. 이것은 사람이 그 안에 머무는 귀신에 의해 질병상태에 놓이는 것을 가리킨다. (요 10,21.22에 의하면 이'귀신들리다'라는 말은 '귀신을 지니고 있다'라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 15,22에서는 단순히 귀신들림이 아니라, '귀신들려 고통 당하다'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곧 인간의 몸과 마음에 지니고 있는 질병의 근거가 귀신들에게 온 것을 말해 준다. 4. 귀신들의 장소와 시간 귀신들이 머무는 곳은 광야(눅 8,29: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마 12,43 병행; (눅 11,24 참조 (막 1,12.13 병행), 파괴된 곳(계 18,2), 무덤(마 8,28 병행; (막 5,2; (막 5,3 병행; (눅 8,27; (막 5,5)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에 대한 적대자 곧 귀신들이 갇힐 곳은 무저갱(눅 8,31; (계 9,1; 20,1-3 참조 롬 10,7)으로 나타난다. 귀신들이 또한 머무는 곳으로 불과 물, 공중이 나타나기도 한다(9,22; 참조: (마 17,15. 불: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하는 수단(계 20,9; 참조 (눅 9,54); 물: 귀신들의 요소다(계 12,15.16; 13,1; 참조 (막 5,1-13 병행, 공중권세를 잡은 자(엡 2,2)). 귀신이 활동하는 시간은 주로 밤이다. 밤이란 신적인 계시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악한 영들, 죽음의 영이 일하는 시간으로 나타난다(눅 12,20; 참조 (행 20,7-9). 예를 들어, 베드로가 고기낚기를 실패하는 때도 밤으로 나타나며(눅 5,5-7; (요 21,3-6), 예수가 배반을 당하는 때도 밤이다(요 13,30; (고전 11,23), 밤에 체포당한다(참조 (눅 22,53; 예수의 예언: "밤에 너희가 나를 다 버리리라"(마 26,31; 26,34 병행 (막 14,30). 귀신들은 곧 어두움을 가져오는 존재이다(계 16,10). 따라서 예수가 다시 오시는 종말의 때란 더 이상 밤이 없는 빛의 자리이다(계 21,25; 22,5). II. 사탄과 귀신들의 역할 사탄은 첫 장조에서 인간을 유혹했던 뱀과 동일시되고 있으며(계 12,9; 20,2; 참조 (창 3,1-15), 하나님과 적대하는 능력으로 이 세계를 지배하는 자로 등장한다(막 3,23-26; (마 12,26/(눅 11,18). 사탄의 영역은 어둠의 세계이다(행 26,18; (고후 11,14). 질병과 파괴의 영들이 그에게 복종한다(눅 13,16; (고후 12,7; (살전 2,18; (딤전 1,20). 사탄/마귀는 곧 인간을 적대하는 자로서(삼상 29,4; (왕상 5,18 등), 초월적인 존재로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고소하는 자로 나타난다(욥 1,6-12; 2,1-7; (슥 3,1.2; (대하 21,1(LXX ). 또한 사탄은 하나님을 적대하는 원수로 나타나므로 마귀의 세계는 하늘의 세계와 대립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로 귀신들 중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자다. 귀신들은 말하자면 그의 졸개들이라고 할 수 있다(마 25,41; 계 12,7.9).마귀는 곧 질병과 죽음을 가져오는 귀신들의 우두머리이다(행 10,38; 참조 (고후 12,7-9; (히 2,14; 참조 (레 20,10.13.14). 마귀는 인간을 죽음과 질병에로 몰고 갈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간을 유혹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교하게 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불순종하게 하기도 한다(마 4,1.5.11 병행; (눅 4,2.3.6.13; (계 2,10; 12,9; 20,10). 예를 들면, 마귀는 예수의 비유 말씀 가운데서 곧 잡초를 밭 가운데 뿌릴 뿐 아니라(마 13,39), 하나님의 말씀의 선한 씨앗을 도둑질하기도 한다(눅 8,12). 또한 인간에게 올무를 놓고(딤전 3,7; (딤후 2,26), 인간을 죄에 빠뜨릴 뿐 아니라(요 8,44; (요1 3,8), 처음부터 살인자이고, 거짓말쟁이고, 죄인이다. 유다에게 반역하게 만들 뿐아니라(요 13,2), 인간을 교만하게하고(딤전 3,6), 형제를 미워하게 한다(요1 3,8). 따라서 모든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는 마귀의 자녀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다(요 8,44; (행 13,10; (요1 3,8.10). 사탄은 죄와 사악함의 시조인 것이다(막 4,15; (눅 22,3 병행; (요 13,27; (행 5,3; (딤전 5,15). 그러나 이러한 마귀의 사역은 일정한 시간에 제한되어 있다(계 12,12).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마귀는 천년동안 갇히울 것이다(계 20,2). 그리고 결정적인 마지막 전투 후에(계 20,10), 또는 마지막 심판 후에(마 25,41), 마귀는 영원한 불에 던지워 멸망당할 것이다(마 25,41; (계 20,10). 그러나 사실은 마귀의 다스림의 세계는 이미 무너졌다(참조 (요 12,31; 14,30; 16,11). 예수께서 이미 마귀의 일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나타나셨기 때문이다(요1 3,8). 예수께서 귀신을 내 쫓음은 곧 마귀의 세계가 종말을 고했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도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마 12,28 병행; (눅 11,20). III. 귀신들림과 예수의 귀신축출 1. 귀신들림이란 인간 안에 들어온 귀신들이 그 인간을 육적으로 영적으로 괴롭히며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예: (삼상 16,14-23: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사울)를 번뇌케 한다). 성경은 귀신들린 사람을 '귀신을 지녔다'고도 말한다(눅 4,33; (마 11,18 병행; (눅 7,33: 세례요한; 예수에 대해서 (요 7,20; 8,48.49.52; 10,20). 그러나 귀신들은 사람에게 '들어가기도' 하며(눅 8,30; (막 5,12.13; (눅 8,32.33). 능력있는 말씀에 의해 그에게서 '떠나기도' 한다(막 1,26 병행; (눅 4,35; 4,41; 8,2; (마 8,32 병행; (막 5,13/(눅 8,33; 8,35.38; (막 7,29.30; (마 17,18; (눅 11,14). 예수를 만난 귀신들이 떠나기 전에 귀신들린 자에게 소동을 일으키기도 한다(마 1,21-28; 5,1-20; 7,24-30; 9,14-29 등). 이 귀신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곧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지니고 있음으로(막 1,24; 3,11; 참조 (행 16,17) 그들이 영적 존재임을 알려준다(귀신들림의 구체적인 현상은 III. 3. 또는 IV. 3. 을 참조할 것) 2. 마가복음에는 네 개의 중심적인 귀신축출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막 1,21-28; 5,1-20; 7,24-30; 9,14-29). 그러나 그 외에도 짧은 보고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마 9,32-34; 12,22(눅 11,14); (막 1,32-34.39; 3,7-12등). 귀신축출 이야기에 나타난 귀신들린 사람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사회적으로 근거없는 자들로, 사회의 변두리에 쫓겨난 사람들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행동이나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열악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반드시 모든 사람이 다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버나움 회당에서의 귀신축출 사건(막 1,21-28)을 보면, 그 사람은 유대 사회의 중심흐름에 놓여 있는 사람이며, 그의 공동체에서 종교적인 생활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귀신들린 아이의 경우도 그 아이는 그의 가족과 함께 있었고 그 아버지와 함께 예수의 제자들을 보기 위하여 동행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막 9,14-29). 경제적으로도 그 당시 사람들의 평균수준보다 오히려 낳은 상태에 있었던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경우도 가정에 머물고 있었으며(막 7,24-30), 그녀는 딸을 집밖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딸이 사람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고, 집을 떠나기에는 너무 그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약 가정에서 그와 같은 딸을 돌보았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녀의 가정이 부유한 가정이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막 5,1-20)는 버려진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무덤 동굴에서 살고 있었다. 이것은 사회의 변두리마져도 그를 용납하지 못했음을 말해 준다. 그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간주되어, 성전에 들어가거나 예배에 참여하거나 종교적 식사에 참석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이 거라사 귀신들린 사람을 통제할 수 없었다는 것은 그 귀신이 매우 폭력적이어서 이웃과 공동체의 자리가 그를 유리시킬 수밖에 없는 파괴적인 존재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위에 언급된 대로 귀신들림이 혼돈된,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는 것은 때때로 그가 자신의 상황에 전혀 반대되는 성향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든지, 아니면 귀신들은 영적인 적대자를 직면했을 때 그 자신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쨋든 귀신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인간에 대한 적대적인 사역이 예수에 의해 거부됨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예수의 귀신축출 사역 1) 축사자로서의 예수: 예수는 당시 유대적인 세계관과 같이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곧 마지막 시대에 마귀와 그 세력들은 다 제거되어질 것이라는 유대 종말론의 한 단면을 가지고 계셨다(1 QS 3,24.25; 4,20-22; 1 QH 3,18; 1 QM 1,10.11 등).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귀신축출과 병치유는 말하자면 바로 이러한 유대 종말론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 또한 그것을 보여준다(마 11,4-6 병행; (눅 7,22.23). 다시 말하면 예수의 병치유와 그에 따른 귀신 축출은 구약 예언적 말씀에 대한 성취라 할 수 있다(참조 (사 29,18.19; 35,5.6; 61,1). 이를 통해 예수는 자신의 종말론적인 자기 인식과 그의 축사행위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 특히 귀신축출에 대한 종합보고인 (마 12,43-45(병행; (눅 11,24-26)을 보면 예수는 귀신을 쫓아내는 분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적대자들에 의해서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고소를 당한다(막 3,22; (마 9,34; 12,24; (눅 11,20). 이것은 말하자면 예수가 축사자로 나타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적대자들의 그러한 비난을 예수는 거절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축사자였다는 것을 거부하지는 않고 있다. 예수는 자기 스스로 성령/하나님의 손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마 12,28; (눅 11,20)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가 헤롯을 향해 자기의 사명과 운명을 언급한 구절인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눅 13,32) 는 말씀은 바로 예수가 축사자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뿐 아니라, 축사자 예수의 이름을 빌어 축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막 9,38 병행 (눅 9,49) 그러한 명성에 걸맞는 현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축사능력은 그의 제자들(70인)에게도 전수되고 있다. 그들은 예수 앞에 나아와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라고 기뻐하며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축사자의 권위는 이미 제자들을 선택할 때 부여된 것으로 마가는 보도하고 있다. 마가에 의하면(3,14)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는 예수와 더불어 함께 있음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을 파송하는 것이다. 특히 제자 파송에서 그들의 역할은 첫째는 말씀 선포였고, 둘째는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었다. 즉 예수는 제자들에게 축사의 권위를 부여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축사를 행하는 권위의 전승은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제자들의 사 역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이에 힘입어 바울도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 16,18)고 축사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2) 귀신축출의 과정: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 귀신들린 자에 대한 예수의 치유는 대체적으로 귀신을 그 사람에게서 쫓아내는 축사행위로 이루어진다(마 15,21-28 병행; (막 7,24-30; 막 1,23-28 병행; (눅 4,33-37; (막 5,1-20 병행; 9,14-29 병행). 예수는 축사행위를 통해서 육체적인 질병도 치유했다. 예를 들면 맹인의 고침(마 12,22-24; (막 10,46-52 병행; 2,1-12 병행), 벙어리(마 9,32.33 병행; (눅 11,14; 참조 (막 9,14-29 병행), 중풍병(막 2,1-12 병행; (눅 13,10-17), 문둥병(막 1,40-45 병행; (눅 17,11-19), 열병(막 1,29-31 병행)의 치유등이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축사의 특징은 귀신에 대한 꾸중과 위협이다(막 1,25 병행; (눅 4,35; (막 3,12 병(행; 9,25 병행; (눅 4,39 등). 그 외에도 침을 바르는 것(막 7,31-37; 8,22-26; (요 9,6.7). 안수하는 것(마 8,15 병행; (막 1,31; 마 9,29 병행; 20,34; 막 7,32.33; 8,22-26; 참조 막 5,41 병행)도 병행된다. 여기서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축사자로서의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귀신축출의 과정을 살펴보면, a.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막 1,23: 귀신들린 사람의 소리지름) b. 귀신(들린 자)의 응답: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막 1,24)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막 5,7) c. 예수의 침묵명령: "잠잠하라"(막 1,25)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막 1,25; 5,8; 9,25). 이는 축사행위에 있어서 하나의 도식이라 할 수 있다. 그 중간에 귀신을 향한 예수의 물음이 나타난다. "네 이름이 무엇인가?"(막 5,9). 이름을 질문함으로 귀신을 무장해제 시킨다. 막 9,21-22에서는 예수가 귀신들린 아이의 질병 과정을 묻는다("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d. 예수가 귀신으로 하여금 다시 귀신들렸던 자에게 되돌아오지 못하도록 명령함(참조 (마 12,43-45; 병행; (눅 11,24-26). e. 귀신들이 예수에게 관용을 요청함(막 5,10-12: 돼지에게로 들어가기 원함). f. 예수가 귀신들로 돼지에게로 들어가도록 허락(막 5,13). g. 귀신들린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다(막 5,15). h. 목격자들의 두려움과 놀라움(막 1,27: "다 노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이 과정에서 귀신의 폭력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소리지르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함/ 돼지를 물에 빠뜨림(막 5,4-5/11-13),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경련을 일으키게 함(막 1,26; 9,26).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병치유의 기적과 마찬가지로 때로는 예수와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닌 멀리있는 사람이 귀신들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귀신을 쫓아낸 경우도 있다(막 7,24-30: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는 사실이다. 3) 귀신축출의 수단: 예수의 말씀으로 귀신을 내 쫓기도 하시며(막 1,25; 9,25), 하나님의 영/손가락으로 내쫓기도 하시고(마 12,28; (눅 11,20), 자기 권위로 내쫓기도 하신다(막 9,25: 내가 네게 명령한다). 특히 성령을 통해 나타난 귀신축출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오심을 의미한다(막 3,22-27 (마 9,32-34; 12,22-30; (눅 11,14-23). 따라서 축사행위는 단지 하나님 나라의 준비나 도래의 표지라기 보다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현실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을 뜻한다. 강한 자의 비유는 그것을 말해준다(마 12,29; (막 3,27; (눅 11,21-22). 예수는 그의 축사행위에서 사탄의 능력을 박탈하고 구속한 것을 의미한다. 귀신축출 자체가 바로 메시야적 행위라는 것이다. 귀신축출은 사탄을 가두는 첫 단계이고, 마지막 심판에서 궁극적 승리가 나타날 것이라(마 13,30: 추수 때)는 말씀이다. IV. 복음서와 원시기독교회에 나타난 귀신축출 보고의 특성 1. 마태복음(마 ): 사탄과 마귀의 이름이 서로 호환되고 있지만(4,10; 12,26; 16,23), 마귀라는 이름을 보다 선호(4,1.5.8.11; 13,39; 25,41)한다. 마태는 사탄의 유혹자로서의 성격을 부각시킨다(4,13). 마태는 예수의 축사의 역할을 마가복음보다는 축소시킨다. 예를 들면 막 1,21-28의 가버나움에서의 귀신축출의 이야기를 생략한다. 마 8,24-34에 이르기까지 축사의 이야기를 담지 않고 있다(요약보고에서만 취급: 마 4,24). 그러나 마태에게서도 귀신축출의 행위는 예수의 중요한 계시행위였다(마 12,22-30). 마 9,32-34(벙어리 귀신의 축사: 눅 11,14)에서 축사는 소경과 벙어리를 고치는 메시야적 행위로 이해된다(사 42,7.16; 29,18; 35,5; 42,18-20; 43,8; 61,1(LXX)). 예수의 축사행위를 통해서 종말에 나타날 귀신들의 고통이 이미 시작됐음을 알고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는가?"라고 예수에게 묻고 있다(마 8,29). 이에 예수는 다만 귀신들을 향해 "나가라"(마 8,32)고 명령하신다. 마태에서는 예수가 기름이나 침이 아니라, 말씀으로 축사를 행하신다(마 8,16). 2. 마가복음(막 ): 마가는 곧 예수의 공적인 첫 번째 행위가 귀신축출임을 명백히 한다. 마가복음의 13 개의 치유이야기에서 가장 큰 범주는 축사(1,21-28; 5,1-20; 7,24-30; 9,14-29)인 것이다. 마가는 곧 예수의 사역의 요약보고에서 그의 귀신축출의 모습을 언급하므로 예수의 귀신축출이 그의 사역에서 지닌 의미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1,32-34; 3,11-12). 마가복음에 나타나는 사탄의 중요한 역할은 예수를 그의 선교적 사명에서 빗나가게 하는 일이었다(막 1,13: 광야시험; 8,33: 베드로의 간청을 사탄의 요구로 이해). 만약 마가가 씨뿌리는 자를(4,3.14) 예수로 이해했다면, 사탄은 예수의 사역을 파괴하는 자로 이해한 것이다(4,15). 마가는 귀신이라는 단어를 13 번, 더러운 영이라는 단어를 11 번 사용한다. 때로는 둘을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한다(참조 3,22.30; 7,25-26). 귀신들이라는 용어는 축사의 문맥에서만 사용된다(1,34.39; 3,15). 귀신들은 사람들에게 하는 일은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소리지르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1,26). 귀신들은 곧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자로서, 자해하는 자로 묘사(5,3-5; 9,22)되고 있다. 곧 사람을 땅에 넘어지게 하며 입에 거품을 물게 하고 이를 갈게 한다(9,18). 그러나 귀신은 동물에게도 들어갈 수 있는 존재(5,11-13)로 묘사되기도 한다. 예수가 귀신을 내쫓을 때에 예수가 사용한 동사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즉 '꾸짖다'( : 막 1,25; 3,12; 9,25), '입막음하다'( : 1,25-26), '명령하다'( : 9,25: 귀신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명령하다)는 동사를 통해 귀신의 사역을 제어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1,27; 2,7; 4,41; 6,1-6.14-16.49-50.54; 8,27-28)에 대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사람들 중에 귀신들도 중요 역할을 담당한다(1,24-25.34; 3,11-12; 5,7)고 말한다. 이러한 고백은 마가복음서의 시작에서부터(막 1,1), 예수의 세례받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1,11), 그리고 적대자들(대제사장)과(14,61) 이방 백부장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지속됨을 보여준다(15,39). 이러한 사실을 통해 마가는 그의 예수상을 제시하려 한다. 3. 누가복음(눅 ): 광야유혹 이야기에서 누가는 마귀가 '잠시동안 그를 떠났다'(4,13)라고 보고함으로 독자로 하여금 예수의 적대자가 다시 등장할 것을 기다리게 한다. 그렇다고 귀신들의 역사가 가롯유다에게 마귀가 들어갈 때까지 마귀가 침묵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그의 사역을 통해 귀신들과 투쟁하고 있다(4,33-37; 6,18; 7,21; 8,2.26-39; 9,37-43; 눅 10,17-18; 11,14; 13,11.32). 누가는 마가보다 더 분명하게 마귀가 원시기독교회에서도 적대자임을 말해준다(눅 8,11-12; 행 6,7; 13,5). 가장 결정적인 예수에 대한 적대는 가롯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서 예수를 배반하게 하는 것이다(눅 22,3-4). 그의 제자들도 항복하도록 만든다(눅 22,31-32: "사탄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사탄의 파괴적인 능력을 예수는 기도로서 승리한다. 또한 사탄은 제자들을 완전히 파괴시키지는 못한다. 예수의 공생애 사역중에 70인 제자의 보고가 우리에게 흥미를 끈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계속해서 예수의 말씀 곧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18)는 말씀을 통해 사탄의 종말론적인 멸망이 예수의 사역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모습은 사도행전에서 보다 명백하게 보여진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께서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예수는 성령을 통해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자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며, 축사는 곧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4. 요한복음(요 ): 놀랍게도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자신이 행하는 축사의 모습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요한복음 기자가 귀신이라는 용어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가 귀신들렸다(7,20: 8,48.49.52)고 비난받고 있음을 말하기 때문이다(7,20: 이는 그가 미쳤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10,21-22).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마귀로 불리우고(6,70), 사탄이 곧 유다에게 들어갔다(13,2.27)고 말한다. 8,44에서는 마귀가 예수와 대조되고 있다(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거짖말쟁이/거짓의 아비). 예수는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마귀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심판받고 무너질 것이다(12,23-36)고 말씀하신다. 한가지 눈여겨 볼 것은 공관복음서에서 사탄의 패배는 예수의 축사행위와 연관되어 있으나, 요한복음에서는 사탄의 패배는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다(요 14,30; 16,11)는 점이다. 5.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의 축사: 예수는 제자들에게 축사를 가르치셨으나(마 10,8 병행, 눅 9,2; 막 3,15 병행; 6,13; 눅 10,17 등), 제자들이 행한 축사는 성공(눅 10,17)과 실패(막 9,18)가 엇갈리면서 나타나기도 한다. 원시기독교회에서 축사와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마 7,22; 막 16,17; 눅 10,17; 행 3,6.16; 4,7.10.30; 16,18). 치유하는 기도(참조 행 9,40; 28,8)와 제의적인 기름부음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기도 했다(약 5,14). 또 안수를 행하거나(행 9,12.17; 28,8), 손을 붙잡거나(행 3,7; 참조 9,14). 전체 몸을 만지는 행위도 나타난다(행 20,10: 유두고; 참조 왕상 17,21; 왕하 4,34). 베드로의 구원하는 그림자에 씌우는 경우(행 5,15), 바울의 수건(행 19,12)을 놓은 경우도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치유에는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마귀의 모든 세력을 지배하시는 주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마 28,18; (빌 2,9.10; (골 2,10.15 등). 우리는 또한 바울의 축사적인 기도를 알고 있다(고후 12,7-9). 그러나 그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로 바뀌고 있음을 보게된다. V. 거라사 귀신들린 자의 치유이야기(막 5,1-20 병행; 마 8,28-34; 눅 8,26-39). 1. 짜임새: 막 1,23-28이 유대 회당에서 행한 축사행위이라면, 막 5,1-20은 이방 거라사 지방 무덤가에서 행한 축사행위이다. 이 본문은 그 짜임새가 아주 명확하게 구성되어 있다. 서론과 질병의 상태에 대한 언급(1-5 절), 예수님의 귀신과의 논쟁(6-13 절), 증거자들의 태도(14-17 절), 고침받은 자의 모습(18-20)이 차례로 나타난다. 여기서 몇가지의 주제들이 반복, 또는 중복되고 있다.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2. 6 절), 귀신들린 자가 무덤에 머무는 것에 대한 묘사(3. 5 절), 귀신들의 요청(10. 12 절), 갑자기 일어난 사건에 대한 목자들의 보고(14, 16 절)가 그러하다. 또한 이미 있은 일을 나중에 기록하는 방식의 언급도 있다. 예를 들면, 귀신들린 자가 예수를 멀리서 바라보다(6), 예수가 추방명령을 내렸다(8), 귀신들린 자가 군대귀신 집혔던 자로 확인된다(15c), 도시로부터 온 증거자들에게 일어난 일을 다시 보고한다(16 절: 돼지떼들의 일). '예수가 배에서 내려온 후 곧 귀신들린 자를 만났다'(2 절)는 묘사와 '귀신들린 자가 그를 멀리서 보고 달려왔다'(6 절)는 언급이 서로 긴장 관계를 이루는 것 같기도 하나 양자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바다 건너편'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옴으로(4,35; 5,21; 6,45; 8,13) 여기서도(막 5,1) 그 동안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의 한 부분임을 암시한다. 그 표현 뒤에는 각각 기적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다. 풍랑이 잠잠해지는 사건(4,35-41), 귀신들린 자의 귀신쫓아냄(5,1-20), 물위를 거니신 기적(6,45-52), 바리새인들의 표적 요청에 대한 대답을 하시면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막 8,13)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를 중심으로 한 모습을 살펴본다면, 바다 건너편(1 절)으로 가서, 그곳에 도착하여(2 절: 배에서 내리다),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다시 배에 타는 것으로 되어 있다(18 절). 특히 18-20 절은 선교 신학적인 동기가 들어 있다. 귀신축출의 양식/동기를 중심으로 본문을 분석해 본다면, 1)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1-2 절) 2) 귀신의 방어시도(6-7 절) 3) 예수의 축출명령(8 절) 4) 귀신의 내쫓김(종종 시위적으로 묘사된다: 13 절) 5). 목격자들의 두려움(15.20 절)과 귀신축출에 대한 소식이 퍼짐(14a.18,20). a. 질병의 특수성과 그 중증에 대한 묘사(지금까지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됨을 강조: 3-5 절) b. 치유된 자에게 행한 치유에 대한 실증(15 절: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c. 목격자들의 두려움의 반응(14.16-17.20 절: "보고 두려워하더라."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와 귀신과의 만남에서 드러난 대화와 그 결과를 보면, 예수는 a. 귀신의 이름을 묻는다(9 절). b. 귀신들은 자기가 누구인가를 드러내며 방어적인 요청을 한다(10-12 절). c. 이제 귀신들은 새로운 자리로 내쫓김(12-13 절)을 당한다. 2. 귀신축출과정의 구체적인 설명 1) 예수와 귀신들린 자와의 만남(1-2 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1-2 절). 예수가 거라사 지방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리자 마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아와 예수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사람은 더러운 영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더럽다'( )는 말은 유대 종교적인 용어이다. 즉 부정한 장소인 무덤에서 그가 나왔다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무덤이란 바로 귀신들이 머무는 장소이기도 하다. 거라사라는 이방지역과 더불어 무덤이라는 장소에 대한 설명은 따라서 부정함의 극대화를 드러낸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인격의 대면이다. 곧 이라는 말로서 어떤 긴장관계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즉 귀신들린 자의 부정한 영이 자기보다 강한 적대자를 만난 것 같은 낌새를 알아 이제 구체적인 도전적인 만남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2) 귀신의 방어적인 시도: 6 절의 도입부/7 절의 구체적인 시도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6-7 절). 귀신들린 자는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간청한다. 절하는 것은 예배하는 형태이다. 전적으로 복종적인 자세를 보인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방어한다. 그렇다면 6 절은 만남의 두 번째 단계인가? 여기에서 명백한 것은 예수의 우월성이 드러나고 귀신의 방어가 실패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러운 영이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있다. 이러한 귀신들의 큰 소리와 귀신들린 자의 큰 소리가 귀신축출의 설명가운데서 항상 반복되는 특성이다( : 소리지르다. 귀신들이 부르짖음: 막 5,5; 9,26; 눅 9,39). 소리지름 자체가 그가 영적인 인격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귀신들린 자는 예수에게 방어양식을 들이댄다.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있는가?'(단수로 되어 있다). 이는 상대방을 거절하며 그 한계를 긋는 언어인 것이다.(막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위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왕상 17,8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거라사인은 이방인으로서 높으신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그 아들로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방지역에서 더러운 귀신들에 의한 고백이라 할 수 있다. "나를 괴롭게하지 말라"는 간구에서 이미 예수의 힘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의 힘이란 귀신의 역할과는 다른 것임도 보여준다. 즉 귀신을 멸할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이시다(1,24: 나를 멸하러 왔나이까?). 3) 예수의 축출명령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8 절). 즉 귀신의 방어적인 간구 이전에 이미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는 명령을 하셨다는 것이다('나오라': ). 이는 꾸중이 담긴 전형적인 추방명령이다. 어디로 가라는 가에 대한 것은 불분명하다. 4) 귀신의 내쫓김의 진술 "허락하신 대로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니..."(13) 추방명령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즉 귀신들의 순종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에 복종했다. 여기에 축사자의 능력이 있다. 그 추방명령에 의해 귀신들이 돼지에게 들어간 것이다. 귀신들의 움직이는 모습, 즉 들어감과 나감은 성서에 구체적으로 진술되고 있다(참조 눅 22,3: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다). 5) 목격자의 반응 14: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촌에 고하니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 것을 보러 와서.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 하더라." 거주자들이 일어난 사건을 보기 위하여 왔다. 그들은 예수에게 나와서 치유받은 자가 어떻게 변모되었는지를 보았다. 그 치유의 모습은 명확하게 제시된다. 이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붙잡힌다. 이 두려움은 신현현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이해된다. 모든 보고를 들은 그들은 예수에게 그 지역을 떠날 것을 간청한다. 이 떠날 것에 대한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것이다(아니면, 소유자들이 계속적인 손해볼 것에 대한 반응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18-20: 치유받은 자, 그리고 그의 선포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 이에 목격자의 두려움과 기적적인 행위의 소식이 널리 퍼졌다(목격자들의 반응: 15.17 절) 3. 귀신들림의 특성 1)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막 1,21-28)은 예측 불가능한 무질서함을 보여준다. 그가 회당에 참여한 것을 보면 보통 때는 유대 종교사회의 주요흐름에 동참했던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 것으로 보이다. 어쩌면 영적인 적대자를 만났을 때에만 자기 고유한 모습을 보여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거라사 귀신들린 자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막 5,1-20). 그는 무덤, 곧 부정함의 장소에 그 거처를 두고 있다(3a). 그 질병은 광포함으로 나타난다(3-4). 사람들은 그를 쇠사슬로 묶어둘 수도 맬 수도 없었다. 그는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다. 이는 귀신의 광포함을 가리킨다. 그뿐만 아니라 밤과 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지르는 것이다(5). 통제할 수 없는 슬픔과 한 맺힘이 그를 붙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덤이라는 장소와 그의 행동 모습이 이러한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돌로 상하게 하는 것이다(5). 이러한 자학은 자기 파괴적인 충동에 의한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이러한 전체적인 진술은 귀신들의 이름이 레기온으로 주어지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즉 막대한 힘을 가지고 모든 묶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만약 한 사람 안에 2000 귀신이 거주한다면, 그는 무한한 힘을 사용할 것이다(이사야 65 장(LXX)은 귀신들림의 질병을 묘사하는 기본본문으로 이해됐다. 사 65 장에서 이방인들은 산에서 우상/귀신들에게 제사드리며(3 절), 무덤에서 사는 자들이고(4 절), 돼지고기를 먹는 자들이다). 산 사람과의 교제는 끊어지고 소외되고 상실된 인간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2) 귀신들은 인격적인 존재로 설명된다. 그들은 계시적인 비밀, 예를 들면 예수의 정체성을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자기의 운명을 알기에 예수로부터 침묵하도록 요청 받기도 한다(막 1,24.34 병행; 눅 4,34.41; 막 3,11; 5,7 병행). 귀신들린 자의 소리침은 곧 귀신들의 소리침으로 이해된다(참조 막 1,23 병행; 눅 4,33; 막 3,11; 5,5; 5,7 병행; 막 9,26 병행; 눅 9,39; 눅 4,41). 귀신은 귀신들린 자에게 경련을 일으킴으로 자기의 광포함을 드러내며, 귀신들린 자가 자기에게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막 1,26 병행; 눅 4,35; 8,29; 막 9,18.20 병행; 눅 9,39.42). 3) 축사의 과정 a. 이름을 물음: 9 절: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많은 귀신에 붙잡힌 것에 대한 표현이다. 9-12 절에서 단수와 복수가 계속적으로 뒤바뀐다. 내 이름은...우리가 많음이다. 우리를 돼지에게로... 막 1,24 에서는 단수와 복수가 혼용되어서 등장한다. 이는 인격적인 분열 때문인가? 아니면 속임수의 변명인가? 명백한 것은 예수가 오신 것은 사탄의 세력들을 멸하기 위함이다. 예수의 질문은 귀신에 대한 강압적인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b. 허용요구: 귀신들의 복종의 고백과 예수에 대한 요구가 함께 나타난다. 돼지떼가 바다로 빠진다(구약에서 바다란 종종 파멸의 자리이다). 결국은 귀신들이 그 파멸의 구덩이에 빠진 것을 의미한다. c. 추방명령: 예수의 우월성과 귀신들의 종속성이 뚜렷하게 대비되어 있다. 예수의 추방명령은 다른 때의 예수의 부드러운 온유함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여기서 귀신에 대한 예수의 분노가 들어있다고 해도 옳을 것이다. 13 절에서 귀신들의 나옴과 들어감이 묘사된다. 귀신들의 상하고 파괴하는 활동성을 드러난다. 광포와 자기 파괴적인 분노가 드러난다. 돼지떼에게 돌진하는 모습( )은 인간적인 판단에 의해서 조절되지 않는 격렬한 움직임을 뜻한다. 귀신들린 자의 광포가 돼지에게 전가되었고 곧 자기파괴가 명백히 드러났다. 귀신들린 자는 스스로 돌로 상해했으나, 돼지 떼는 언덕길로 내달아 물에 빠져 죽었다. 생명을 상하고 파괴하는 더러운 영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4) 귀신들림에서 치유 5,15b에서 3-5 절에서 보였던 광포한 모습이 전적으로 변화되어 있다. 그는 예수 곁에 앉아있다. 소리지르고 스스로 상하게 하는 대신에 정신이 들어 있다. 광포대신에 이성으로 되돌아왔다( 은 의 반대개념이다). 그는 전에는 벌거벗고 돌아다녔으나, 이제는 옷을 입고 있다. 예수의 귀신축출은 귀신들린 자를 조용한, 그리고 이성적인 정신상태로 되돌려 보냈다. 예수는 그를 귀신들로부터 자유하게 했다. VI.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반성 1. 예수가 축사자로서 활동하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도 당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의 질병을 귀신에게로 돌렸다(더러운 영/ 더 악한 영: 마 12,43-45 병행; 눅 11,24-26; 벙어리 귀신: 눅 11,14; 벙어리의 영: 막 9,17.25; 연약함의 영: 눅 13,11; 참조 눅 8,2). 따라서 치유란 귀신을 쫓아내는 데 있었다(마 9,33; 10,8; 12,24.27.28; 막 1,34.39; 3,15.22; 6,13; 9,38; 16,9.17; 눅 9,49; 11,15.18-20; 13,32). 예수는 육체적인 연약함, 예를 들면 소경(눅 7,21; 마 12,22-24; 막 10,46-52 병행), 벙어리(막 9,14-29 병행; 마 9,32.33 병행; 눅 11,14), 중풍병(막 2,1-12 병행; 눅 13,10-17), 문둥병(막 1,40-45 병행; 눅 17,11-19), 열병(막 1,29-31 병행), 게다가 마음과 정신의 질병까지도 귀신을 내 쫓음으로 치유했던 것이다(막 1,23-28 병행; 눅 4,33-37; 막 5,1-20 병행; 7,24-30 병행; 9,14-29 병행). 말하자면 예수시대에 귀신을 축출하는 것과 질병을 고치는 것은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되었다(막 1,32-34 병행; 눅 6,18.19). 그렇다고 모든 경우에 이 양자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귀신들림과 정신질병, 또는 귀신과 육체적인 질병과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귀신들림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광포함/자기상해 등의 귀신들림의 전형적인 모습과 정신질병과를 구분할 수 있는가? 2.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마 11,4-6 병행; 눅 7,22.23) 있어서 예수는 그의 치유를 구약의 성취로서 해석했다(참조 사 29,18.19; 35,5.6; 61,1). 유대주의의 종말론적인 기대가 귀신들에 대한 예수의 승리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막 3,27 병행; 참조 눅 13,32). 만약 예수가 하나님의 성령/손가락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이라면(마 12,28a/눅 11,20a),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한 것이라(마 12,28b 병행; 눅 11,20b)는 말씀이다. 따라서 바알세불에 의해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비난에 대해서 단호히 거절하신다(막 3,22 병행). 예수의 영을 잘못 이해하는 자는 곧 거룩한 성령에 대한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짓는 것과 같다(막 3,28-30 병행)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축사는 마귀의 힘을 종말론적으로 제거했다는 표징이며, 동시에 마귀와 싸워 승리함으로 예수가 마지막 승리자가 됐다는 증거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이 쫓겨나가는 자리에는 항상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가장 구체적으로 세워지고 있는 자리를 어디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이 시대에도 인간을 개인적, 집단적으로 억압하며 파괴시키는 세력들을 향해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축사적 행위를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3. 예수는 귀신적인 인간/음식의 불결함에 대해 결코 두려워하거나 기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본질을 바꾸어 버렸다. 그는 친히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었고 질병들린 사람의 동무가 되심으로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함을 몸으로 보여주었다(마 9,10 병행; 막 2,16; 눅 5,30; 15,2; 행 10,1-11,18; 갈 2,11-14). 또한 귀신들린 자와 귀신과를 구별함으로써 귀신들린 자와 귀신을 동일시하며 귀신들린 자를 사회와 종교에서 영원히 제거하는 당시의 관습을 타파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종교사회의 판단에 의해 억압되어 있는 인간 본연의 가치를 드러내고, 한 인격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다시 가정과 종교적 사회로 되돌려 보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정결/부정결에 대한 판단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그 판단으로 사람들이 자유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억압받게 되는 것인가? 우리의 가정과 사회, 그리고 종교는 오히려 이러한 갈등과 억압을 증폭시키고 한 맺힘이나, 억압에 대한 저항적 세력화된 귀신들림을 만들고 있는 주범은 아닌가? 4. 예수는 축사행위를 할 때에 어떤 고정된 축사양식을 도입하지 않았다. 어떤 특별한 도구도 사용하지 않고(예를 들면, 의약품/기구/향료등), 또한 어떤 권위에도 호소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한 권위를 갖고 축사를 행한다(마 12,28; 눅 11,20). 그렇다면 오늘의 축사 행위는 어떻게 나타나야 할 것인가? 우리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는 않는가? 5. 예수의 축사행위 자체에만 관심가진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마 7,22-23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행위 없이 축사가 행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님을 분명히 선언한다. 그것은 마치 사랑이 없으면 그 성령의 은사가 아무 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고전 13,1-14,1). 따라서 예수의 축사사역에는 인간을 파괴하는 귀신들에 대한 분노와 동시에 인간에 대한 긍휼과 사랑이 들어가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귀신축출의 목표는 귀신들린 자의 자유와 해방, 그리고 가정과 종교에로의 회복, 그리고 또한 평화를 누리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과 긍휼 때문에, 그리고 인간을 파괴하는 사탄과 그의 세력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이 길을 가고 있는가?
1 예수(Jesus)
인물
jesus
11136 77 2006-12-27
▶ 예수(Jesus) 뜻 : 구세주, 예수(Jesus)는 고대 그리스어: Ίησους 이에수스의 라틴어 표기이며, 이에수스는 다시 여호수아(히브리어: Jehoschua) 혹은 예슈아(히브리어: Jeschua)를 코이네 그리스어로 옮긴 사두람이다. Jehoschua의 어원은 접두어 Je- (히브리어: JHVH/YHWH:Jahveh 야훼, 하느님)와 히브리어: Hoshea(구원, 구세라는 뜻을 가진 호산나)를 덧붙여 이루어진 사람이다. [1] 예수 그리스도 [2] 예수 그리스도 족보중 한 사람 (눅03:29) cf. 예수아 ---------------------------------------------------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 ▶ 예수님의 칭호(Jesus) (1) 주 (마03:3, (막01:3, (눅03:4). (2) 길 (요14:6, (히10:20). (3) 신 (고후03:17-18). (4) 홀 (민24:17, (창49:10). (5) 곶 (애02:1). (6) 예수 (마01:21,25). (7) 감독 (벧전02:25). (8) 구주 (눅02:11, (행13:23, (욥19:25, (사63:8). (9) 인자 (마08:20, (요01:51, (히02:6, (단07:31). (10) 임금 (행05:31). (11) 생명 (요14:6, (요11:25, (골03:4). (12) 말씀 (요01:1, (계19:13). (13) 반석 (고전10:4, (민20:11). (14) 참빛 (요01:9, (요08:12). (15) 부활 (요11:22). (16) 진리 (요14:6). (17) 기묘 (사09:6). (18) 모사 (사09:6). (19) 목자 (벧전02:25). (20) 사도 (히03:1). (21) 실로 (창49:10). (22) 산돌 (벧전02:4). (23) 아멘 (계01:7, (계03:14). (24) 남편 (사54:5). (25) 분수 (슥13:1). (26) 가지 (슥03:8, (슥06:12, (사11:1, (렘23:5). (27) 유대왕 (마02:2, (눅23:3). (28) 돋는 해 (눅01:78). (29) 선지자 (눅24:19, (신18:15,18). (30) 독생자 (요01:14,18). (31) 메시야 (요01:41). (32) 양의 문 (요10:7). (33) 집의 터 (고전03:11). (34) 후 아담 (고전15:45). (35) 중보자 (딤전02:5, (딤전12:24). (36) 재판장 (딤후04:8). (37) 하나님 (히10:37). (38) 이긴 자 (히02:15). (39) 오실자 (히10:37). (40) 산 소망 (벧전01:3). (41) 대언자 (요일02:1). (42) 새벽별 (계22:16, (민24:17, (사42:1). (43) 섭정자 (단09:25). (44) 택한 종 (마12:17, (사42:1). (45) 임마누엘 (마01:23, (갈07:14). (46) 그리스도 (마01:23, (갈07:14). (47) 구원의 문 (요10:9). (48) 선한 목자 (요10:11, (히03:20, (시023:1). (49) 본되신 자 (요13:15, (롬15:5, (벧전2:21-23). (50) 포도나무 (요15:1). (51) 생명의 주 (행03:15). (52) 만유의 주 (행10:36) (53) 영광의 주 (고전02:8). (54) 청결한 자 (히01:3). (55) 대제사장 (히03:1, (히04:14, (히05:1, (히06:20, (히07:24). (56) 만유의 주 (계17:14, (계19:19). (57) 만왕의 왕 (계17:14, (계19:16). (58) 영광의 왕 (시024:7-8). (59) 평강의 왕 (사09:6). (60) 시험한 돌 (사28:16). (61) 우리의 의 (렘23:6). (62) 그 왕 다윗 (렘30:9, (호03:5). (63) 겸손한 왕 (슥09:6). (64) 의로운 해 (말04:2). (65) 다윗의 자손 (마09:27, (마21:9, (마22:42,45). (66) 거룩하신 자 (눅04:34, (행03:14, (요일02:20). (67) 이스라엘 왕 (요01:49). (68) 생명의 양식 (요06:35,38:51). (69) 거룩한 아들 (행04:27). (70) 구언하실 자 (롬11:26, (사59:20). (71) 교회의 머리 (엡04:15, 엡05:23). (72) 크신 하나님 (딛02:13). (73) 승천하신 자 (히04:14). (74) 언약의 보증 (히07:22). (75) 믿음의 주인 (히12:2). (76) 보배로운 돌 (벧전02:4-6). (77) 신실한 증거 (계01:5). (78) 처음과 나중 (계01:17, (계02:8, (계21:6, (계22:13). (79) 진실하신 이 (계03:14). (80) 창조의 근원 (계03:14). (81) 다윗의 뿌리 (계05:5, (계22:16). (82) 여호와의 종 (사42:1,19, (사52:13, (사:12:17). (83) 여호와의 팔 (사53:1) (84) 언약의 사자 (말03:11). (85) 하나님의 아들 (마03:17, (막01:11, (눅03:22. (요01:49). (86) 안식일의 주인 (마12:8). (87) 우리 유월절 양 (고전05:7,출12:). (88) 하나님의 형상 (고후04:4, (히01:3). (89) 장인의 버린돌 (벧전02:7, (시118:2). (90) 알파와 오메가 (계01:17, (계02:18, (계21:6, (계22:13). (91) 만물의 지으신 자 (요01:3, (요22:13). (92) 하나님의 어린양 (요01:29, (계05:6). (93) 미리 알게 하는자 (계05:5). (94) 유대 지파의 사자 (계05:5). (95) 영생하신 아버지 (사09:6). (96) 전능하신 하나님 (사09:6). (97) 지극히 높으신 자 (단07:25). (98) 여호와의 짝된자 (슥13:7). (99) 하늘로써 내려온자 (요03:13). (100) 집 모퉁이 요긴한 돌 (엡02:20). (101) 하나님의 영광 (히01:3). (102) 거룩하게 하시는 자 (히13:12). (103) 죽음에서 먼저 사신자 (계01:5). (104)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미05:2). (105) 여호와의 기뻐하는 자 (사42:1, (마03:17). (106)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계03:7). (107) 아름다운 소식 전하는 자 (사05:27). (108) 세세에 찬양 받으실 하나님 (롬09:5). (109)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을 잡은 이 (계02:12). (110) 일곱 신과 일곱 별과 일곱 등대를 가지신 이 (계02:1). (111) 일곱 별과 일곱 등대를 주장하는 이(계02:1). (112) 눈이 불같고 발이 빛난 주석 같으신 이 (계02:28). ▶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란 예수의 칭호는 마태복음 (마04:3, 4:6, (마08:29, (마14:33, (마16:16, (마26:63, (마27:54, 마가복음 (막03:11, (막05:7, (막09:7, (막15:39, 누가복음 (눅01:35, (눅04:41, (눅08:28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마태에 있어서 예수는 그가 출생한 이래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그를 그렇게 선포하고 있다(마03:17)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고백은 마14:33과 27:54과 같이 예수에 대한 직접적인 칭호로서 신앙 고백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호칭은 메시야와 동일시되어 불려지기도 하였다(마26:63).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포되는 광경을 볼 수 있으며, 귀신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으며(마3:11, 마5:7) 예수는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누가복음에서는 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태어날 아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 질 것을 말하고 있다(눅1:35). 그리고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 마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호칭하고 있다(눅4:3). 킹즈베리는 기독론적인 문서인 마태복음 전체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발견해 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에게 있어서 마태의 예수는 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성서 속에서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마태복음 17:1-8에 나오는 예수의 변모에 관하여서 예수의 수세이야기와 비슷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하늘에서 들여오는 음성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마태복음 17:5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자기의 유일 무이한 선택된 아들로서 다시 한 번 선포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증거로서 포도원 비유에서의 농부의 아들을 자기로 알레고리화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소작인들에 의해 결국 성밖에서 죽어야 하는 포도원주인의 아들을 알레고리 적으로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을 증거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비교적 역사적-경제적 사실과 많이 부합하는 문서로 간주되는데, 이러한 비유들은 투쟁, 변호, 방어, 공격, 도전 등 주로 논쟁을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서의 모든 비유를 알레고리 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포도원 비유가 나오는 마태복음 21:33-46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짐작하고 비유를 들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큰 증거로서 삼고 있다. 또한 이 비유는 이사야 5:1-7의 포도밭의 노래를 소재로 하고 있다. 즉 이사야의 이 텍스트로부터 가져왔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관복음서안의 이 포도비유가 수정되며(죽은 포도원 주인 아들의 죽는 장소에 따라 복음서마다 다른 것은 편집…수정하는 과정에서 결국 십자가의 고난에 그리스도가 매달리게 될 장소는 성밖이란 점에서, 그렇게 수정…편집되었다는 것)복음서안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는 달리 혼인잔치 비유는 맥락상으로 살펴 볼 때 예수의 십자가상의 고난을 넘어선다. 전자가 십자가 처형을 예견한다면, 후자는 마태복음 28:18 이하에서 제자들이 받는 위대한 사명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마태는 알레고리를 통해 이 비유를 예수에게서 시작해서 마태 자신의 시대에 이르는 구속사에 대한 묘사를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 중의 왕은 하나님, 그의 아들은 부활하신 예수, 혼인잔치는 메시아 향연, 초대받은 자들은 이스라엘, 종들은 제자들과 교회의 전도사들, 초대에 대한 무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의 거부, 종들을 때리고 죽이는 것은 교회에 대한 이스라엘의 박해, 군인들의 도시파괴는 예루살렘의 멸망,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차별 없이 초청해 옴은 이방인의 교회영입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심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비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왕의 아들인 혼인 잔치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메시아 향연인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주로 고백적인 배경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의 백부장의 신앙고백은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진술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곧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베드로의 고백이 나오는 16:16과 대제사장의 질문이 나오는 26:63에서 마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메시야라는 칭호는 서로 동격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스 콘첼만에 의하면, 메시야 칭호의 유래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역사적 출처는 모호한 것이다. 예수가 이미 자신을 그렇게 붙였는가 또는 교회가 비로서 이 칭호를 그에게 부여했는가하는 점은 그 칭호가 어디서 유래했으며 무엇을 의미하는 가하는 물음에서 중요하지 않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출4:22), 그리고 왕으로부터 나타난다. 시편 2:2의 기름 부은자, 7절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이것은 동양적 궁중 문학 양식이다. 물론 유대교는 하나님이 몸으로 낳았다거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구약성서의 왕칭호가 예수에게 이전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는 메시야의 의미와 동일하다는 가정이 이 시편귀절에 근거하여 자주 제기된다. 그러나 유대교안에서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 칭호들 사용한 것을 찾아볼 수없다는 사실이 그런 가정을 반영해 준다. ▶ 그리스도 그리스도(메시야)란 칭호는 마태복음 1:1, 1:16-18, 마2:4, 마16:16, 11:2, 16:20-21, 마22:42, 마23:10, 마26:63, 26:68, 마27:17, 27:22, 마가복음 8:29, 9:41, 누가복음 2:11, 9:20에 잘 나타나 있다. 마태는 이 ?메시야?라는 칭호를 한 차원에서만 사용하지 않았다. 마1:1에서 이 칭호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예수 메시야).마1:18, 마16:21도 같은 경우로 원문상 논란이 있으나 ?예수 메시야?가 정확한 독법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 메시야?라는 칭호가 단순한 이름으로 취급되었다 할지라도 마태복음서에 있어서 이 칭호는 ?예수가 메시야이시다?는 근본적 진리는 늘 함축하여 사용된다. 마태는 기독론적 칭호로서의 메시야란 칭호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메시야 그 분은 구약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고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그 오시는 이이시며,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시는 왕으로 오신 예수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완성시키는 분이며, 하나님의 권위로 사람들에게 구원 또는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통해 이 메시야라는 칭호를 더 나아가 유대인의 왕,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도 규정지으려 했다. 만약에 메시야란 칭호의 사용이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로 결과되게 되는 것이라면, 예수 메시야의 행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서의 행동이었다는 것과 메시야라는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의 대용어라는 이해가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한스 콘첼만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칭호이긴(막 8:29)하지만, 그리스도는 예수그리스도란 결합에서 단순히 이름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바울이 단지 형식적인 관사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도 이 진술은 타당하다. 그런데 그리스도란 의미가 이름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물론 희랍어를 쓰는 세계에서였다. 희랍인들은 메시야 칭호를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구원자의 본질을 다른 칭호와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기원 상으로 볼 때 메시야는 민족주의적인 유대교적 종말론에 속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구약성서에서 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본래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인 구원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구원자에 대한 표상들이 융합되어졌다. 즉 초월적인 존재로 고양되어 졌다는 것이다. 메시야는 묵시문학적 문헌의 대부분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다. 묵시문학에서 메시야 개념이 침투되어 있는 부분은 이차적 발전단계에 속한다. ▶ 인자(人子) 인자(사람의 아들)는 마태복음 마08:20, 마09:6, 마10:23, 마11:19, 마12:32, 12:40, 마13:37, 13:41, 마16:13, 16:27-28, 마17:9, 17:12, 17:22, 마19:28, 마20:18, 20:28, 마24:27, 24:30, 24:33, 24:37, 24:39, 24:44, 마25:31, 마26:2, 26:24, 26:45, 26:64, 마가복음 막02:10, 2:28, 막08:31, 8:38, 막09:9, 9:12, 9:31, 막10:33, 10:45, 막13:26, 막14:21, 14:41, 14:62, 누가복음 눅05:24, 눅06:56, 눅07:34, 눅09:22, 9:26, 9:44, 9:58, 눅11:30, 눅12:8, 12:10, 12:40, 눅17:22, 17:24, 17:26, 17:30, 눅18:8, 18:31-32, 눅19:10, 21:27, 21:36, 눅22:22, 22:48, 22:69, 눅24:7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인자라는 칭호는 마태복음서의 기독론적 칭호들 중 매우 중요한 칭호 중의 하나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 이론은 도전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칭호는 다른 복음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지칭하는 칭호로 마태복음서도 사용되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이 그렇게 분명하다 하여도 인자와 관련된 몇 가지 물음들은 아직도 마태복음서 연구가들 사이에 명쾌한 결혼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마태가 사용한 이 용어의 정확한 용법이 무엇인가? 이 용어는 왜 마태복음 8:20 이전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 용어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 칭호가 성격상 대중적인 경우는 진정한 한 기독론적 칭호로 작용하고 그 외에는 고백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의 보충적 역할을 함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인자는 예수의 사역의 세 구별된 국면을 따라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의 공적 사역과 관계된 것이고, 둘째는 그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관련된 것이다, 세째는 그의 재림과 관계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만히 보면은 이러한 인자의 기능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과 상당히 일치되어 나타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예수의 재림과 관련하여 거의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인자라는 칭호는 소위 예수님의 현지사역과 관련하여서는 그렇게 중요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킹즈베리에 의하면, 이 인자라는 칭호야말로 마가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가장 합당한 칭호이며, 따라서 아무런 수정이 필요 없는 유일한 칭호란 것이다. 그리고 이 칭호의 뛰어난 점은 마가복음에 있어서 이것이 항상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만 말씀되어진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에 이것은 예수의 자기이해(self-understanding)의 표현인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여러 칭호들 중 인자칭호는 가장 규범적인 것이 되며, 예수께 대한 다른 칭호들을 재해석하여 하나님께 예수님에 정하신 신적 운명이 고난과 죽음이란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도 예수를 예수 인자라 칭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인자의 기능이 나사렛 사람의 정체를 밝히는 것과는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킹즈베리에 의하면, 마가는 예수를 매우 분명하게 다윗적 메시야, 왕,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인자는 독자들에게 예수가 누군가를 설명하는데 사용된 흔적이 없다. 그는 인자의 세가지 면을 지상적인 자, 고난받는 자, 묵시적인 자로 이해했다. ▶ 주(主) 주라는 칭호는 마태복음 7:21-22, 마8:2, 8:6, 8:8, 8:25, 마9:28, 마14:28, 14:30, 마15:22, 마16:16, 16:22, 마17:4, 17:15, 17:16, 마18:21, 마19:27, 마20:30, 20:33, 마21:3, 21_19, 마24:42, 마25:11, 25:20, 25:22, 25:24, 25:44, 마26:22, 26:33, 26:35, 마가복음 1:17, 8:29, 막10:28, 막11:3, 막14:31, 누가복음 2:11, 눅5:8, 8:24, 8:45, 눅9:33, 9:49, 9:54, 9:61, 눅10:17, 눅11:1, 눅12:41, 눅13:23, 눅17:37, 눅18:28, 18:41, 눅19:8, 19:25, 눅22:33, 22:38, 22:49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한스 콘첼만에 의하면, 이 칭호는 원시교단에서 헬레니즘, 그리스도교에로의 이행이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다음 두가지가 격렬히 논의되고 있다. 이 칭호는 어디서 유래했는가? 언제 그리고 어디서 이 칭호가 그리스도교에로 들어왔는가? 이미 원시교단에서인가? 또는 헬레니즘 교회에서인가? 이미 원시교단이 예수를 주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까닭은 maranatha라는 부름은 순수히 묵시문학적 그리스도론의 표현이다. 교회는 스스로 고대하는 자로 이해한다. 그에 반하여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오실자를 기대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현재 지배하는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인 교단이란 윤곽이 들어 났다. 그 부름은 이제 예수는 주이시다. 이것은 간구가 아니라 환호와 선포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주는 교차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각기 뚜렷이라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즉 아들은 본질이오 주는 아들에게 부여된 지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를 부를 때에는 주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은 이 칭호에서 올리워진 자에 대한 관계성의 현재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칭호는 성서개념과 친밀히 결합돼 있다. 성령은 주의 역사의 현존이다. 주를 부르는 것 자체가 성령에 의해 역사 되는 행위이다. 킹즈베리에 의하면, 마태복음을 연구하는 몇몇 학자들은 대개 검증되지 않은 근거들 위에서 마태가 사용하는 주요한 기독론적 칭호는 주 혹은 퀴리오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면밀한 검토에 의해 들어 나는 증거에 따른다면, 이 칭호가 그렇게 두드러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마태는 퀴리오스라는 용어를 적어도 세 가지 수준에서 사용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의 능력을 지닌 분, 다윗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지닌 주, 인자의 능력을 지닌 주인 것이다. 마태복음 27:63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빌라도를 퀴리오스라고 부를 때 이 말은 순전히 전통적인 용법, 영어의 Sir와 동의로서 사용되고 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이 말은 많은 곳에서 하나님을 지칭한다. 물론 이 말은 예수의 칭호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퀴리오스란 말이 예수를 믿으면서 그에게 나오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만 나온다는 의미에서 고백적인 칭호이다. 이러한 것의 유일한 예외는 마지막 심판의 장면에서 저주받는 자들도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마7:21-23, 마25:37) 마태복음에서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기독론의 중심적인 칭호가 아니라 오히려 보조적인 칭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칭호는 그 칭호 자체를 넘어서 보다 명확한 다른 칭호를 암시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은 마태복음 9:27, 마12:23, 마15:22, 마20:30-31, 마21:9, 21:15, 마22:42, 마가복음 10:47-48, 누가복음 18:38-39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를 보면은 귀신들려서 예수께 나아 오는 자의 입에서 자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치유와 관련된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다윗의 자손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할 때 호산나하면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는데, 하지만 복음서의 이 구절들을 찾아서 자세히 보면, 그 다음 구절은 다윗의 자손의 영향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구절들이 나오는데 이를테면, 이는 누구냐에 대한 반문으로 사람들은 이는 나사렛사람이 아니냐는 구절은 다윗의 자손의 칭호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 한스 콘첼만에 의하면, 족보는 역사적인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남게 되는데 바로, 마가복음 10:48-소경 바디매오의 외침이다. 마가복음 11:1- 의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다윗 왕국의 도래에 관한 환호가 있다. 이것은 현시 전설 적이다. 한편 마가복음 12:35-17에서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요한복음 첫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윗의 자손인 예수그리스도는 태초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다. 콘첼만에 의하면, 이 구절들은 교회공동체의 두 단계 그리스도론을 표현해 준다고 한다. ▶ 하나님의 사자(使者) 마21:37, 요06:38, 요07:29, 요08:42, 요09:4, 요10:36, 요17:8, 21 ▶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이 되시는가? 나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요 1:1) 나의 창조주이신 예수님(요 1:3) 성육신하신 예수님(요 1:14, 20:27)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요 1:36, 요3:1-21)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요02:11, 요06장)) 나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요10:11) 나를 다스리시는 예수님(마02:6) 나의 부활하신 예수님(요11:25, 요20:1-8) 나의 선생이신 예수님(요13:13) 나의 생명이신 예수님(요15:4-5) 나의 친구이신 예수님(요15:14) 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요17:9) 나의 왕이신 예수님(요17:9, 마02:1-6) 나의 모퉁이 돌이신 예수님(마21:42) 나의 반석이신 예수님(고전10:4) 나의 대언자 이신 예수님(요일02:1) 나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히12:2) (이영제목사, 한국컴퓨터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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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대표 1.창조 2.족장 3.출애굽 4.광야 5.정복 6.사사 7.통일왕국 8.분열왕국 9.포로 10.포로귀환 11.중간 12.예수 13.초대교회 14.세계선교 관련그림.지도 1.창조 2.족장 3.출애굽 4.광야 5.정복 6.사사 7.통일왕국 8.분열왕국 9.포로 10.포로귀환 11.중간 12.예수 13.초대교회 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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