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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 월전 장우성 화백의 1953년 작품. (조선일보)
이순신연표
1545년 4월28일 서울건천동에서 출생
1576년 무과급제(32세)
1587년 여진족 침입에 패하였다고 구속
1591년 전라수군절도사임명
1592년 4월 임진왜란발발
1592년 7월 한산대첩
1593년 1월 웅포해전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
1597년 2월 원균과 불화로 구속
1597년 4월 사면 백의종군
1597년 7월 원균 대패로 복직
1597년 9월 명랑대첩
1598년 노량해전 전사
1604년 덕풍부원군 추봉 좌의정 가증
1688년 명량대첩비 건립
1705년 현충사 건립
1793년 정조 정일품 영위정으로 가증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인종 원년 3월 8일) ~ 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11월 19일)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한 조선 중기 무신(武臣)으로 장수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뛰어난 인격과 지도력을 갖추어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邊氏)의 아들로 고려 왕조 때 중랑장(中郞將)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다.
어린 시절
이순신은 1545년 서울에서 이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순신의 집안은 대대로 문신 관직을 지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참변을 당한 일 때문에 그의 아버지 이정은 백면서생으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순신이 태어날 무렵에는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그러나 이백록의 기묘사화 연루 여부에는 논란이 있다.
임진왜란 이전
문신 집안 출신이었지만,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좋아하였다고 하며 22살의 늦은 나이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살 때에 무과(武科)에 응시하였으나, 시험을 보던 중 타고 있던 말이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나 낙방했다. 4년 뒤인 1576년 32살에 비로소 급제하여1586년까지 북방 국경 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다.
1587년 당시 조산 만호이던 이순신은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여진족의 침입 때 패하였다는 죄로 수금되었으나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1589년 당시 비변사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하게 되자 이산해가 천거하여 정읍 현감이 되었다. 관직에 오른 지 14년만이었다. 곧 당상관의 직책인 만포첨사로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이때부터 이순신의 선정이 칭찬을 받게 되어 정읍에서 진도군수로 이배되어 부임되었으나 실제 부임되기도 전에 당시 좌의정이었던 유성룡의 추천으로 1591년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발탁되어 임명되었다. 이때도 부제학 김성일 등 많은 신하들이 그의 경험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대비하여 휘하에 있는 각 진의 실태를 파악하고, 군대를 재정비하고, 군량미를 확보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 군대를 강화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에는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이순신은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안 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이 있는 전라좌수영은 40척의 전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1592년 4월 13일에 일본군 30만명이 함대 700척으로 오후 5시경 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에 일본군 침략 소식이 전해진 것은 원균의 공문이 도착한 16일 밤 10시였다.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경상,전라,충청도에도 공문을 보냈다. 이순신은 우선 휘하 병력을 비상 소집하여 700여명을 모아 검열을 하고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전열을 정비한 전라좌수영 소속 함대는 4월 29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시켰다. 이때 이미 전라좌도 바로 전까지 일본군의 침입이 도달하고 있엇다. 30일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옥포 해전
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29일 노량으로 함대를 이동하였으며 여기서 원균의 전라우수군을 만났다. 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다. 이것이 첫 승리인사천 해전이다.이때 이순신도 왼쪽 어께위에 관통상을 입었다. 5월 7일 정오 옥포 항에서 정박하여 옥포를 침략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같은 날 오후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배 한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 전투는 8일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13척을 침몰시켰으나 육지로 도망간 적들은 전세가 불리하여 쫒지는 못하였다. 이때 조선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 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18일에는 도원수 김명원이 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부분 유린되고 있었다.
6월 2일에도 전투를 벌였는데 일본 수군의 화력에 비하여 우수한 승자총통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4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데 성공하였다. 5일 적 함대를 만나 큰배 한척과 중간배 12척 작은배 20척을 공격하였다. 8일까지 수색과 공격은 계속되었다.
한산도 대첩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2년(선조 25)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7월 4일 출발 6일에 노량에 이르러 전라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 이때 적선이 출몰한 정보를 얻어 8일 큰배 36척 중간배 24척 작은배 13척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거짓으로 후퇴하는 듯하여 적들을 큰바다로 끌어 낸다음 학의 날개처럼 배들이 진을 치고 지자총통, 현자총통, 승자총통등을 발포하여 적들을 괴멸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포격 후 돌진하여 적함을 깨뜨리고 배위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 이날 일본 수군은 큰배 한척, 중간배 일곱척, 작은배 여섯척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
9일 안골포에 적선 40여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아 10일 학익진을 펼치고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 이 때 육지로 도망간 400여명의 일본군은 12일 아침에 한산도 해변에서 발각되어 잡힌 후 처형되었다.
한편 7월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이 안성에서 승리를 하였다.
부산 대첩
8월 말 전열을 정비하고 부산으로 출정하였다. 당포에서 경상우수사와 합류하였으며 29일 적들의 동태에 대한 보고를 입수하고 29일 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9월 1일 아침 화준구미에서 일본 수군의 큰배 5척, 다대포 앞바다에서 큰배 8척, 서평포 앞바다에서 큰배 9척, 절영도에서 큰배 2척을 만나 쳐부수었다. 부산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소굴에 있는 400여척의 배 중 적선 100여척을 쳐부수었으며 2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이때 배들을 모두 부수면 상륙한 일본군이 몰려 도망갈 방법이 없어지므로 후일 수륙에서 함께 공격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러한 네차례의 대첩을 통해 일본 수군은 수로를 통하여 서해쪽으로 공격하고 보급하는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며 곡창인 전라도의 침략 또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진격은 기세가 꺽여지게 되었다.
원균과의 불화
1592년 6월 원균이 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공을 보고하였으며 이때부터 두 장군사이에 틈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과 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의 처리에 있어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제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등 문제를 일으켜 두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원균은 여러번 이순신의 명을 어겨 이순신은 이를 조정에 보고 하였으며 조정에서는 도원수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 있던 원균과 친한 권신들은 원균 편을 들었고 이순신의 보고에서 실상과 다른 조목을 찾아내었다. 결국 이순신은 견책을 받았으며 원균은 충청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웅포 해전
1593년 1월 10일 웅천현 웅포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으로 겁먹은 일본 수군은 과감한 전투대신 후퇴와 숨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각지역에 왜성을 쌓아 방비를 하고 전략 거점으로 삼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웅천에서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는 3월 까지 계속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
6월 한산도로 진을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다. 7월부터는 거제도와 진해, 가덕도 등지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조선3도수군은 견내량에 방어선을 설정하였으며 한편 일본 수군은 거제도의 영등포와 제포 사이를 방어선으로 잡고 있었다. 8월 1일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고 본직은 그대로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백성을 모으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비축하여 튼튼한 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편 김성일등은 진주를 지켜 전라도 호남지방을 방어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을 통해 조선의 군수 물자와 전쟁 수행능력이 보장되었다.
백의종군
초기 전세가 교착화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가 문제가 되었다. 두 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졌다.
교착화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을 적극적으로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 보다는 강화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 자체의 군사력으로 일본군과 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전략적인 이유에서 수비를 강화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결국 정유년인 1597년 2월 25일에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3월 4일에 투옥되었다. 그 때 정탁의 도움으로 결백이 증명되자, 4월 1일에 사면되었고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들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4월 13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만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몸과 마음이 모두 슬픔으로 피폐해졌다.
복직
1597년 7월 16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하여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이때 조선 수군에 의해 방어되던 서해안 연안 항로와 이에 따라 전략적 요충지인 전라도가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선 조정에서는 이항복의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때는 군사 120명에 함선은 12척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전열을 재정비 하기 위해 8월 29일에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겼다.
명랑 대첩
9월 14일, 일본군 수백 척의 이동 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랑 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 명랑 해협은 일명 ‘울돌목’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건조한 1척의 전선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일본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좌초하도록 하는 전술을 구사하여 133척의 일본군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하며 위험에 빠졌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노량 해전과 죽음
다시 재해권을 확보한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진린과 함께 1598년 노량진 앞바다에 모여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전투중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하던 이순신은 일본군의 총탄을 겨드랑이 부분에 맞고 쓰러진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여 전열의 흐트러짐을 막으려 했다고 한다. 그는 53살의 나이에 전사하였다. 이 전투가 이순신의 마지막 노량 해전이다.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 당일 유성룡 또한 조정에서 실각 되었다.
죽은 이후 관직
전사한 직후에 정1품 우의정(右議政)에 증직되었다. 1604년 선조는 그를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宣武) 1등 공신 및 덕풍 부원군(德豊府院君)으로 추봉하고 좌의정을 가증했다. 1643년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 1659년 효종 때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碑)를 세웠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5년 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년 정조는 정1품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을 가증했다. (네이버 지식iN에서)
사진설명 - 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역사년표Map BC -AD 1 -600 -1000 -1500 -1800 -1900 -1950 -1980-현재 (1945년이후 10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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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8 08:40:53 (*.39.206.245)
尙有十二 微臣不死 상유십이 미신불사
우리에게는 아직 열두척의 배가 남아있고, 이 보잘것 없는 신하가 죽지 않았습니다.
이내원/재미 이순신 교육운동가
[워싱턴 중앙일보]
2017/11/06 ,11/14
명량해전 준비 과정을 통해 보는 이순신의 참모습
1597년 정유재란의 해 음력 9월16일(양력 10월25일) 해남과 진도 사이의 좁은 물목 울돌목에서 벌어진 13척 대 133척의 압도적 열세의 조.일 대혈전은 여러가지 면에서 진기록을 남기며 조선 수군에 기사회생의 승리를 안겨 준 불가사의한 해전 드라마이다.
우선 이 해전의 배경이 1592년 4월13일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이 5년이 넘게 이어지는 동안 한번도 패한 일 없이 압도적 우위를 유지하던 조선 수군의 삼도수군 통제사직이 선조 임금의 오판으로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바뀌면서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전을 당하여 비롯된 결사 비상 응급 해전이라는 아주 특수한 의미를 담고 있다.
왜 ‘결사 비상 응급’인가? 믿음직스럽기만 하던 160여 척의 막강 판옥선단이 사라져 맨손으로 수백척 일본 수군을 맞아야 하니 죽을 각오 없이는 할 수가 없는 일이요, 지난 5년여 이순신 수군의 철벽방어로 막아냈던 일본군의 물자보급 생명선인 서해 북상 해로(남해를 지나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한양과 평양에 군사와 물자를 공급하는 필수 해로)를 막지 못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으니 비상이며, 밀려오는 일본 수군을 막을 준비를 할 시간이 허용되지 않으니 응급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한의 위기 상황속에서도 침착하고 단호하게 위기를 헤쳐나가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참 모습은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이 되니 힘써 살펴 볼 일이다.
이제, 7월 16일 원균의 칠천량 참패로부터 9월 16일 이순신의 명량대첩까지 정확히 두달간의 이순신 행적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1597년 정유년 7월 18일 새벽, 초계(합천)에 있는 권율 원수부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은 노량으로부터 달려 온 이덕필과 변홍달(이순신의 외가쪽 사람)로부터 이틀 전 16일 새벽의 칠천량 참패와 옛 전우 통제사 원균,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의 전사 비보를 듣고 통곡한다.
곧이어 도원수가 찾아와 대책을 구했으나 정확한 상황을 몸소 확인하지 못한 이순신이 자기가 직접 해안가를 답사하여 상황을 확인한 뒤 대책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말하자 도원수 권율이 쾌히 동의했다. 이순신은 그날 오후 지체없이 9명의 수행 군관을 거느리고 길을 따난다.
여기서의 이순신의 교훈은, 5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목숨 걸고 남해를 굳건히 지켰건만 선조 임금은 자기를 파면하고 고문까지 한 후 백의종군이라는 불명예 처벌을 내려 원망스러울 수 있었으나 지체없이 어려운 과제를 자원하여 맡아 백성의 안위를 우선으로 한 점. 즉 <본질 추구의 정신>과 <신속 위기 관리의 자세>이다.
그리고 오직 나라만을 위해서 노심초사하시는 이순신을 신령님도 가련하게 여겨 돌보는 탓인지 난중일기 곳곳에 신의 계시를 받는 듯한 꿈이야기가 신통하게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8월 2일의 일기에는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는 꿈’을 기록하였는데 신통하게도 다음날 8월 3일 진주 정개산 손경례의 집에서 선전관 양호로부터 통제사 재임명 교지를 받는다. 이날 오후 이순신은 길을 떠나 두치에서 섬진강을 건너 석주관을 거쳐 구례에 도착했는데 한나절 후 남원성 공격에 나선 일본 수군 주력부대인 시마즈 요시히로, 도도 다카도라와 고시니 유키나가 부대는 섬진강을 따라 남원으로 북상하였으니 한나절 차이로 길이 어긋나 마치 이순신이 하늘의 도움을 받는 듯한 모습이 연출됐다.
8월 9일의 일기에는 낙안 읍성 도착 장면을 기록하였는데 ‘사람들이 5리밖까지 나와 환영한다’하였고 오후에는 낙안을 떠나 10리쯤 왔는데 ‘늙은이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비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강권한다.’고 촌민들의 감동적인 이순신 복귀 환영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이순신이 백성들이 하늘처럼 믿는 통제사이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크다.
8월 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어사 박천봉으로부터 선조의 수군 포기 권고를 받는다. 요지는 싸움배 판옥선이 다 없어진 마당에 수군유지가 불가능하니 해전을 포기하고 초계 권율 수하로 돌아가 육전에 참여 하라는 지시였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그 유명한 상유십이 미신불사(尙有十二 微臣不死) 우리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배가 남아있고, 이 보잘것 없는 신하가 죽지 않은 이상 싸워 볼 희망이 있다는 단호한 결의로 오히려 임금을 위로 설득한다.
명량으로 덮쳐오는 200여 척의 적군 앞에 겨우 열두척의 판옥선을 가지고도 ‘아직도’ 열두척이나 남아 있으니- 라고 극단적 긍정의 표현을 쓴데서 포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본질을 추구하는 초인적 <이순신 긍정의 사고 방식>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8월 18일, 초계 원수부를 떠난지 꼭 한달 만에 고흥반도의 회령포에 도착해 바다를 대하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다를 지킬 수군대장이 그 긴박한 상황에서 한달만에야 겨우 바닷가에 도달했다면 그동안의 그의 행적이 궁금해 질 수 밖에 없다.
조선의 대형 목선인 판옥선 한 척에 필요한 인원은 노를젓는 격군 80명, 활을쏘는 사부와 화포를 발사하는 화포장등 약 50명을 합하여 130여 명이 필요했다. 그리고 물자로는 무기인 활과 화살, 화포와 화약과 군사를 먹이고 입힐 식량과 의복의 조달이 필수였다.
당시 해안 지역의 상황은 청천벽력같은 조선 수군의 완패 소식에 해안 백성들이 서둘러 내륙으로 피난을 갔기 때문에 무인지경이 되어 이순신이 구하는 수군 재건을 위한 인원 및 물자 수집이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이순신은 부득이 인가가 있는 내륙을 순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하동, 화개, 구례, 곡성, 옥과, 낙안, 보성, 장흥, 군영구미 등 내륙을 순방하고 회령포에 도착했던 것이다.
다음날인 19일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그가 끌고 온 10척의 판옥선을 인수받는다. 배설은 원균의 후임으로 경상우수사가 되어 원균 지휘의 칠천량해전에 참전하였으나 원래 겁쟁이인데다가 적세가 어마어마하고 원균의 전술이 미덥지 못하여 자기 수하 10척의 판옥선을 이끌고 전장을 이탈하여 한산도통제영에 들려 쌓여 있던 군량과 물자를 불태워 창야전을 시행하고 서진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드라마 같은 생생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배설은 비록 절체절명의 전투 현장을 이탈하여 사형을 당할 군법을 어겼으나한산도 청야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했고 이순신에게 명량해전의 판옥선 13척 중 10척을 제공하여 나라를 구하는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니 역사의 흐름은 참으로 짖궂은 데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배설은 판옥선 인수인계 현장에도 병을 핑계대며 나타나지 않아 스스로 명을 재촉하였으니 타고난 운명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나 할까?
그 후 배설은 고향 선산에 숨어 살다가 종전 다음 해인 1599년 3월 도원수 권율에게 체포 당해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에 처해졌다.그러나 오히려 이순신보다 3개월을 더 살았으니 끝내 아이러니의 주역임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8월 20일 이진으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다음날 21일부터 23일까지 이곳에서 지병인 속병이 도져 토사곽란으로 인사불성에 이른다.23일에는 다시 어란포로 이동하고28일에는 장도로 옮겼다가 다음날29일에는 진도 벽파진으로 다시 옮긴다. 그리고 달을 바꿔9월 2일에는 배설이 끝내 도주하고 말았다는 보고를 받고 한탄한다.
9월7일에는 정탐인 임준영으로부터 적선 13척이 어란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는다.9월9일에는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군사들의 긴장감을 풀어주고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하여 탐라(제주도)에서 기증받은 소 다섯 마리를 잡아 중양절 잔치를 벌여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다.
해전 하루 전인15일에는 마지막으로 진을 명량을 지나 우수영 앞바다로 옮기고, 장졸들을 모아 놓고 그 유명한 명언으로 군사들의 마지막 결의를 촉구한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 고 하였고,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가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날 밤 꿈에 신인(神人·신령스러운 사람)이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하였다고 기록하였으니,이 꿈으로 인하여 이순신은 승리를 예감하며 확신에 찬 과감한 작전 지휘를 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위에 든 그의 최고 명품 경구인 ‘필사즉생, 필생즉사’를 이순신은 문자 그대로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치열한 혈전을 앞두고 부하 장졸들의 결의를 다지고자내린 군령이었지만, 이 경구는 그 의미와 적용의 폭이 대단히 넓어 오늘의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죽자 살자 열심히 노력하면 뜻을 이룰 수 있지만,그렇지 않으면 실패하게 될 것’이란 뜻으로 널리 쓰고 있음을 교육자들은 알아 둘 일이다.
드디어 결전의 날9월16일 이순신의 일기는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군(관찰병)이 와서 보고 하기를 ‘적선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을 거쳐 곧장 진지를 향해 온다’고 했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에서 밑줄 친 부분을 주목해 보면 ‘명량 수로를 통과하여 이순신이 진 치고 있는 물결이 잔잔한 우수영 앞바다에서 해전이 벌어졌다’는 뜻으로 명량의 거친 물결과 소용돌이를 이용하여 적을 격파한 듯이 기술한 종래의 작품과 영상물이 허구임을 말하고 있다. (참조: 해군사관학교 명량해전도)
이순신도 곧바로 13척의 판옥선단을 이끌고 맨 앞장서 133척의 일본함대를 맞이했으나 어제의 다짐과는 달리 이순신의 기함 혼자서 130여 척의 적선에 둘러싸여 집중 공격을 받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다른 판옥선들은 칠천량 참패로 공포감을 미처 이기지 못한 데다 열 배가 넘는 적선을 보니 기가 질려 물결에 할 수 없이 떠밀려 간 듯이 멀찍이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가장 염려했던 병사들의 사기가 살아나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한 시간쯤 혼자서 맹렬히 독전하던 이순신은 적에게 공격 기회를 주게 될까 봐 뱃머리를 돌려 부르러 갈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초요기라는 깃발을 흔들어 오라는 신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다가온 중군장 김응함과 거제 현령 안위에게“너희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당장 처형하고 싶으나 또한 적의 형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게 해 주마”하니, 그들도 마음이 급하여 앞으로 돌진하였으나 곧 적에 포위당하여 이순신 기함이 달려가 구해 준다.
뒤에 처진 다른 판옥선들도 이순신 기함 혼자서도 맹렬한 화력으로 잘 버텨 내는 것을 보고는 자신감을 얻어 연달아 달려와 돌진한다.이때 이순신의 기함에 타고 있던 안골포(진해) 해전 때 투항해 온 일본인 병사 준사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바다에 떠 있는 일본 장수의 시체를 가리키며“마다시(馬多時), 마다시” 소리치는 것이었다.마다시란 전의 안골포 해전 때 조선군의 공격으로 전사한 일본 장수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동생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의 별명으로 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선봉장이 되었으나 동생 또한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이순신은 즉시 군사들에게 명하여 갈고리로 그 시체를 건져 올려 적군들이 보는 앞에서 시체를 토막 내게 하니 이 광경을 본 적들의 기세가 꺾이고, 그 틈을 타 맹공을 퍼붓자 적들은 전의를 잃고 31척의 함선만 격파당한 채 후퇴했다. 이로써 이순신은 불가사의의 부활전을 승리로 마감하여 꺼져가는 조선의 운명을 또다시 구해 낸다. 구루시마 형제는 원래 해적 출신 형제 수군 장수로 조선의 해안을 약탈하던 왜구 우두머리였던 셈인데, 형제가 나란히 조선 수군에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으니 지은 죄에 따른 인과응보라고나 할까?
한편, 이순신은 하루 전 장병들을 독려하며 전했던 그의 명언 ‘필사즉생’을 몸소 실천하여 어렵게만 보이던 승리를 달성하는 살아 있는 교훈을 역사에 길이 남긴 셈이다. 또 다른 경구 ‘일부당경’은 명량해전 4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때 이순신이 구상한 비상한 전략, 3차원적 병목(Battle neck) 저지 지리전 개념을 겨우 2차원 평면적 명량해협의 폭으로 부족한 해석을 내리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순신이 폭이 좁은 명량해협(현재 진도대교가 있는 지역)을 해전지로 택한 이유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조선 수군의 약점을 지리적 특성으로 보완하는 이른바 지리전 개념에서이다. 바꾸어 말하면 적선이 수백 척이라 하더라도 폭이 불과 300여 미터인 해협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한 줄 또는 두 줄로 서서 차례대로 항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목을 지키고 있는 막강 화력의 조선 판옥선이 통과해 나오는 대로 격파해 버리면 승산이 있다는 구상이었다.
여기까지는 지금까지의 이순신 연구가들이 모두 공감을 하는 바이지만 명량해협이 폭만 좁은 것이 아니라 수심이 1.9 미터밖에 되지 않아 배 밑이 V 자 형인일본 선박의 통과가 어렵다는 이순신의 입체적(폭과 깊이) 저지 개념을 완전히 해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이유는 해전 직전 일본 선단 200 척이 명량 입구까지는 도착하였지만, 이순신의 일기대로 명량을 통과해 참전한 일본 선박은 133척에 불과했고,이들은 모두 크기가 작고 전투력이 약한 협선뿐이었다. 막상 전투력이 강한 일본 대형 선박인 아다케선 약 70척은 수심이 얕은 명량 수로를 통과할 수 없어 입구에 묶인 채 결과만 기다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어찌 이것이 우연이겠는가?이순신은 명량의 폭과 깊이 두 방향의 입체적 병목현상을 비상한 전술로 구상하고 그렇게 성공하였지만, 자기 자랑을 극히 삼가는 겸손한 분이어서 이 구상을 일기에 기록하지 않은 연고로 우둔한 후손들이 이순신의 천재적 전략 구상을 절반 이하로 깎아내려 평가했다는 죄스러움이 앞선다.
마지막으로, 아무도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던 절대 열세의 명량해전을 대첩으로 이끈 총체적 승리 요인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한마디로 그 승리 요인은 군·관과 지역 국민의 절대적 신임과 존경을 받는 통제사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통합적 국민 총력전이라고 할 수 있다.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했다는 소식에 숨어 지내던 백전 경험의 옛 부하 장졸들이 자진해서 속속 복귀하여, 판옥선은 13척뿐인데 오히려노련한 장병들이 충분하여 판옥선 당 인적 전투력은 패전 이전을 능가했다. 더하여 절에 있던 승려들이 다수 의승군으로 참전하여 힘을 더했다.
10월 하순의 바닷바람은 추위를 더하여 먹을 식량과 추위를 막을 의복이 문제였으나 이는 살 곳을 찾아 이순신 진영으로 모여든 이삼백 척의 피난 선단이통제사가 없으면 우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자각으로 자진해서 식량을 거두어 먹이고 옷을 주어 입혔으니 명량해전의 이순신 수군은 거지군대였다.
결론적으로 명량해전은 하나의 위대한 지도자와 통합의 리더십이 얼마나 큰일을 해낼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표본적 교훈이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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